22.11.05(토)
소윤이와 시윤이는 어제 무척 늦게 잤지만 언제나처럼 그만큼 늦게 일어나지는 않았다. 오히려 더 빨리 일어났다. 빨리 일어나서 부지런히 놀겠다는 심정으로. 아예 따로 잤으니 언제 일어났는지는 알지 못했지만 아무튼 내가 정신을 차렸을 때는 거실에서 소윤이와 시윤이의 소리가 들렸다. 난 아침부터 온라인으로 모임이 있어서 방에서 나가지도 않은 채 모임에 참여했다.
결혼식에 가야 했다. 원래 소윤이가 따라 간다고 했었다. 시윤이는 남아서 할머니, 할아버지, 고모, 사촌 동생과 시간을 보내겠다고 했다. 소윤이는 아빠를 따라 가도 되고 남아도 된다고 했다. 진심이었다.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다는 뜻이었다. 시윤이가 갑자기 마음을 바꿨다. 자기가 아빠를 따라 가겠다고 했다. 소윤이가 어떻게 해도 상관이 없다고 했으니 시윤이의 의견을 적극 수용했다. 시윤이는 다시 마음을 바꿨다. 갈등하는 듯했다. 어제 자기 전까지도 못 정했는데 아침에 일어나도 비슷한 상황이었다. 오히려 약간 억지를 부렸다. 누나가 아빠와 함께 가면 자기도 아빠와 가고 누나가 남으면 자기도 누나와 남겠다고 했다. 선택지에 없었고 성사 불가능한 상황을 만들어서 우기고 있었다. 시윤이를 설득(?)하는 데 지친 어른들은 시윤이의 요구대로 제비뽑기로 결정하려던 참이었다.
“시윤아. 아빠 말을 들어 봐. 지금 제비뽑기로 결정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어. 제비뽑기로 결정을 해도 지금 시윤이가 얘기하는 상황은 일어나지 않는다니까. 시윤이는 아빠를 따라서 같이 결혼식에 갔다가 데이트를 하거나 여기 남아서 할머니, 할아버지, 고모랑 같이 놀거나 하는 거야. 누나랑 같이 아빠를 따라 가거나 누나랑 같이 여기 남는 건 제비뽑기를 해도 안 돼”
시윤이 말로는 결혼식만 갔다가 바로 오는 건 줄 알았고 데이트도 하는 지는 몰랐다고 했다. 여러 번 얘기를 했기 때문에 시윤이가 진짜 그렇게 생각한 건지 아니면 그냥 얘기한 건지는 모르겠다. 아무튼 시윤이는 나와 함께 가기로 했다. 시윤이는 어제보다 더 피곤해 보였다. 그저 피곤하고 졸린 건지 아니면 몸이 안 좋은 건지 구분하기 어려웠다.
“시윤아. 안 힘들어? 괜찮아?”
이 질문을 수십 번은 했나 보다. 그때마다 시윤이는 괜찮다고 했다. 조금 졸리고 피곤하지만 힘들거나 아픈 건 아니라고 했다. 기침은 어제보다 더 심했고 콧물은 어제보다 많이 나왔다.
결혼식 장소가 문래동이었다. 결혼식을 마치고 나와서 근처에 있는 쇼핑몰로 갔다. 서점도 구경하고 잡화점도 구경했다. 중간에 오락실에 가서 오락도 했다.
“시윤아. 그냥 이렇게 구경만 하는 것도 좋아?”
“네. 재밌어여”
진심인 듯했다. 지겨웠다면 진작에 다른 곳을 가자고 했거나 심심하고 지루하다며 불평을 했을 거다.
쇼핑몰에서 나와서 문래동 창작촌에 갔다. 정확한 정보를 가지고 간 건 아니었다. 그저 ‘문래동 철공소 골목이 요즘 뜨겁다더라’ 정도의 시류의 흐름만 주워 듣고 갔다. 지도에 ‘문래동 철공소 골목’이라고 치니 알아서 ‘문래동 창작촌’으로 변환해서 주소를 알려줬다. 지도를 따라 꽤 걸었는데 생각보다 너무 아무것도 없었다. 즐비하게 이어진, 보통의 동네에서는 보기 힘든 철공소의 풍경이 굉장히 이색적이긴 했지만 ‘창작촌’이라는 이름을 붙이기에는 너무 철공소 뿐이었다. 벽과 담에 그림이 그려져 있긴 했지만 역시 그 정도로는 ‘창작촌’이라고 부르기 어려웠다. ‘창작촌’의 의미를 살리는 예술적인 공간은 그렇다고 해도, ‘뜨거운’ 거리에 걸맞은 분위기도 아니었다. 사람이 많지도 않았고, 카페도 없었고, 식당도 없었다. 직감적으로 ‘여기가 중싱 거리가 아닌가 보다’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래저래 꽤 많이 걸었다. 걸으면서 사진도 찍고 주변 풍경을 보며 대화를 나누기도 했지만, 이게 과연 여섯 살 감성에 적합한 데이트인가 하는 염려도 됐다.
“시윤아. 안 힘들어?”
“네, 괜찮아여”
“시윤아. 아빠랑 오길 잘 했어?”
“네”
“왜? 지루하지 않아?”
“안 지루한데여?”
“그래? 별로 하는 것도 없이 계속 걷기만 하잖아”
“괜찮아여. 걷는 것도 좋아여”
다행이면서도 신기하다. 시윤이도 이런 느낌의 데이트를 싫어하지 않는다. 자극과 쾌락이 없어도, 담백하고 건조해도 좋아한다. 여러 모로 좋다. 같이 여행을 할 때도, 데이트를 할 때도. 꽤 많이 걸은 덕분에 힘들었다. 쉬는 시간이 필요했다. 검색을 해서 근처의 괜찮은 카페를 찾았다. ‘뜨거운 거리’에 있는 ‘뜨거운 카페’인 듯했다. 사람이 엄청 많았다. 줄을 서서 기다려야 했다.
“혹시 벤치 자리도 괜찮으세요?”
“아, 네”
어차피 많이 앉았다 갈 생각은 없었다. 다른 사람들은 벤치 자리보다는 의자에 앉는 자리를 기다렸나 보다. 덕분에 기다리지 않고 바로 들어가서 앉았다. 아이스 아메리카노와 에이드를 한 잔 시켰다. 시윤이가 계속 피곤해 하고 지쳐 보여서 걱정이 되긴 했지만 여전히 힘들거나 아프지는 않다고 했다.
“시윤아. 아빠는 시윤이랑 이렇게 둘이 시간 보내고 데이트 하니까 너무 좋네? 그냥 손 잡고 같이 걷기만 해도 좋아”
“아빠. 저도 그래여”
원래 시윤이와 약속한 게 많았다. 야구도 봐야 했고, 축구도 봐야 했고, 관람차도 타야 했고. 야구도 축구도 시즌이 끝나서 내년이나 돼야 가능한 일이 되었다. 항상 뒤로 밀리는 시윤이에게 매번 미안하다. 약속했던 것과 다르게 소박하고 담백하디 담백한 데이트에도 크게 만족해 주는 게 괜히 더 고마웠다.
꽤 힘든 여정이었을 텐데 시윤이는 짜증 한 번을 내지 않았다. 평소에는 과연 무엇이 그를 그토록 짜증나게 하는지 궁금했다. 역시나 독점하는 사랑을 향한 갈구의 증상인가. 지하철을 타고 이동하는 시간도 데이트로 즐기는 듯 전혀 힘든 내색을 하거나 불평하지 않았다. 오히려 나에게 위기가 있었다. 20분에 한 번씩 오는 지하철을 기다리다가 막 도착해서 타려고 했는데 시윤이가 말했다.
“아빠. 똥 마려워여”
“아, 그래?”
1차 위기였다. 생리현상은 시윤이가 조절하는 게 아니라는 걸 당연히 알면서도 ‘왜 굳이? 지금?’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이성의 끈을 잘 부여 잡았다. 20분 더 기다리는 게 뭐 어렵냐고 생각하면서 화장실로 올라가는데 시윤이가 뭔가 이상했다.
“시윤아. 혹시 팬티에 조금 쌌어?”
“그런 거 같아여”
2차 위기였다. 서윤이도 아니고 시윤이가. 지금껏 좋았던 데이트의 추억을 그깟 똥 때문에 망치면 안 된다고 끝없이 되뇌며 마음을 조절했다. 도토리만한 똥알이 팬티를 굴러다녔다. 기꺼이, 아무렇지도 않게(혹은 않은 듯) 뒤처리를 했다. 앞으로는 조금이라도 마려운 느낌이 들면 바로 말하거나 말하고 나면 꾹 참으라는 정도만 얘기했다. 시윤이는 나름대로 ‘마려운 느낌이 나자마자 말한 거라고 했다. 근래 들어서 자주 이런다. 왜 그런지 모르겠지만.
소윤이는 소윤이 나름대로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고 했다. TV로 만화도 보고 도서관도 가고 마트도 가고 슬라임도 가지고 놀고 글라스데코도 하고. 동생과 나누고 동생에게 양보하고 배려할 걱정 없이 자유로운 시간을 보낸 자체가 즐거웠을 거다. 소윤이와 시윤이는 서로 뭘 했는지 물어보기 바빴다.
소윤이와 시윤이는 어제보다 30분 정도 이른 시간에 자러 들어갔다. 오늘도 할머니와 함께 자겠다고 했다.
“소윤아, 시윤아. 오늘은 진짜 너무 많이 떠들면 안 돼. 알았지? 지금 시윤이도 잠이 너무 부족한 데다가 기침도 많이 해서 언제 아플지 몰라. 소윤이는 아프고 와서 또 아프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잠이 너무 부족해. 우리 내일도 바쁘게 움직여야 하니까 오늘은 진짜 너무 많이 떠들지 말고 일찍 자. 알았지? 오늘은 너희가 너무 많이 떠들고 안 잔다 싶으면 아빠가 자는 방으로 오라고 할 거야”
라고 얘기는 했지만 역시나 실천하기 어려운 일일 거라고 생각했다. 언제쯤 ‘이제 조용히 하고 자라’고 얘기하러 들어가야 하나를 가늠하고 있었다. 아이들이 들어가기 전부터. 할머니와 함께 자러 들어간 소윤이와 시윤이가 의외로 조용했다. 아마 속삭이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아빠의 엄포(?)도 있었으니 최대한 바깥으로 소리가 새어 나가지 않도록, 작은 목소리로 얘기하고 있을 거라고 확신했다.
아니었다. 들어간 지 30분도 안 돼서 (내) 엄마가 나왔다.
“소윤이랑 시윤이 벌써 자요?”
“어, 시윤이가 먼저 잠들고 소윤이도 잠들었어”
둘 다 피곤하긴 했나 보다. 평소에 비하면 매우 늦은 시간이었지만 어제에 비하면 훨씬 이른 시간이었다. 오늘의 일정상 그보다 일찍 자는 건 어렵기도 했다.
난 오늘도 독방이었고 오늘도 서윤이 동영상을 보면서 잠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