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11.12(토)
원래 아내에게 아침을 맡기고 조금이라도 더 자려고 했는데 왠지 모르게 미안해서 아내와 함께 일어났다. 아내는 오늘 아침 일찍 나가야 했다. 처치홈스쿨 엄마 선생님 모임을 갖는다고 했다. Y의 아내도 함께 가기로 했다. 자녀들은 두고, 홀연하게 홀몸으로. 아침도 남편에게 맡기고 떠나기에는 왠지 모르게 미안했나 보다. 사실 전혀 그런 마음은 안 가져도 되는데. 놀러 나가기 위해 더 부지런히 일하는 게 괜히 미안해서, 나도 열심히 도왔다(라고 말하기에는 그저 고기를 열심히 구운 게 전부지만).
엄마들은 떠나고 Y와 둘이 남았다. 아, 물론 각자의 자녀 세 명씩도 함께. 아내가 어제 만들어 준 샌드위치를 그대로 만들어서 먹었다. 커피와 함께. 자녀들은 여전히 자기들끼리 잘 놀았다. 주로 보드게임을 하는 것처럼 보였다. 점심에는 엄마들을 떠나 보내고 남은 남편들이 자녀들을 데리고 만나기로 했다. 나와 Y, K, 또 다른 K가 각자 자녀를 동반했다. 아빠 넷에 자녀 열하나였다. 꽤 거대한 규모였다. 소윤이와 시윤이는 여러 명의 또래 자녀를 한 번에 만나니 좋아했다.
일단 교회에서 만났다. 만남이 가능한 곳 가운데 가장 넓고 자유로운 곳이 교회였다. 그 뒤의 시간이 어떻게 펼쳐질지는 예상이 되기도 했고 안 되기도 했다. 모인 지 얼마 안 돼서 금방 점심 시간이 됐다. 근처 시장의 분식집에 가서 먹기로 했다. 분식집에 이런 대규모 인원이 들어갈 만한 공간이 있을까 싶었는데, 보통 분식집이 아니었다. 열다섯 명이 앉고도 자리가 남을 정도로 넓은 분식집이었다. 이것저것 시켜서 먹었다. 소윤이와 시윤이는 의외로 떡볶이를 무척 잘 먹었다. 매워서 잘 못 먹을 줄 알고 시켰는데 정말 잘 먹었다. 덕분에 나는 순대와 내장을 아주 많이 먹었다.
소윤이가 떡볶이를 젓가락으로 집어서 들고 있었다. 쇠젓가락으로 떡볶이를 들고 있었는데 소윤이는 떡볶이가 아닌 다른 곳에 집중을 했다. 쇠젓가락 사이에서 미끄러지는 떡볶이가 느린 화면처럼 보였다.
“어어어, 소윤아. 떡ㅂ….”
까지 말했는데 떡볶이가 쇠젓가락을 탈출했다. 소윤이의 마스크와 윗옷, 바지를 차례대로 거쳐서 바닥으로 낙하했다. 지나친 곳마다 선명한 떡볶이 자국이 남았다. 특히 배 쪽에 아주 크게 묻었다. 얼룩이나 자국에 크게 민감하지 않은 나도, 괜히 마음이 어려워지는 큰 낙하였다.
“소윤아. 그러니까 아빠가 젓가락으로 뭐 집을 때는 딴 데 보지 말라고 했잖아”
짜증은 아니었다. 분노도 아니었다. 정말 감정을 배제하고 얘기했지만, 속에서는 깊은 탄식이 터져 나왔다. 그 정도로 거대한 떡볶이 자국이 남았다.
생각보다 정신이 없는 것 같기도 했고, 생각보다 질서 있고 평안한 것 같기도 했다. ‘이 정도면 괜찮은데?’ 싶다가도 어느 순간 ‘정신 사나움’이 느껴지면 ‘아, 아니지. 힘들구나’ 싶기도 했다. 어쨌든 무사히 점심을 먹기는 했다.
아빠들의 커피를 사서 근처 대학교 운동장으로 갔다. 어제까지만 해도 비가 온다는 예보가 있었는데 다행히 그렇지는 않았다. 오히려 너무 화창하고 맑고 깨끗했다. 운동장에서 놀기에 더 할 나위 없는 날씨였다. 게다가 서윤이는 유모차에서 잠들기까지 했다. 그렇다고 앉아서 쉬는 건 아니었지만, 서윤이를 따라다니지 않는 것만으로도 만족스러웠다.
소윤이와 시윤이를 비롯한 자녀들은 마음껏 뛰며 소리쳤다. 서윤이가 깨고 나서도 크게 힘들어지는 건 없었다. 같이 축구도 하고, 족구도 하고(아이들과 함께 하니 족구라는 이름을 붙이기 어려울 정도의 난장판이었지만) 그러다 보니 오히려 재밌기도 했다. 나를 비롯한 아빠 모두가 각오를 단단히 다지고 와서 그렇기도 했다.
“오늘 엄마들 언제쯤 온대요?”
“글쎄요. 저녁은 돼야 오지 않을까요?”
진작에 포기와 결단을 겸한 덕분에 마음이 무장됐나 보다.
아이들은 쉼이 없었다. 축구가 끝나면 족구를 하고 족구가 끝나면 농구를 하고 농구가 끝나면 달리기를 하고 달리기가 끝나면 어디선가 또 뭔가를 하고. 엄청난 체력이었다. 당연히 아빠들이 먼저 지쳐갔다. 그때 구원자가 등장했다. 아내들이 돌아왔다. 생각보다 이른 시간이라 의외였다. 마치 천국에서 돌아온 것처럼 밝은 얼굴이었다. 아내들도 밝고 남편들도 밝았다. 누가 더 밝은지 경쟁하는 것처럼. 아내들은 천국에서 돌아왔고, 남편들은 천국을 마주한 기분이었을까.
아내들이 등장하고 나서 아빠들은 족구를 했다. 둘 씩 나눠서 편을 먹고 세 판을 했는데 무척 즐거웠다. 통제가 되지 않는 자녀들의 개입과 방해를 막느라 애를 쓰긴 했지만 그 누구도 “아, 그만 합시다. 못 하겠네요 애들 때문에”라고 얘기하지 않은 걸 보면, 다들 재밌었나 보다. 역시 남자는 운동의 동물인가.
Y네 가족은 우리 집에서 하루 더 자기로 했고 K네 가족도 함께 저녁을 먹기로 했다. 또 다른 K의 가족은 집에 갔다. 오리불고기를 사서 먹었다. Y가 하루 더 자고 가겠다고 한 이유는 따로 있었다. 아니, 그게 전부는 아니었지만 주요한 이유가 하나 더 있었다. Y는 나와 K에게 PC방에 가자고 했다. 스타크래프트를 하자고 했다. 낮에 아주 만족스러운 시간을 보내고 온 아내들도 큰 거부감이 없어 보였다. Y의 강력한 추진 덕분에 아빠들의 단체 행동이 승인을 받았다. 집에 돌아갔던 또 다른 K도 호출했다. 도합 열한 명의 자녀를 둔 아빠 네 명이 야심한 밤에 만나서 스타크래프트를 즐겼다.
두 시간 정도 하고 돌아왔다. 세상에 이토록 건전한 아빠 모임이라니. 스스로 뿌듯했다. 아내들은 이제 막 상을 펴고 과자와 탄산수를 놓고 있었다. 약간 당황한 듯 보였다. 아마 남편들이 더 늦게 올 줄 알았던 것 같다. 얘기를 들어 보니, 자녀들이 다들 엄청 늦게 잠들었다고 했다. 얼른 재우고 일찌감치 수다의 꽃을 피우고 싶었는데 일찍은커녕 남편들이 돌아올 만큼 늦은 시간이 되어서야 자리를 편 거다.
남편들은 극도의 피로감에 시달렸다. 낮에 오랜만에 몸을 쓰며 땀을 흘린 데다가 밤에는 열정의 스타크래프트를 한 덕분이었다. 누구라고 할 것 없이 여기저기서 하품이 터져 나왔다. 기왕 늦은 김에 K네 가족도 우리 집에서 자고 가기로 했는데 K의 막내가 협조를 하지 않았다. 잠들었던 K의 막내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깼고, 다시 잠들지 못했다.
결국 K의 가족은 집으로 갔다. 남은 우리(Y 부부와 우리 부부)도 일찍 잤다. 남편들은 거의 바로 누웠고 아내와 Y의 아내는 빨래를 개면서 조금 더 이야기를 나눴다.
“여보. 00랑 침대에서 잘래?”
“왜?”
“그냥 이야기 좀 더 하라고”
“그럼 여보는? 어디서 자게?”
“나? 서윤이 옆에서”
“뭐야. 의도가 있었구만”
부정하지는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