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2.12(화)
아침에 시윤이는 계속 자고 소윤이만 일어나서 나를 배웅했다. 아내도 거의 출근 직전에 일어났다. 커피고 아침 식사고 챙기지 못한 아내는 커피 사 마시고 청구하라고 했다. 한 잔에 2,800원짜리 커피를 청구하는 건, 아무리 남편이라도 너무 쪼잔해 보인다고 생각했다. 2,800원은 쪼잔해 보이지만 10,000원은 그렇지 않다. 모아서 청구해야겠다고 전략을 세웠다. 여보, 미안.
불과 1년 전까지만 해도 겨울에도 웬만하면 아이스아메리카노였는데, 올 겨울은 그렇지가 못하다. 해가 갈수록 몸이 추위를 견디지 못하는 게 느껴진다. 나만의 취향이겠지만 아이스아메리카노는 속이 훤히 보이는 일회용 잔에 마셔야 맛있고, 따뜻한 아메리카노는 손잡이가 있는 머그컵 혹은 고급스러운 커피잔에 마셔야 맛이 산다. 그중 최악은(개인적으로) 따뜻한 아메리카노를 일회용 컵에 받아 마시는 건데, 최악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아이스를 고르지 못하는) 내 육체의 노쇠가 안타까웠다.
아내에게 걸려온 전화 너머로 시윤이의 거센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시윤이 왜 울어?"
"몰라. 뭐가 자기 뜻대로 안 되나 봐"
낮동안 큰 화젯거리나 사건이 없었다. 아내는 무난하게 하루를 보낸 듯했다. 물론 아내의 기준에서는 '무난'이라고 해도 기본적으로 소모되는 에너지가 있기 마련이다. 마치 우리 몸이 숨만 쉬어도 열량을 소비하는 '기초대사'처럼, 하루를 영위하는 데 필요한 최소한의 육아 에너지는 항상 소모하고 있다.
퇴근하니 하람이(505호 사모님 딸)가 집에 와 있었다. 일종의 육아 품앗이다. 막 애 둘의 엄마가 된 입장(505호 사모님)에서는 첫째를 잠시 누군가에게 맡겨 놓는 것만으로도 숨통이 좀 트인다. 딸과 같은 나이의 친구가 있는 우리 집 같은 곳은 그야말로 최적의 장소고.
아내는 부지런히 저녁을 만들고 있었다. 소윤이랑 하람이는 서로 역할을 정해 역할 놀이를 하고 있었다. 소윤이는 자꾸 언니 노릇, 자기중심적 리더 노릇을 하려고 들었다. 그저 성향의 문제로 간주하면 굳이 개입하거나 개선을 위해 노력할 필요가 없을 거다. 내가 보기에 소윤이는 상대가 불쾌함을 느낄 만큼 독단적일 때가 있기 때문에, 조금 더 섬세한 인간관계를 맺게 되는 때가 오기 전에 조금 더 완화되었으면 하는 게 나의 바람이다. (니가 누굴 닮았겠니. 다 이 못난 아부지를 닮았겠지)
저녁상이 차려지고 하람이는 아내가 505호에 데려다줬다. 소윤이는 요즘 저녁 먹으며 가장 많이 하는 말이 이거다.
"아빠. 졸려"
그래도 예전에는 졸리다는 말 하는 것 자체를 거부하더니, 그에 비하면 많이 발전했네. 시윤이가 궁금했다. 낮잠은 평소처럼 너무 늦지도, 이르지도 않은 시간에 1시간 정도를 잤다고 했다. 과연 최근 아내와 함께할 때 보여준 행보처럼 나의 인내심도 시험할 것인지.
아내는 애들 잘 준비가 거의 끝날 때까지 함께 힘을 보태고 하루 늦은 자유를 찾아 떠났다.
오, 대박. 시윤이는 거의 30분 만에 잠들었다. 거실로 나와 바로 아내에게 전화했다.
"여보"
"어. 이제 나왔어? 시윤이는?"
"엄청 금방 자던데?"
"와. 대박이네"
아내의 '대박'이라는 표현에는 나의 빠른 퇴근을 함께 기뻐하는 것이 아닌, 자기랑 있을 때는 그렇게 야속하게 굴더니 나랑 자니까 왜 그렇게 수월하냐는 아쉬움이 묻어 있었다.
"왜. 억울해?"
"아니. 그런 건 아닌데. 얘 진짜 나를 만만하게 보나?"
[너도 겪어봐라]는 놀부 심보는 아니었을 테지만, 남편이랑 잘 때만 별 고생 안 시키는 아들이 그저 야속하기도 하고, 왜 나한테만 그러나 싶기도 하고. 그랬겠지.
여보, 걱정 마. 그렇다고 내가 당신의 수고의 가치를 폄하하거나 평가절하하지 않으니까. 그저 내 때에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고, 여보 때에 빈번히 발생하는 것이 때로는 다행이라고 여길뿐이야. 하나님은 감당할만한 시험만 주신다고 하는 걸 보면, 난 아직 그 정도 그릇이 안 되었나 보지 뭐. 여보, 앞으로도 화이팅.
시윤이도 화이팅. 웬만하면 일찍 자고, 가끔 늦게 자고 싶은 날에는 옆에 엄마가 있는지를 꼭 확인해. 보통 사람 가리는 건 안 좋은 거지만, 이건 아빠가 봐줄게. 알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