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4.06(토)
아침 일찍 집을 나서야 했다. 처치홈스쿨과 관련해서 강의를 들어야 했다. 아침 9시 30분부터 오후 3시까지. 장장 다섯 시간 반이나 강의를 들었다. 당연히 애들도 계속 같이 있었다. 우리 애들만 있는 건 아니라서 애들은 애들끼리 잘 놀았다. 강의를 듣는 부모들과 아이들이 한 공간에 있었음에도, 제법 집중해서 강의를 들을 수 있었던 걸 보면 애들이 크게 방해가 되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친구들과 있으면 평소보다 기분이 좋아지고 흥분하는 건 모든 아이들의 공통사항이겠지. 소윤이도 그랬다. 요즘 배려와 양보에 대해 귀에 못이 박히도록 얘기해서 그런가 평소보다는 좀 나아 보였다.
아내와 내가 소윤이에 관해 요즘 가장 우려하는(?) 건, 교만과 무시다. 아직 과한 표현일 수도 있지만, 또래에 비해 말이 빠르고 표현이 정확하다 보니 알게 모르게(특히 할머니, 할아버지들로부터) 칭찬을 많이 듣는다. 정확히 말하면 칭찬이라기보다는, 어른들의 감탄을 소윤이가 엿듣게 되는 모양새랄까. 그래서인지 소윤이는 자기가 아는 건 자랑스럽게 내세우는 편이다. 이렇게 적어 놓으니 굉장히 좋기만 한 것 같지만, 꼭 그렇지는 않다. 잘 다루면 장점이요, 그렇지 못하면 모난 부분이 될 구석이 많다는 게 아내와 나의 판단이다.
자기 능력에 대한 신뢰는 가끔 다른 이들을 향한 무시나 독선적 태도로 나타난다. 친구의 의견을 묵살하고 자기 뜻대로만 한다거나, 누구는 이걸 못한다, 누구는 이렇게 얘기한다며 직설적으로 지적한다거나.
소윤이가 다 누굴 닮아서 그러겠나 하는 생각을 하면 부끄러움에 할 말이 없지만, 그렇다고 그렇게 크게 둘 수는 없다. 어떻게 다뤄야 하나 고민이 많다. 오늘 강의해주신 선교사님이 영어 수업 시연할 때도 소윤이는 다른 친구들이 발표할 차례에 자기가 안다며 나서고, 동생(시윤이)은 못한다는 말을 했다. 물론 선교사님께서 적절히 제재하셨다. 부디 처치홈스쿨을 하면서, 다른 아이들과 어우러지면서 조금 더 바람직한 모양으로 다듬어지길 바라고 있다. (소윤이의) 엄마처럼 두루두루 따뜻하고 부드러운 성품으로 자랐으면 좋겠다.
(시윤이는, 내가 느끼기에 자기 누나보다는 훨씬 부드러운 구석이 있다. 아직 할 줄 아는 게 별로 없어서 그런지 몰라도)
주변에 좋은 사람이 많으니까 그 사람들의 좋은 점만 잘 배우고 닮았으면 좋겠는데.
(엄마의 따뜻함과 부드러움, 할아버지의 성실함, 할머니의 알뜰함, 외할아버지의 인자함, 외할머니의 헌신, 외삼촌의 사려 깊음, 외숙모의 당당함, 고모의 야무짐, 고모부의 착함 등등) 그렇게 되면 노벨 평화상이 아니라 성경에 기록되고도 남겠네. 소윤아 몇 개라도 건져라.
저녁에는 장인어른 생신을 기념해 파주(처갓댁)에 가기로 했다. 아침에 집에서 나오면서 아내랑 이렇게 얘기했다.
"여보. 오늘 일찍 끝나도 바로 파주에 가자. 가서 좀 쉬자"
"그래"
강의가 예상보다 길어져서 그럴 시간은 없었다. 물론 처갓댁에 가는 그 자체가 잠시 육아에서 해방되고 쉬는 일이긴 하지만.
"여보. 오늘 자고 올래?"
"왜?"
"그냥. 너무 늦어져서, 금방 와야 되니까"
"아무것도 안 챙겨 왔는데"
"뭐 애들은 그냥 겉옷은 벗기면 되고, 우리도 옷은 하루 더 입으면 되지"
"그런가"
"생각해 보고 여보가 결정해"
장인어른과 장모님의 의사는 묻기도 전에 우리끼리 결정했다. 아내는 자고 오는 것으로 결정했다. 장인어른의 생신이신데 장모님과 장인어른이 회를 떠 오셨다. 아이들을 위한 소고기도 준비됐다. 거의 회로만 배가 터지도록 먹었다.
파주에 가기 전에 소윤이와 얘기를 나눴다.
"소윤아. 오늘도 할머니 집에 가서 군것질 많이 할 거야?"
"엄마, 아빠한테 먹어도 되는지 물어보고 먹을 거에여"
"그래. 그것도 좋은데 제일 좋은 건 소윤이가 스스로 생각해서 결정하는 거야"
"물어보지도 않고 먹는 건 제일 나쁜 거에여?"
"그렇지. 할머니나 할아버지가 간식 주시면 소윤이가 이걸 먹으면 몸에 좋을지 안 좋을지 생각해 보고, 먹을지 말지 결정해 봐"
"네"
"지금은 아직 소윤이가 어리니까 엄마, 아빠가 먹어라, 먹지 말라 해주지만 제일 좋은 건 소윤이가 생각해 보고 결정하는 거거든. 엄마, 아빠가 먹지 말래서 안 먹는 게 아니라 몸에 안 좋으니까 안 먹어야 되잖아"
"알았어여"
대화를 나눌 때까지만 해도 소윤이는 나에게 꽤 신뢰감을 줬다. 소윤이가 정말 잘 해낼 거라고 생각했다. 과신이었다. 소윤이는 절제력을 상실한 채 주는 건 물론이고, 주지 않는 것까지 찾아내서 먹겠다고 덤벼 들었다. 아직 어리구나, 소윤아.
"너네 나가서 영화 보고 와라. 아빠 회사에서 영화 티켓 줬다"
오늘은 정말 그럴 생각 없었는데, 장인어른이 회사에서 영화 티켓 두 장을 받았다며 건네셨다.
"여보. 영화 볼까?"
"그럴까?"
다른 날과는 다르게 소윤이가 살짝 붙잡았다.
"엄마, 아빠 가지 마"
물론 아주 잠깐이었고, 막상 나갈 때는 아무렇지 않게 손을 흔들었다. 시윤이도.
영화 말고 신선한 무언가를 하고 싶었다. 볼링, 포켓볼, VR 등이 물망에 올랐지만 아내도 나도 고단했다. 몸을 쓰고 싶지 않았다.
"영화나 보자"
"그러자"
영화 보기 전에 시간이 남아서 다이소 구경을 했다. 아내가 계산을 하려고 가방을 열었는데 아내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어. 이게 뭐지. 뭐가 샜나"
아내가 꺼낸 지갑에는 뭔가 액체스러운 게 묻어 있었다. 로션인가 생각하는 찰나에 아내가 다시 입을 열었다.
"아, 밀크티가 샜나"
맞다. 밀크티가 샜다. 어제 윌에 갔을 때 산 밀크티를 가방에 넣어 놨는데 그게 뚜껑이 열렸고 한 방울도 남기지 않고 다 쏟아졌다. 가방에 들어 있던 모든 내용물이 밀크티 범벅이 됐다. 내용물은 둘째치고 가방 자체가 완전히 망가져 버렸다. 아내가 화장실에 가서 최대한 닦아내긴 했는데, 과연 다시 사용이 가능할지 의문이었다. 아빠 생신에 애들을 선물로 드리고 온 벌을 받는 건가.
그렇다고 기분을 잡치거나 그러지는 않았다. 그냥 초연했다.
재밌게 영화를 보고 돌아갔다. 아내는 돌아가는 차 안에서 숨 쉬듯 하품을 해댔다. 하품은 하지 않았지만 나도 비슷한 피로를 느끼고 있었다.
'여보. 그래도 다행이다. 내일 아침에는 우리가 안 일어나도 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