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에 큰 거 두 탕

19.04.13(토)

by 어깨아빠

어제 아내에게 갑작스럽게 제안을 했다.


"내일 동물원이나 야구장 갈까?"

"갑자기?"

"어. 내일 날씨가 좋다고 해서. 어디라도 갈까 싶어서. 뭐 둘 다 갈까 싶기도 한데 그건 너무 힘들겠지?"


의논 끝에 야구장과 동물원, 모두 가기로 했다. 그것도 차 없이. 소윤이에게도 어제 미리 알려줬다.


남은 밥이 없어서 아침으로 프렌치토스트를 해줬다. 아주 작게 한 입 크기로 잘라서 해주니까 더 잘 먹었다.


"소윤아 맛있어?"

"네. 아빠는 요리사에여 요리사. 아빠는 고기도 잘 굽잖아여"


"시윤이도 맛있어?"

"네"

"얼마큼"

"매애니"


시윤이 말문 트이는 거 보는 재미로 산다. 요즘.


아침 먹고 나서는 정말 오랜만에 가정예배를 드렸다. 나름 정성을 들였는데 소윤이도 아주 태도가 좋았다. 시윤이는 일정 시점 이후로는 집중력을 상실했을뿐더러 오히려 방해자의 태도가 되기도 했지만, 소윤이는 찬양도 열심히 하고 말씀도 열심히 듣고 기도도 성의껏 하고. 꽤 긴 시간이었지만 나름 은혜가 넘쳤다.


예배를 드리고 나서는 본격적인 외출 준비를 시작했다. 아내는 소윤이, 시윤이 옷을 입히고 짐을 챙겼다. 난 점심으로 먹일 주먹밥을 만들고 과일도 씻었다. 준비하면서 내심 걱정스러웠다.


'과연 가능할까? 하루에 두 탕, 그것도 아주 큰 두 탕이'


동시에 마음을 싹싹 비웠다.


'그래. 어찌 됐건 무지하게 힘들 거야. 각오를 하자'


둘을 데리고 서울 한복판에 차 없이 가는 건, 새로운 시도였다. 즐거움과 기쁨을 잃지 않기 위해 다시 한번 각오를 다졌다.


'짜증 내지 말자. 힘든 건 당연한 거야. 야구도 중간에 나오면 되니까'


동물원에서 모든 동물을 꼼꼼하게 보는 것도, 야구를 9회까지 보는 것도 다 부질없는 일이다. 우리 가족끼리 즐겁자고 하는 일인데, 괜히 마음 뺏기지 말자고 여러 번 생각했다. (사실 야구는 꼭 9회까지 보고 싶었다. 야구 관람 자체가 내 욕망이 담긴 코스였으니까)


지하철 역까지는 차를 타고 갔다. 역 근처의 형님(아내 오빠)네 집에 주차를 했다. 시윤이는 유모차에서 잠들었고 소윤이는 쌩쌩했다. 유모차를 끌고 지하철을 타는 건, 그 자체로 고된 일이라는 걸 바로 실감했다. 엘리베이터를 이용하려면 몇 걸음이라도 돌아가거나 더 걸어야 했다.


짐도 많았다. 평소에는 차에 쌓아 두고 다니던 걸 직접 들고 다니려니 만만하지 않았다. 짐 때문에 유모차도 큰 걸 가지고 나왔다. 시윤이 태우고 다닐 때 힘이 덜 들기도 하고. 휴대용 유모차가 가볍긴 해도 어차피 엘리베이터를 타고 다니니 크게 상관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아니었다. 엘리베이터를 탈 수 없는, 계단으로만 이동해야 하는 구간(에스컬레이터는 있지만 유모차는 진입금지니까)도 존재했다. 계단이 높은 곳은 아내가 소윤이와 시윤이를 데리고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나는 유모차를 들고 계단을 올랐다. 계단이 낮은 곳은 시윤이를 태운 채로 올라갔다. 정상에 오르면 절로 숨이 차고 땀이 송골송골 맺히는, 어마어마한 일이었다. 하루 종일 몇 번이나 겪었다.


소윤이는 이렇게 오랫동안 지하철을 타는 건 처음인데 잘 있었다. 감사하고 죄송하게도 소윤이를 보면 대부분 자리를 양보해 주셨다. 지상에서 달릴 때는 창 밖 풍경도 구경하고 다른 사람 구경도 하면서 즐겁게 있었다. 시윤이는 중간에 깼는데 잠을 푹 못 잤는지 막 일어나서는 좀 칭얼댔다. 그래도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애초에 굳은 각오를 하고 마음을 비워서 그런가 아내랑 나도 재밌었다. 장장 한 시간 반의 긴 지하철 여정을 하는 동안 얼굴 붉힐 일이 한 번도 없었다. 오히려 내내 즐거웠다. (그렇다고 힘들지 않은 건 아니다. 애들과 함께 하면 즐겁고 우울하고를 떠나서 늘 힘들다)


토요일인 데다가 벚꽃도 절정이고, 내일은 비가 온다고 해서 그런지 동물원에 사람이 많았다. 우리처럼 애들과 함께 온 사람이 많았다. 아니, 거의 대부분이었다. 90%는 아이들 데리고 온 집, 9%는 커플. 1%는 뭐 다른 사람도 있었겠지.


우선 한쪽에 자리 잡고 앉아서(라고 하기에는 돗자리도 없어서 그냥 어디 걸쳐 앉았다) 주먹밥을 먹였다. 아내와 나도 작정하고 덤벼 들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양이라 일단 애들만 배불리 먹였다. 밥 먹고 나서는 소윤이와 사전에 합의한 솜사탕을 사러 갔다. 입구 쪽에 있었다. 그냥 들어올 때 사 올 걸, 머리가 나쁘면 손발이 고생한다. 아내와 나의 허기를 채울 핫도그도 두 개 샀다.


소윤이는 파란색 솜사탕을 골랐는데 먹으면 먹을수록 흉측한 몰골로 변했다. 손과 입 주변은 물론이고 치아와 혓바닥까지 시퍼렇게 물들었다. '내가 저런 걸 내 애한테 먹이고 있다니' 하는 생각과 함께 절로 얼굴이 찌푸려졌다. 소윤이는 잔뜩 신났다.


"아빠. 이거 보세여. 아하하하하"


솜사탕이 그렇게 맛있나. 시윤이는 누나가 든 솜사탕을 보고 슬쩍 손을 뻗었다.


"아니야, 시윤아. 그건 시윤이 못 먹어. 시윤이는 과자 줄 게"


의외로 쉽게 과자로 마음을 돌렸다. 솜사탕은 먹고 닦아주는 것도 일이다. 물티슈로 박박 닦아냈다. 아내와 나의 핫도그는 먹을 여유가 없었다. 본격적으로 동물원 관람을 시작했다. 소윤이는 사자와 늑대가 쫓아와서 자기를 물 것 같다며 무서워했다.(보기도 전에, 집에서부터) 우리 안에 갇혀 있는 데다가 아빠가 있으니 걱정하지 말라고(진짜 달려들면 먼저 찢기는 것 말고는 방도가 없겠지만) 안심시켜도 계속 비슷했다. 막상 손 잡고 끌고 들어가서 갇혀 있는 걸 보니 좀 안심이 됐는지 괜찮아졌다.


사실 동물원은 시윤이 때문에 오자고 했다. 왠지 시윤이가 엄청 흥분하면서 잘 볼 것 같았다. 예상은 빗나가지 않았다.


"무지? 무지?(뭐지)"


를 연발했다. 뿌듯했다. 시윤이만큼은 아니어도 소윤이도 나름 흥미를 가지고 관람했다. 문제가 있다면, 아내랑 내가 너무 힘들다는 거. 시윤이는 유모차에 앉혀서 움직였는데, 그 상태로는 동물을 제대로 못 보니 내가 안거나 목마를 태워서 보여줬다. 그걸 본 소윤이는 자기도 안아달라고 그러고.(소윤이도 키가 작아서 안 보이기도 했을 거다) 볼 때만 잠깐 안아주면 모르겠는데 안고 걷기도 해야 하고. 안았다가 내려놨다가 목마 태웠다가.


맹수관, 코끼리, 원숭이 등만 골라서 봤다. 애초에 바람 쐬고 스윽 둘러보려고 온 거였고, 야구장으로 가기 위한 과정일 뿐이었다.(나만 그랬나?) 다 보고 다시 나갈 때가 되어서야 핫도그를 먹을 수 있었다. 그마저도 애들한테 많이 빼앗겼다.


"자. 소윤아, 시윤아 이제 야구장에 가자. 다시 나가자"


라고 얘기했을 때 정말 지하철역까지 한 눈 팔지 않고, 쉬지 않고 부지런히 가면 좋겠지만 그럴 리 없다. 가다 옆 길로 새고, 왔던 길 되돌아 가고. 그래도 최대한 재촉하지 않고 애들의 속도에 맞춰줬다. 여전히 조심했다. 사소한 걸로 얼굴 붉히지 않으려고.


원래 야구장 가기 전에 애들 저녁으로 먹일만한 걸 좀 사려고 했는데 시간이 없어서 그냥 갔다. 지하철 안에서 애들한테 유니폼을 입히고, 아내와 나도 입었다. 이 얼마나 뿌듯한 순간이던가.


"여보. 괜찮을까. 끝까지 보고 나올 수 있을까?"

"글쎄. 안 되면 나와야지 뭐"


아내 말처럼 중간에 나올 각오를 하면서도, 내심 끝까지 볼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랐다. 순살 치킨과 만두, 떡볶이를 사서 야구장에 입장했다. 앉자마자 치킨을 시작으로 각종 먹거리를 끊임없이 제공했다. 다행히 소윤이, 시윤이 모두 잘 앉아 있었다. 소윤이는 중간쯤 되니 지겨운지 집에 가고 싶다고 하긴 했지만, 잘 꼬시고 응원에 동참시켰더니 금방 흥미를 되찾았다. 시윤이는 의외로 징징거리지 않았을 뿐 아니라, 굉장히 즐겁게 관람했다.


이 모든 과정의 가장 큰 공로자는 아내였다. 나는 야구 관람하느라 정신이 팔려 있을 때, 아내는 부지런히 움직였다. 각종 먹거리 꺼내서 먹이고 정리하고, 추워지면 옷 입히고. 애 둘을 데리고 갔으면서 대부분의 경기 내용이 머리에 남아 있을 정도로 집중할 수 있었던 건, 다 아내 덕이다. 나에게는 가족과 함께하는 야구 관람, 아내에게는 야구장에서 하는 육아.


9회 초까지 다 보고 나왔다. 믿기지 않았다. 정말 끝까지 다 보다니. 역시 소윤이, 시윤이에게는 야구인, 아니 엘지트윈스의 피가 흐르는구나.


모든 걸 끝내고 다시 돌아갈 생각을 하니 막막했다. 지하철에 타서 몇 정거장이나 가야 하나 세어 보는데, 아내와 나는 동시에 놀랐다.


"응? 스물 세 정거장?"

"진짜? 잘못 셌나?"


아니었다. 정말 스무 정거장이 넘는 거리였다. 소윤이랑 시윤이는 지하철에서 잠들었다. 시윤이는 유모차에서 소윤이는 의자에 앉아서. 아내도 연신 하품을 해댔고, 나도 마찬가지였다. 스무 개가 넘는 역은 생각보다 금방 지나갔고, 지하철 여정의 시작점이었던 원흥역에 도착했다.


원흥역에서 형님네까지는 어른 걸음으로 10분이 채 안 걸리는 거리였지만, 오늘은 사정이 달랐다. 난 소윤이를 안고, 아내는 시윤이가 탄 유모차를 밀어야 했다. 유모차야 뭐 괜찮은데 내가 문제였다. 20kg에 육박하는 소윤이를 안고 가려니 이게 보통 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잠들어서 함부로 자세를 바꾸지도 못하고, 오른팔의 통증이 커져 갔다. 아내가 자기가 시윤이 데리고 가서 차를 가지고 올 테니, 나는 기다리고 있으라고 할 때 말을 들었어야 했다. 오늘 하루 중 가장 고되고 힘든 시간이었다. 거기에 소윤이는 중간에 깼다.


집에 도착해서 아내가 먼저 부지런히 씻었다. 소윤이는 여전히 깬 상태였지만 상관없었다. 아내가 들어가서 잘 거니까.


상황에 따라 다르겠지만 지하철 타고 멀리 다니는 것도 못할 일은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아 참, 물론 아내가 명언을 남겼다.


"여보. 그래도 방심하면 안 돼. 항상 오늘 같지 않을 수도 있어"


맞다. 언제나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해야 하겠지.


그래도, 무엇보다 기쁜 건 드디어 네 명이 함께 야구장을 다녀왔다는 거다. 시윤아, 축하해. 트윈스인의 삶을 시작한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