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짐과 무너짐

19.04.17(수)

by 어깨아빠

내가 가장 먼저 알람을 듣고 아내를 깨웠다. 아내는 반응이 없었다. 오늘도 드럼을 쳐야 했는데, 일어난 시간이 이미 좀 늦었다. 오늘은 혼자 가야겠다고 마음먹고 방에서 나왔는데 아내가 곧장 따라 나왔다.


"왜 안 깨웠어?"

"깨웠는데? 반응이 없던데?"

"아, 그랬어? 난 여보 나가는 거 보고 깼어"

"그랬구나. 애들도 잘 자네"


하긴 그 시간에 잘 안 자면 그게 이상한 거지. 오늘은 소윤이, 시윤이 모두 유난히 정신을 못 차렸다. 새벽 시간이야 애고 어른이고 그러는 게 당연하지만 그제, 어제와 비교해 보면 오늘은 아예 눈도 못 뜰 정도로 잠에서 깨어나지 못했다. 교회 가는 차 안에서 서서히 의식을 회복했다.


주차장에 도착했을 때도 이미 늦은 시간이라 아내에게 주차를 맡기고 서둘러 본당으로 뛰어갔다. 예배가 시작되고 드럼을 치는데 아내와 아이들이 한참 동안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찬양이 다 끝나도록(보통은 찬양 1-2곡 정도 부를 때쯤 들어온다) 들어오지 않았다. 팔과 다리는 드럼을 치지만 머리는 복잡했다.


'무슨 일이 생겼나'

'무슨 일 생길 게 없는데'

'왜 안 오지'


다 함께 기도하는 시간이 끝날 즈음, 아내와 아이들이 등장했다. 소윤이는 나와 눈을 마주치고는 특유의 눈웃음과 손인사를 날렸다. 반주를 마치고 내려가서 물어보니 별 다른 일이 있던 건 아니었다.


앞선 이틀은 아내 무릎을 베고 누워도 잠들지는 않고 손가락만 쪽쪽 빨던 시윤이가 오늘은 깊게 잠들었다. 예배가 끝나고도, 밥을 다 먹을 때까지도 깨지 않았다. 소윤이는 자지도 않았고, 이상 행동(?)도 없었다. 목석처럼 가만히 있지는 않았어도 새벽 5시도 안 돼서 일어난 5살 치고는 제법 괜찮은 태도였다.


오늘은 내가 아내와 아이들을 집에 데려다주고 차를 가지고 출근하기로 했다. 예배와 식사를 마치고 집에 돌아왔다. 아내와 아이들은 바로 방으로 들어갔다. 난 잠시 소파에 앉아 숨 좀 고르려고 했는데, 앉아있다 보니 눕고 싶었다.


'잠깐 눈 좀 붙일까'


40분 정도 시간이 있었다. 막상 누웠더니 '40분을 달콤하게 자야만 한다'는 강박 때문인지 금방 잠들지 못했다. '아, 빨리 자야 되는데'라고 생각하며 애써 잠을 청하는데 갑자기 알람이 울렸다.


'응? 뭐지? 벌써 40분이 지났다고?'


그랬다. 분명히 잠들지 않았는데 자고 일어난 것처럼 40분이 삭제됐다. 허망하게 집을 나섰다. 아내에게는 11시가 조금 안 돼서 카톡이 왔다.


[나만 지금 일어남]


10여분 뒤에 소윤이도 깼다. 시윤이는 그로부터도 한 시간 정도를 더 잤다. 차라리 잘 된 일이었다. 어설프게 자고 일어나서 짜증 내다가 오후 늦게 자느니 몰아서 푹 자고 밤에도 일찍 자는 게 낫다.


아내가 요상한 패션의 옷을 직접 골라 입고 집에서 노는 소윤이와 시윤이 사진을 보내줬다. 그러고 나서 쭉 연락이 없었다. 퇴근해서 집에 도착했는데 아무도 없었다.


'505호에 갔나?'


아내에게 전화를 했지만 받지 않았다. 소파에 앉아 좀 쉬다가 다시 전화를 걸었다. 역시 받지 않았다. 밥솥에 쌀을 씻어 놨길래 불을 올렸다. 잠시 후 아내에게 전화가 왔다.


"어. 여보 어디야?"

"나 남옥 언니랑 리스토어 왔어. 여보는 집이야?"

"어"

"알았어. 얼른 갈 게"

"목소리가 왜 그래?"

"아니야. 이따 가서 얘기할 게"


아내의 목소리에는 약간의 떨림과 분노, 탄식 비슷한 것이 짙게 묻어 있었다. 심상치 않음을 감지했다. 잠시 후 아내와 아이들이 집에 돌아왔고, 예상대로 아내의 얼굴은 아직 흥분이 가시지 않은 듯 붉은기가 돌았다. 소윤이는 표정은 뭔가 상기되어 있는데 말과 행동은 아무렇지 않은 것처럼 하려고 했다.


"아빠. 이것 봐여. 나 오늘 청자켓 입었다여"


자주 겪은 상황이지만, 마주할 때마다 당황스럽다. 일단 소윤이와 대화를 시도했다. 소윤이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엄마가 왜 그러는지 차분히 물었더니 순한 양처럼 조곤조곤 대답했다. 자기가 뭘 잘못했는지도 진술(?)하고 인정했다. 내 느낌에 억지로 하는 건 아니었다. 본인도 심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기도하고, 엄마에게 용서를 구하는 일까지, 진정성이 느껴졌다.


아내에게 들어보니 하루 종일 말 안 들은 건 기본이고, 특히 오늘은 아내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부릅뜨고) 반항적인 모습을 보였단다. 아내는 이 지점에서 뚜껑이 열리고 말았다.


아내의 감정이야 어떻든, 소윤이는 자기가 진심을 다해 용서를 구했으니 그걸로 끝이었다. 소윤이는 이내 평소의 모습을 찾았다. 할 수 있는 한 최대한 많은 것을 하고 떠나려고 노력했다. 밥도 먹이고, 씻기기도 하고.


다행히 아내는 내가 나가기 전에 어느 정도 상한 마음을 추스른 듯했다.


"여보. 미안"

"뭐가?"

"집에 오면 기분이 좋아야 하는데 그러지 않으니까"

"뭔 소리야. 괜찮아"


"엄마. 아빠한테 왜 미안해여?"

"아빠가 퇴근해서 오시면 소윤이랑 엄마랑 기분이 좋아야 되는데 오늘 안 그랬으니까"


시윤이가 나중에 왜 자기 이야기는 없냐고 물을까 봐 적어 놓자면. 시윤아, 넌 엄마와 누나 사이에, 혹은 아빠와 누나 사이에 뭔가 심상치 않은 기류가 흐르면 참 처신을 잘했단다. 평소보다 과한 애교를 부린다거나, 아니면 평소에는 하지 말래도 기를 쓰고 하던 행동을 알아서 자제한다거나. 무슨 말이냐면, 처세술에 능하고 분위기 파악을 잘했다는 말이야. 오늘도 그랬어.


아마 내가 나가고 나면 아내와 아이들도 곧장 방으로 들어갈 정도의 공정(?)이 진행됐을 때, 집을 나섰다.


예전에는 수요 축구가 덤이었는데, 요즘은 그렇지가 않다. 솔직히 말하면 수요일에 축구 없이 지냈던 나날을 상상할 수 없다. 월요병과 화요병을 수요축구로 버티고 목요병과 금요병, 토요 전일제 육아의 스트레스를 주일 축구로 버틴다.


평소보다 한 30분 더 공을 찼다. 아내에게 카톡을 보냈더니 답장이 없었다. 잠이 들었겠거니 생각했는데 아내에게 카톡이 왔다.


[한나랑 통화 중이었음. 지금 잠시 끊김]


집에 돌아오니 아내는 소파에 앉아 있었다.


"여보. 나 한나랑 세 시간 통화했어"

"어? 세 시간?"

"어. 대박이지?"

"세 시간 동안 무슨 얘기 했어?"

"그냥 모든 얘기"

"대단하다"


그래도 아내와 아내의 친구가 나눈 대화는 매우 의미 있는 내용이었다. 그걸 가지고 아내랑도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소윤이와 시윤이에 관해서. 특히 소윤이.


아내와 나는 더 좋은 부모가 되어야 한다고 반성했다. 우리가 아무리 말해도 듣지 않고 변하지 않는 건, 듣는 것만큼 본 게 없으니까 그렇다는 결론을 내렸다. 또 소윤이의 안 좋은 모습을 인정하고, 그 모습마저도 사랑하는 연습을 해야 한다는 것. 너무 교과서적인 얘기지만, 아내와 나는 진지했다. 또 이게 정답이었다.


아내는 어제 너무 힘들어서, 미리 안 가겠다고 선포했던 금요일 새벽기도에도 가겠다며 마음을 고쳐 먹었다.


어제의 다짐이 내일의 현실과 마주할 때, 바닷가에 모래성처럼 파도 한 번이면 흔적 없이 무너진다는 걸 여러 번 경험했다. 원래 다짐과 무너짐은 세트니까. 그래도 자꾸 쌓다 보면 요령이 생겨서 버티는 횟수가 늘어나겠지.


나도 그러길 바란다. 오늘 쌓은 다짐의 유효기간이 조금이나마 길어지기를.


소윤아, 시윤아 늘 말하지만 엄마, 아빠는 너희를 사랑하고 있어. 좀 서툴 뿐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