붓을 든 여인

19.08.09(금)

by 어깨아빠

아내가 소윤이가 가위질 한 거라면서 종이 숫자 오린 사진을 보냈다. 가위질 잘하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제 경지에 다다른 듯했다. 나보다 더 꼼꼼하게 잘한다. 아내와 늘 얘기한다. 과연 소윤이의 가위질을 비롯해서 손을 야물차게 쓰는 능력을 어떻게 키워주면 좋을지. 결론을 명확히 내린 적은 없다. 소윤아, 넌 어렸을 때 손을 참 잘 썼어. 뭔가 세밀하고 섬세한 작업을 기똥차게 해내곤 했지. 부디 이 소질이 커서도 발휘되길.


아직 휴가 중이신 장모님과 장인어른이 낮에 집에 오셨다. 점심을 드시러 밖에 나갔는데 장모님이 갑자기 아프셔서 병원에 급히 다녀오고 가까운 분이 돌아가셨다는 소식도 전해지고. 아내는 한차례 폭풍이 휘몰아친 듯 정신없는 오후를 보냈다.


퇴근했더니 집이 매우 조용했다. 시윤이는 방에서 자고 있었고 소윤이는 거실에서 물감으로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아내는 그 앞에서 졸고 있었고.


"여보. 나 조금만 잘 게"

"그래. 얼른 들어가서 자"


고요한 집의 분위기 때문이었는지 소윤이의 말과 행동이 유난히 차분했다. 나한테 말을 할 때도 사근사근하고. 붓을 쥐고 있어서 그랬나. 아무튼 굉장히 조용하고 얌전하고 그런 느낌이었다. 매사에 이런 모습이면 참 좋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소윤이 앞에 앉아 나도 붓을 들고 그림을 그렸다. 초록 물감을 묻혀 잔디를 그리고, 오른 편에 갈색 물감으로 나무의 몸통을 그리는 순간 소윤이가 말했다.


"아빠. 엄마도 이거 그렸는데"


아마 아내도 비슷한 걸 그렸나 보다. 그림으로는 영 소질이 없는 엄마, 아빠의 한계다. 어쩜 생각하는 것도 똑같니. 비록 식상한 그림이었지만 오랜만에 물감으로 그림을 그리니 꽤 재밌었다. 그림을 제대로 배워서 내 머리에 있는 걸 그대로 구현해내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소윤이랑 둘이 앉아서 한참 그림을 그렸다. (결과물을 놓고 보면 그림을 그렸다는 건 너무 과한 표현이지만)


"승아 이모호. 지히금 엄마하가 자고호 있어서허 이따하 깨며헌 전화하라고호 할게요호"


아내에게 걸려온 전화도 잘 받았다. 한 1년만 지나면 큰 도움이 될 것만 같은 이 느낌은 뭐지.


교회에 가야 하니 너무 늦지 않게 아내를 깨웠다. 시윤이는 계속 잤다. 아무리 금요일이라지만 이토록 늦게(나의 퇴근 후에도)까지 오랫동안 자다니, 오늘 밤이 끝나긴 할까 싶었다. 반면에 소윤이는 시간이 갈수록 피곤해 하는 게 보였다.


어느덧 아내와 아이들도 금요철야예배에 가는 게 일상이 되었다. 처치홈스쿨 방학 중이라 소윤이의 낮잠이 사라졌고, 철야예배에 가는 게 쉽지 않은 일이지만 아내는 매주 체념과 결의 사이 어딘가에 뿌리를 둔 결정을 내리고 있다.


"가지 뭐"


아내는 점심이 늦었던 데다가 밥이 코로 들어가는지 입으로 들어가는지 분간이 안 될 정도의 급박한 점심시간을 보낸 터라 저녁 생각이 없었다. 내가 먹을 김밥 한 줄과 애들이 먹을 주먹밥만 샀다. 소윤이는 교회에 가는 길에 잠들었는데 그야말로 실신이었다. 교회가 아니라 집으로 향하고 있었다면 그대로 밤잠이었을 거다. 정말 깊이, 곤히 잠들었을 때 나오는 표정과 포즈를 하고 있었다.


교회에 도착해 카시트에서 내렸는데도 깨지 않았다. 아내가 로비에서 시윤이 밥 먹일 동안 내가 소윤이를 안고 앉아 있었다. 연습 시간이 되어서 소윤이를 어찌해야 하나 고민하는데 소윤이가 눈을 떴다.


"소윤아. 졸리지? 아빠는 이제 내려갈 게. 여보 갈 게. 화이팅"


아내는 로비에서 남은 주먹밥을 먹이고 시간을 좀 보내다 예배 시간에 맞춰 본당으로 내려와야 했다. 애들이 밥만 얌전히 먹으면 얼마나 좋겠냐마는 화장실 가고, 물 마시고, 여기저기 돌아다니고. 역시 만만찮은 시간이다.


예배 시작할 때쯤 소윤이가 환하게 웃으며 본당에 들어서더니 맨 앞자리(아내와 아이들이 주로 앉는 자리까지 뛰어왔다.


'잠이 좀 깼나 보네'


라고 생각하며 안도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소윤이는 예배 시작하고 얼마 되지 않아서 기력을 모두 소진하고 아내의 무릎에 머리를 대고 누웠다. 시윤이는 활력이 너무 넘쳐서 통제하기 힘들었고. 아주 남매가 양 극단에서 난리였다. 아내는 더 힘들었다. 둘 다 엄마 품만 찾았으니까. 시윤이는 한 번씩 내 무릎을 찾기도 했지만 10초를 넘지 않았다. 다들 아내에게만 질척거린 탓에 아내의 체력은 두 배로 빠르게 고갈되었다.


소윤이는 예배 시간 내내 잤다. 시윤이는 예배 시간 내내 부산스러웠고. 그래도 거의 두 시간 가까운 시간을 아무런 간식과 놀 거리 없이 앉아 있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다. 아직 세 살이지만 기특하다. 시윤이도 막판에는 힘들었는지 계속 질문을 했다.


"엄마. 에배 언제 끝나여엉?"

"아빠. 에배 왜 암 끝나여엉?"

"빠이(빨리) 지베 가고 지퍼어엉"


아내가 기도를 조금 더 하겠다며 시윤이랑 먼저 나가있으라고 했다.


"시윤아. 아빠랑 먼저 나갈까?"


그렇게 엄마 품을 찾더니 나가자는 소리에 뒤도 안 돌아보고 내 손을 잡았다. 잠시 후 아내가 소윤이를 메고 나타났다. 소윤이는 여전히 자고 있었다. 진짜 피곤했나 보다. 카시트에 옮겼을 때도 잠에 취해서 깨지 못했다. 집에 도착해서 눕혔더니 그제야 조금 정신을 차렸다. 깬 김에 화장실도 한 번 다녀오게 했다. 시윤이는 때를 모르고 여전히 해맑았다. 워낙 시간이 늦어서 막상 눕혔더니 시윤이도 금방 잤다.


아까 퇴근하고 냉동실을 열었는데 텅텅 비어 있었다. 장모님, 장인어른이 계신 틈을 이용해 냉동실을 싹 정리한 모양이었다. 정리 정도가 아니라 아무것도 없을 정도로 비워냈다.


애들을 재우고 각자 할 일을 하고 있는데 아내가 얘기했다.


"여보. 그런데 냉동실이 뭔가 고장 났나 봐. 자꾸 에러 코드가 떠"

"그래? 안 시원해?"

"어. 찾아보니까 팬이 고장 나거나 얼면 그렇다고 하네"

"그래? 아까 오래 열어놔서 그런가?"

"그런가? 직접 고친 사람들도 있던데"

"그래? 어떻게?"

"안에 케이스를 뜯으면 된다는데 한 번 볼래?"


설명은 친절히 되어 있었지만 막상 해보려고 하니 잘 안됐다. 이리저리 힘을 주고 용을 써 봐도 진척이 없었다. 괜한 짜증이 났다. 야밤에 이게 뭔 짓인가 싶어서. 나의 짜증을 감지한 아내가 왜 짜증을 내냐고 그럴 거면 그냥 A/S 기사 부르면 되지 않냐고 한마디를 보태자마자, 맞받아쳤다. 왜 이런 걸 의논도 하지 않고 혼자 해서 이 난리를 만드냐고. 말도 안 되는 소리에 열받은 아내는 화장실로 들어갔다. 분노의 빨래 소리가 들렸다. 나도 소파에 앉아 어그러진 감정을 그대로 내뿜었다. 과격한 말이나 행동을 한 건 아니고 그냥 그 기운을 막지 않았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어떤 가전기기든 수리의 시작은 재부팅이었다. 컴퓨터가 고장 나도, TV가 고장 나도 일단 껐다 켜는 게 가장 우선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냉장고 플러그를 뽑았다가 몇 분 뒤 다시 꽂았다. 에러 메시지는 사라지고 냉기도 시원하게 잘 나왔다.


빨래를 마치고 나온 아내가 냉장고를 열어 보더니 내게 말했다.


"어떻게 했어?"

"그냥 코드 뽑았다가 꽂았어"


냉동실을 빵빵하게 채우기 시작한 냉기만큼이나 차가운 기운이 아내와 나 사이에도 여전히 흘렀다. 아내는 먼저 들어갔고, 난 한참 더 있다가 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