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8.17(토)
아내는 어제의 공언대로 먼저 일어나 애들을 맡고 있었다. 눈치 없이 대장에서 신호를 보냈다. [나 다 찼다. 비워줘라] 어떻게든 미뤄 보려고 했지만 한계치에 도달했다. 어쩔 수 없이 방 문을 열고 나갔다.
"어. 아빠 일어나셨다"
"여보. 더 자지"
"아, 나 배 아파서"
일만 마치면 다시 들어갈 거라는 걸 암시하듯 한마디를 남긴 뒤 화장실에 들어갔다. 배에 찬 것들을 비워내면서 잠도 달아났다. 계획과는 다르게 소파에 앉았다.
"여보. 들어가서 더 자"
"아니야. 됐어"
아침 먹으면서 소윤이와 시윤이에게 얘기했다.
"소윤아, 시윤아. 우리 밥 먹고 예배드린 다음에 아빠랑 세차하러 갈까?"
"세차? 어디서여?"
"집 근처에 세차장에서"
"좋아여"
"소윤이가 가서 아빠 도와줘"
"아빠. 바닥 분수도 가도 되여?"
"그래. 바닥 분수도 하면 가자. 일단 세차부터 하고"
"왜 세차부터 해여?"
"음, 세차는 꼭 해야 하는 중요한 일이고 바닥 분수는 안 해도 되는 일이니까"
"아빠. 쪠짜(세차)? 나두 가치?"
"시윤이도 같이 가야지"
"와. 진난다아(신난다)"
예배를 드린 뒤 아이들과 함께 나왔다. 차로 3분 거리의 세장으로 갔다.
"자, 소윤이랑 시윤이는 여기 서 있어. 서서 아빠 하는 거 봐"
"우와. 아빠 이거 뭐에여?"
"이거 비누거품 나오는 거야. 일단 이걸로 이렇게 닦아야 돼"
"나중에 물 뿌리는 거에여?"
"어, 맞아. 봐봐 이제 물 뿌린다"
"으하하하하. 아빠 차가워여. 물 튀어여"
"아빠아아아. 짜가어여어엉"
세차할 때는 처음 데리고 온 거라 신기했는지 즐거워했다.(세차를 잘 안 했...)
"소윤아, 시윤아. 이제 차 안도 닦고 청소할 거야. 너네가 도와줘"
"알았어여. 아빠. 어디 닦아여?"
"소윤이는 거기 닦아. 시윤이는 여기 닦고"
둘에게 걸레를 하나씩 쥐여주면서 나름의 업무를 부여했다. 당연히 성취도는 기대하지 않았다. 소윤이는 주어진 바를 최선을 다해 완수하려고 노력했다.
"아빠. 봐여. 깨끗하져? 열심히 했져?"
"우와. 진짜 열심히 했나 보네. 많이 깨끗해졌는데? 어, 저기 저기. 저기 좀 더 해야겠다"
"알았어여"
시윤이는 한량이었다. 걸레는 어느새 내팽개치고 샐샐거리며 웃기만 했다.
"아빠아. 쩨짜 왜 해여어엉?"
"차가 더러우니까"
"왜 더러어여엉?"
"우리가 계속 밖에 있는 먼지나 흙들을 가지고 들어와서 그렇지"
입만 살아서 일은 안 하는 유형이다.
신속하게 마쳤다. 애들이랑 오래 하기도 힘들고. 지하 주차장에 차를 대놓고 킥보드를 꺼내서 단지 옆에 있는 바닥 분수에 가려고 했다. 시윤이의 킥보드가 펴지질 않았다.
"아빠. 왜여어엉?"
"아, 이게 안 펴지네"
"아빠. 왜 안 펴져여어엉?"
"그러게"
땀을 뻘뻘 흘리며 펴보려고 했는데 실패했다. 애들만 옆에 없었으면 성질이 났을 텐데(이미 내면은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보는 눈이 있으므로 잘 삭였다.
"아빠. 내 거 왜 안 대나"
시윤이는 요즘 '냐' 와 '나'의 중간쯤 되는 발음으로(거의 나 로 들린다) 어미를 맺는 경우가 많다. 이게 반 말이라고 하기도 그렇고 아니라고 하기도 그렇고. 어디서 배웠는지 모르겠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아빠. 이거 누구 차(car)나?"
"아빠. 이거 언제 먹나?"
"아빠. 내 꺼 어디 있나?"
글로만 보면 확연한 반말처럼 보이지만, 실제의 어조나 느낌은 또 안 그렇다. 아무튼 일반인(?)은 쓰지 않는 희한한 말투를 사용하곤 한다.
아무튼 시윤이는 펴지지 않는 자기 킥보드를 보며 걱정을 했다. 시윤이를 실망시키지 않으려고 갖은 애를 썼지만 나도 어쩔 수 없었다.
"시윤아. 이게 안 펴지네. 오늘은 일단 분수까지 걸어가자"
"아빠. 왜여어엉? 왜 안 대여어어엉?"
"그러게. 아빠도 잘 모르겠어. 분수 가서 다시 해 볼테니까 일단 그냥 가자? 알았지?"
"네, 아빠"
누나는 이미 킥보드 위에 올라탔기 때문에 자기도 타고 싶었을 텐데 잘 이해해줬다. 분수에는 아무도 없었다. 한두 명은 있을 법도 한데 정말 아무도 없었다. 너무 더워서 그랬나.
"소윤아, 시윤아. 이제 들어가서 놀아. 혹시 놀다가 추우면 참지 말고 말해. 알았지?"
얘네 노는 동안 킥보드를 펴기 위해 다시 노력했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그냥 포기하고 애들 사진이랑 동영상이나 열심히 찍었다. 한 20여 분 놀았을까, 소윤이가 먼저 말했다.
"아빠. 추워여. 나갈래여"
"그래, 알았어. 이제 가자"
"아빠아아. 더 놀고 싶어여어어엉"
"시윤아, 우리 들어가서 텐텐 먹을까? 텐텐?"
"뗀뗀?"
"어. 텐텐. 맛있었지?"
"아빠. 집에 가면 뗀뗀 주제여어엉"
시윤이를 구슬려서 집으로 돌아오려고 짐을 챙기는데 마침 분수가 딱 멈췄다.
"소윤아. 어차피 분수 쉬는 시간이었네"
"아빠 그러게여. 어차피 가야 됐겠네여?"
"맞아. 역시 소윤이가 대단한데?"
집에 돌아왔더니 아내는 거실에 쓰러져 자고 있다가 우리가 들어가서는 소리에 잠에서 깼다.
"어, 여보. 왔어? 바닥 분수도 갔다 온 거야?"
"어. 갔다 왔어"
"엄마. 내가 추워서 아빠한테 가자고 말했는데 따악 분수가 멈췄어여어"
"아, 그랬어?"
아내는 잠에서 헤어 나오지 못했다. 소윤이와 시윤이는 화장실로 데리고 들어가서 샤워를 시키고, 소윤이 머리 말리는 동안 텐텐을 하나씩 먹였다.
"시윤이는 텐텐 먹고 낮잠 한숨 자자? 알았지?"
"엄마랑?"
"그래. 엄마랑 들어가서 자"
머리를 다 말리고 잠에 취해 있는 아내를 깨웠다.
"여보. 시윤이랑 들어가서 좀 자"
"아, 그럴까? 알았어"
아내와 시윤이가 들어가고 소윤이랑 둘이 거실에 남았다.
"소윤아. 소윤이 한글이랑 영어 연습 좀 할까?"
"좋아여"
알파벳은 A부터 H까지(H까지만 배웠다) 대문자 열네 번, 소문자 열네 번씩. 한글은 ㄱ부터 ㅎ까지 각 글자당 일곱 번씩. ㄱ부터 ㅎ까지 두 음절 단어(가족, 나무, 다리...이런 식으로)는 단어별로 세 번씩 쓰기로 했다. 소윤이의 연습을 내가 해 본 적은 없어서 어느 정도 양인지 감이 안 잡혔다.
'이 정도면 너무 빨리 끝나나'
하는 생각을 했다. 신나서 시작한 소윤이는 얼마 안 가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후우"
그다음에는 오른손을 팍팍 털며 중얼거렸다.
"아우. 손 아파"
그 뒤에는 나한테 말을 걸었다.
"아빠. 그런데 아까 세차할 때 제가 걸레질 진짜 열심히 했져?"
"맞아. 소윤이 덕분에 큰 도움이 됐지"
"다음에도 같이 세차 가자여"
"그래, 그러자. 소윤아. 그런데 지금 그거 쓰고 있으니까 다른 말 하지 말고 조금 집중해서 써? 알았지?"
"네"
소윤이는 거의 1분에 한 번씩 손을 털거나, 찬양을 흥얼거리거나, 나에게 말을 걸거나, 자세를 삐뚤게 고쳐 앉거나 그랬다. 전혀 나무라지 않고 독려했다.
"소윤아, 힘들어도 끝까지 해 봐. 원래 쓰는 게 엄청 힘든 거야. 결과는 나중이고 먼저 성실하게 노력하면 그게 제일 좋은 거야"
"아빠. 근데 여기까지만 쓰고 쉬면 안 돼여?"
"힘들지? 그럼 영어까지만 쓰고 조금 쉬었다 하자"
"알았어여"
실제로 엄청 힘들거다. 어른도 뭔가를 계속 쓰면 손도 아프고 좀이 쑤시는데, 한 글자 한 글자 쓰려면 아직 많은 힘이 필요한 소윤이는 더 했겠지. 그래도 소윤이는 짜증도 한 번 안 내고 연필을 놓지도 않았다.
"어, 아빠. 11에 갔다여. 이제 쉬는 시간 끝났어여"
자기가 스스로 쉬는 시간의 종료를 알리고 자리에 앉기도 했고. 너무 금방 끝날까 걱정했던 소윤이의 쓰기 연습은 무려 1시간 30분이나 걸렸다. 아내와 시윤이가 자는 내내 한 거다.
"아빠. 드디어 다 썼어여"
"우와. 소윤이 진짜 대단하다. 이게 쉬운 일이 아닌데 끝까지 노력해서 다 했네. 진짜 짱이야 짱"
"아빠. 이것 봐봐여. 엄청 잘 썼져?"
"그러게. 대충 쓰지 않고 딱 선에 맞춰서 쓰려고 엄청 노력했네. 기특하다"
처음이라 내가 양 조절에 실패했음에도 불구하고 소윤이는 다 소화해냈다. 그것도 아주 즐겁고 흔쾌히. 기특한 녀석.
"소윤아. 이제 엄마랑 시윤이 깨울까?"
"네. 제가 엄마 깨울게여"
"소윤이가 엄마한테 자랑도 해. 얼마나 열심히 했는지"
소윤이는 자기가 쓴 걸 가지고 와서 보여주며 자랑했다.
점심 시간은 이미 훌쩍 지나버려서 밥을 챙겨 먹기에는 좀 애매했다.
"여보. 애들 밥은 어떻게 하지?"
"그러게. 지금 먹이기에는 너무 늦었지?"
"어. 그냥 미숫가루랑 과일 같은 거 먹을까?"
"그러자 그럼. 저녁을 좀 일찍 먹고"
과일은 복숭아뿐이었다. 미숫가루를 타고 복숭아를 깎아서 모여 앉았다. 다 먹고 나서 조금 놀다가 저녁을 먹으러 나갔다. 집에 먹을 게 아무것도 없어서 나갔다. 집 근처 중국 음식점에 가서 짜장면과 특밥, 탕수육을 시켰다. 아내가 두 개를 시킬지 세 개를 시킬지 고민하길래 세 개를 시키자고 했다.
"일단 내가 너무 배가 고파"
다행이었다. 오늘은 소윤이와 시윤이가 잘 먹는 날이었다. 시윤이는 다른 건 제쳐두고 탕수육만 집중 공략했고, 소윤이는 탕수육은 물론이고 짜장면도 꽤 먹었다.
"여보. 두 개 시켰으면 모자랐겠다"
"그러게"
"아빠. 밥 먹고 어디 갈 거에여?"
"어디 가긴. 집에 가지"
"에이. 아니잖아여"
이제 소윤이도 다 안다. 아내와 나의 동선을. 어디로 갈까 고민하다가 윌로 갔다.
"아빠. 편의점도 갈 거에여?"
"편의점? 그럴까? 오늘 소윤이랑 시윤이가 밥을 잘 먹었으니까"
소윤이와 시윤이를 데리고 가서 초코송이를 하나씩 사주고 우유도 하나 샀다. 시윤이에게 초코 과자류를 온전히 한 개를 허락하는 건 드문 일이다. 머리로는 몸에도, 이에도 좋을 거 하나 없다는 거 알겠는데, 왜 자꾸 마음이 약해지지.
소윤이는 초코렛 부분 먼저 잘라먹고 나머지 부분 따로 먹고 그랬는데(어떨 때는 서너 번에 나눠 먹기도 하고) 시윤이는 그런 거 없다. 그냥 우걱우걱. 당연히 시윤이 초코송이가 먼저 동났다. 눈치를 보던 시윤이가 소윤이에게 간절히 말했다.
"으나. 이거 따아악 한 개 머거 대?(먹어도 돼?)"
"그래. 먹어. 자 이만큼"
"소윤아. 안 줘도 돼. 시윤이는 자기 꺼 다 먹은 거니까. 굳이 안 줘도 돼"
"내가 주고 싶어서 주는 거에여. 괜찮아여"
장난으로 하나씩 뺏어 먹을 때도 시윤이는
"아빠. 먹지마여어엉. 아까어여어엉"
이러고. 소윤이는
"자여. 엄마 세 개. 아빠 세 개"
"아, 소윤아 장난이야. 소윤이 많이 먹어"
"아아. 괜찮아여. 얼른 먹어여"
이러고. 난 내가 오빠놈이라서 그렇게 살았는 줄 알았는데 시윤이를 보니 그게 아니었다. 그냥 남자놈이라 그런가 보다.
카페에 앉아 있는데 졸음이 몰려왔다. 꾸벅꾸벅 졸았다.
이렇게 평화롭고 즐거운 하루를 보냈건만 시윤이는 또 잘 때 난리였다. 사실 낮잠을 푹 잤으니 잠이 안 올만도 했다. 아무리 그런 걸 알고 있다 해도 재우는데 한 시간이 넘어가면 슬슬 열이 오르기 마련이다. 화장실에서 일을 보고 있는데 아내가 안방 문을 열고 나오며 시윤이에게 얘기하는 소리가 들렸다.
"시윤아. 엄마가 얘기했지. 이제 오늘은 혼자 자세여. 알았어여?"
"으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나가보니 시윤이는 거실로 따라 나와 오열하고 있었고 아내는 외면하고 있었다.
"시윤아. 이리 와 봐. 아빠한테 와서 얘기해 봐"
나하고는 아무런 감정의 소모가 없었던 탓인지 쪼르르 와서 안겼다. 울면서.
"시윤이 왜 울어?"
"엄마양 자고 시퍼여어엉"
"그런데 시윤이가 안 잤어?"
"네에"
"왜?"
"안 자고 시퍼서어엉"
"시윤아. 그래도 지금은 자는 시간이지?"
"네"
"그리고 엄마가 아까 들어가기 전에도 얘기했잖아. 계속 안 자면 안 재워주고 나온다고"
"으아아아앙. 그애도(그래도) 엄마양 자고 지퍼어어엉"
"시윤아. 울지 말고 아빠 말 들어 봐. 오늘은 엄마랑 못 자"
"으아아아앙. 왜여어어엉?"
"시윤이가 너무 오랫동안 잠을 안 자서 엄마가 지쳤어. 그래서 오늘은 시윤이 혼자 들어가야 돼. 알았어?"
"시더여어어어엉"
"싫어도 어쩔 수 없어. 오늘은 시윤이가 아무리 울어도 엄마가 같이 안 들어가. 대신에 시윤이 잠들면 엄마가 시윤이 옆에 누워서 잘 거야. 알았어?"
"엄마양 자고 지퍼여어어엉"
"어. 시윤이가 아무리 울어도 안 된다고 했지? 엄마는 시윤이 잠들면 들어가서 누울 거야. 알았어?"
"왜여어엉?"
"지금은 엄마가 너무 힘들어서. 이제 들어가서 누울 거야?"
"네"
"알았어. 아빠가 눕혀줄게. 이따가 엄마 시윤이 옆에 누우라고 하자?"
"아빠아. 이따 잠드먼(잠들면) 아빠가 누어여엉"
"아빠가 시윤이 옆에 누우라고?"
"네"
시윤이의 가장 큰 매력이다. 뜬금없이 아빠 찾는 매력.
시윤아, 니 누나는 그런 게 없었거든. 죽으나 사나 엄마였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