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8.23(금)
아내는 요즘 거의 항상 지쳐있다. 특히 전화 목소리가. 입덧이라는 게 단지 헛구역질이 나고 속이 울렁거리는데서 끝나지 않고(그것만으로도 충분히 힘들지만) 체력 저하도 동반하는 듯하다. 아내와 통화하면 묻는 것도 똑같고 돌아오는 답도 똑같다.
"여보. 좀 어때?"
"속이 안 좋아"
"많이 울렁거려?"
"어. 계속 비슷해"
오늘 오후에는 유독 더 지친 목소리였다. 같은 동에 사는 육아 동지들과 함께 점심 먹고, 한살림도 가고, 스타벅스에도 다녀왔다고 했다. 그러고 나서 집에 돌아오니 진이 다 빠져서 기운이 하나도 없다고 했다.
아내와 아이들은 오늘은 금요철야예배에 가지 않기로 했다. 아무래도 아내에게 너무 힘들 것 같았다. 나도 이런저런 일이 있어서 평소보다 1시간 정도 일찍 나가야 했고.
아내는 505호 사모님 집에 가서 저녁을 먹는다고 했다. 그나마 저녁이라도 수고를 좀 덜 수 있어서 다행이었지만, 저녁 먹고 나서 잠깐 스타필드에 다녀올 일이 있었다. 저녁 먹고, 스타필드 다녀와서 씻겨서 재우려면 너무 늦을 것 같았다. 뭐 하나라도 덜어주고 싶었다. 씻기는 것만 '나'로 대체할 수 있는 일이었다.
"여보. 그럼 내가 퇴근하자마자 애들을 씻길게"
"그럼 여보 너무 쉴 틈이 없잖아"
"괜찮아"
"그래주면 나는 엄청 고맙긴 하지"
갑자기 훅 맞는 게 아픈 거지, 이렇게 계속 준비하고 각오를 다지면 정말 괜찮기도 하다. 각오를 다질 일은 또 있었다.
"여보. 시윤이 방금 잠들었어"
"진짜? 이 시간에?"
"어. 거실에 뻗었어. 깨우려고 그래도 안 깨더라"
"오늘은 진짜 포기해야겠다. 아예 시도를 하지 마. 소윤이 잠들면 바로 데리고 나오든가 여보가 먼저 자든가 해"
"진짜 그래야겠다"
엄청 늦은 오후에 시윤이가 잠든 거다. 이럴 때는 아예 마음을 비우면 된다.
'오늘이 가기 전에만 자라'
요즘 또 시윤이가 아빠에게 점수 따는 시기인지, 잠이 덜 깬 탓에 누워서 손가락 빨다가 내가 들어온 걸 보고는 벌떡 일어나 먼저 와서 안기며 얘기했다.
"아빠. 찌꼬(씻고) 지퍼여엉"
"그래. 씻자 씻자"
"아빠양"
"알았어. 아빠랑"
"여보. 5분이라도 쉬어"
"아니야"
시간이 빠듯하기도 했지만 5분 쉬겠다고 엉덩이 붙였다가는 5분이 10분 되고, 10분이 30분이 될 게 뻔했다. 바로 시윤이를 씻겼다. 씻기고 나서 기저귀와 옷을 입힌 뒤 바로 소윤이를 호출했다.
"소윤아. 소윤이도 씻자"
날이 선선해졌다고는 해도 낮에는 여전히 덥기 때문에 애들, 특히 소윤이는 땀을 많이 흘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머리를 안 감은지 3일이나 되었다. 소윤이의 머리에서 야릇한 향이 풍겼다.
"아빠. 왜 이렇게 샴푸를 오래 해여?"
"아. 소윤이가 오랜만에 머리 감는 거라 꼼꼼하게 하려고"
내 속이 다 후련했다. 소윤이 머리까지 말려주고 드디어 나도 샤워를 했다. 그러고 나니 나갈 시간이 다 됐다. 뭐, 몸은 힘들지언정 마음은 단단한 각오 덕분에 무너뜨리지 않고 지켜냈다.
"여보. 너무 힘들겠다"
"괜찮아"
"소윤아, 시윤아. 아빠 갔다 올게. 하람이네 가서 밥 맛있게 먹고 재밌게 놀아"
"아빠도 조심해서 갔다 와여"
"아빠아. 가지 마여어어엉"
"아빠. 가야 돼. 내일 토요일이니까 아빠랑 많이 놀자?"
"나두 가치 가고 지퍼쪄여어엉"
"아, 그랬어. 다음에는 같이 가자?"
뭐지. 오늘은 시윤이가 아빠 마음 녹이기로 단단히 작정한 건가.
아내는 저녁 맛있게 먹고 소윤이는 하람이네 두고 시윤이만 데리고 스타필드에 다녀왔다. 집에 돌아와 애들을 눕힌 게 10시쯤이었다.
[소윤이도 지금 자?]
[응]
교회에서 카톡으로 상황을 파악했다. 예배를 마치고 집에 돌아가니 아내도 아이들 사이에서 자고 있었다. 조용히 방 문을 닫았다. 내 손에는 치킨이 들려 있었다. 고된 몸과 마음에 한 줄기 위로를 주기 위한 선물이랄까. 역시 각오했다.
'아내가 혹시 잠들었으면 혼자라도 먹으리'
잠들지 않았어도 어차피 같이 못 먹었을 거다. 아내는 빵, 치킨 이런 게 아예 생각 나지도 않는다고 했다. 열심히 치킨을 뜯고 있는데 아내가 깨서 나왔다.
"왜 나왔어. 계속 자지"
"할 일도 있고"
아내는 꺼억꺼억, 꾸엑꾸엑을 반복하며 소파에 있고(그렇다고 아내가 엄청 죽을 사람 같은 상태는 아니다. 다만 좀 많이 울렁거리고 속이 불편할 뿐이다. 뭐 한 입덧 정도로 치자면 중상 정도? 맞나, 여보?) 난 작은방에서 치킨을 먹었다. 원거리 대화를 나누면서. 나 너무 비양심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