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8.27(화)
가장 먼저, 매우 이른 시간에 일어나서 혼자 사부작 거리던 소윤이가 내 휴대폰의 알람 소리를 듣고는 거실에서 방으로 달려왔다.
"아빠"
"어. 소윤아"
"이제 일어날 거에여?"
"어. 회사 가야 돼. 소윤이 왜 이렇게 일찍 일어났어. 좀 더 자"
"안 졸려여"
소윤이는 출근 준비하는 나의 말 상대가 되어줬다.
"아빠"
"응?"
"엄마가 아침은 챙겨놨어여?"
"글쎄. 아, 여기 있네. 여기 담아 놓으셨네"
"커피는여?"
"커피? 커피는 그냥 안 타가려고"
"왜여?"
"시간이 없어서"
"이제 얼른 나가야 돼여?"
"응"
롬이가 생겨서 그런가. 왜 이렇게 다 큰 애 같지. 현관에서 신발을 신고 소윤이와 마지막 인사를 나누며 당부했다.
"소윤아. 엄마 깨우지 말아 줘. 알았지? 거실에서 혼자 놀거나 공부하고, 방에 들어갈 거면 조용히 누워 있고"
"알았어여"
오늘은 기대를 했는데 그저 기대에 그쳤다. 통근 버스에 탄 지 얼마 안 돼서 아내에게 전화가 왔다.
"어. 여보. 잘 가고 있어?"
"응. 지금 깼어?"
"한 30분쯤?"
"소윤이가 깨웠어?"
"어"
"시윤이는?"
"시윤이도 이제 깨서 나왔다"
다섯 살 꼬맹이한테 너무 절 있는 행동을 기대했군.
아침부터 집에 손님(처치홈스쿨 엄마 선생님들)이 오기로 했기 때문에 아내는 매우 바쁘게 집을 청소했다. 어제 어느 정도 해놨다고 해도 원래 청소라는 게 해도 해도 끝이 없기 마련이니. 소윤이와 시윤이는 잠시 505호 사모님네 맡겼다고 했다.
아내는 교사 회의를 끝내고 근처 중국 음식점에 밥을 먹으러 가면서 전화를 했다.
"끝났어?"
"어. 이제 밥 먹으러 가는 길이야"
"회의는 잘했어?"
"어. 잘했지"
"애들은?"
"애들도 괜찮았어. 한 번씩 싸우긴 했지만. 양호했어"
"다행이네"
"집이 완전 난장판이야. 장난 아니야. 이따 좀 치우고 가야 할 거 같아"
형님(아내의 오빠)네 부부가 오늘 1년간의 세계 일주를 마치고 귀국하는 날이다. 어제는 장모님 생신이셨고. 겸사겸사 오늘 처가댁에서 모이기로 했다.
"여보"
"응. 어디야?"
"난 집이야. 열심히 집을 치우고 있어"
"안 힘들어?"
"힘들어. 그래도 이대로 두고 갈 수가 없어서"
"대충 하지. 나중에 나랑 같이 하면 되니까"
"아니야. 도저히 그냥 볼 수가 없었어"
"몸 생각해야지"
"괜찮아. 이제 거의 다 했어. 난 그럼 여보 사무실로 바로 가야겠다"
"그래. 시윤이는 잤어?"
"아니"
"오면서 자겠네"
"그러겠지"
어느 정도인지는 몰라도 아무튼 여러 명의 아이가 왔다 간 후폭풍이 만만하지 않은 듯했다.
아내가 나를 데리러 사무실로 왔다. 소윤이와 시윤이는 정신을 잃고 자고 있었다. 시윤이 한 번, 소윤이 한 번 볼을 만졌는데 소윤이는 깼다. 아주 잠깐 짜증을 냈지만 금방 기운을 차렸다. 처가댁 식구를 만나기로 한 장소가 사무실 근처라 금방 도착했다. 소윤이랑 먼저 내려서 기다렸다. 아내와 시윤이는 차 안에 있었고. 소윤이랑 뭐 별다른 걸 한 건 아니고, 그냥 주차장에서 일상의 대화도 나누고 시답잖은 장난도 치고 그랬다. 이제 이런 재미도 있다. 다섯 살이 아닌 그냥 '조금 어린 인간'의 느낌을 풍길 때는 제법 합이 잘 맞는다.
시윤이도 깨웠다. 어차피 저녁을 먹어야 하니 미리 깨워서 조금이라도 잠 기운을 떨쳐내라고.
장인어른과 장모님, 형님네 부부도 금방 도착했다. 1년 만에 만나는 것치고는 뭔가 너무 익숙했다. IT 강국에 살아서 그런가. 1년이라는 시간이 느껴지지 않았다. 소윤이랑 시윤이는 약간 어색해 하는가 싶더니 바로 거리를 좁혔다. 시윤이는 밥 먹기 전까지는 잠 기운이 남았는지 내 곁을 떠나지 않더니 배를 채우고 나서는 원래의 모습을 찾았다. 삼촌과 숙모를 향해서도. 시윤이에게도 기억은 남아 있지 않을까. 그걸 표현하지 못할 뿐이고.
밥 먹고 카페에도 들렀다. 기분 좋게 초코 쿠키를 먹던 소윤이가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얘기했다.
"으, 강시윤 똥냄새"
장모님과 소윤이 외숙모는 아닌 것 같다고 했지만 난 알고 있었다. 시윤이가 쌌다는걸. 소윤이가 맞는다면 맞는 거다. 가장 정확한 감별사다. [똥 쌌는지 안 쌌는지 기저귀 들춰보지 않고 코로만 맞추기] 특급 능력 보유자다. 소윤이가 난다고 하면 싼 거다. 역시나 몇 분 후 장모님도 인지했다.
"시윤아. 가자"
시윤이는 오늘도 일단 징징대며 버티기를 시도했지만 잘 구슬려서 데리고 갔다.
"아빠. 왜 좀(손) 따까여엉?"
"시윤이 똥 닦았으니까. 냄새나잖아"
"나늠여? 왜 냄재(냄새) 안 나여어엉?"
"시윤이는 손 안 댔잖아. 아빠가 닦아줬잖아"
"왜 아빠가 따까떠여엉?"
"아직 시윤이가 못 닦으니까"
"누나늠?"
"누나도 아직 아빠가 닦아주지"
시윤아, 니가 기저귀 졸업해도 새로운 입학생이 들어올 예정이란다. 세탁기도 있고 식기세척기도 있는데 누가 [엉덩이 세척 전자동 기저귀] 이런 거 안 만드나. 만들기만 하면 떼 돈 벌 텐데.
카페에서 나와 잠깐 처가댁에도 들렀다. 어제가 장모님 생신이어서 케이크에 촛불 켜고 생일 축하 노래를 불렀다. 소윤이와 시윤이는 열정적인 춤과 함께 할머니의 생신을 축하했다. 소윤이는 생일 축하 편지도 썼다. 소윤이는 요즘 한글을 읽는다. 열심히 자음과 모음을 배우고, 조합하는 걸 연습하더니 어느샌가 거리의 간판을 읽어냈다. 대체로 느리지만 익숙하거나 받침 없는 쉬운 글자를 보면 아주 빠르게 읽어내기도 한다. 편지도 베껴 쓰지 않고 자기 생각을 직접 글로 옮길 날이 머지않았다. (오늘은 시간 관계상 아내가 써 준 걸 따라 썼다)
집에 돌아올 때는 형님네 부부도 같이 왔다. 카시트 한 개는 떼서 트렁크에 넣었다. 시윤이를 카시트에 앉히고 소윤이는 삼촌과 숙모 사이, 혹은 무릎 위에 앉아서 가게 했는데 시간이 좀 지나자 소윤이는 힘들어했다. 졸리기도 했고.
형님네 부부를 내려주고 우리도 금방 도착했다. 애들도 애들이지만 아내에게도 든든한 지원군이 다시 복귀한 셈이다.
"여보. 집 엄청 깨끗해. 부담 갖지 않아도 돼"
문을 열고 깜짝 놀랐다. [TV 동물 농장] 보면 길에서 주인 없이 떠돌다가 구조된 강아지가 가장 먼저 하는 일이 있다. 병원 가서 진료받고 검사받고, 샤워하고 털 깎고. 유기견이 털 깎고 환골탈태하여 등장하는 장면을 보는 느낌이었다.
'그래, 우리 집도 태초에는 이랬었지'
아내가 왜 굳이 집에 돌아가 악착같이 집을 '다시' 치우고 나왔는지 그제서야 알게 됐다. 열 명(물론 모두 활동이 가능한 건 아니지만)의 아이들이 순식간에 헤집어 놓은 게 너무 아까웠던 거다. 정말 너무너무 깨끗했다. 과장을 조금 보태자면 입주청소의 느낌이랄까.
"여보. 우리 집은 넓은 집이었어"
소윤이와 시윤이는 처가댁에서 샤워는 물론이고 양치까지 하고 왔다. 옷도 갈아입었고. 바로 자면 됐다.
나도 할 일이 없었다. 아무것도.
내일 애들이 눈을 뜸과 동시에 이 태초의 청결함은 사라지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