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8.31(토)
아침부터 바쁘게 움직였다. 롬이를 만나러 병원에 가야 했다. 예약은 10시 30분이었는데 요즘은 사람이 많아서 제시간에 가도 오래 기다린다는 후기를 많이 접했다. 밑져야 본전이라는 심정으로 9시(문 여는 시간)에 가 보기로 했다.
“소윤아. 오늘 드디어 롬이 만나러 가네?”
소윤이는 별다른 말 대신 특유의 미소를 지어 보였다. 시윤이는 마냥 신났다. 아침부터 어딘가를 나간다는 그 사실만으로도.
아침도 먹이지 못하고 서둘렀다. 거의 9시 정각에 도착했는데 사람이 꽤 많았다.
“여보. 우리도 다음에 더 일찍 와도 되겠다”
“그러니까”
아내가 기본 수속을 밟는 동안 소윤이, 시윤이랑 한적한 곳에 앉아서 아내가 싸온 고구마와 우유를 먹였다. 소윤이는 퍽퍽한 고구마가 아침에는 영 안 받는지 맛있게 먹지는 못했다. 그에 반해 시윤이는 매우 행복한 표정으로 쉬지 않고 고구마를 입에 넣었다. 기본 문진을 마치고 예약한 선생님의 진료실 앞에서 기다리려고 자리를 잡았는데 바로 아내의 이름이 불렸다.
“이가영님. 들어오세요”
맙소사. 진료 개시 첫 타자로 들어갔다. 이런 뜻밖의 행운이. 롬이를 만나고(자세한 이야기는 ‘롬이’ 일기에 따로) 무료 건강 검진도 받았다.(아내) 진료 자체는 금방 끝났는데 검진받고 고운맘 카드 발급하는 거 기다린다고 시간을 좀 보냈다.
아침 겸 점심을 어디서 먹을까 고민하다 벨라시타로 갔다. 지하 식당가에 다양하고 맛있어 보이는 게 많았다는 아내의 후기를 참고해서. 나는 순댓국, 애들은 돈까스+우동 정식을 시켰다. 아내는 여전히 속이 안 좋아서 하나를 따로 시키지는 않았다. 애들 돈까스를 같이 먹겠다고 했다.
주문한 음식이 나와 기도를 하고 즐겁게 식사를 시작했는데, 시윤이가 첫 술을 뜨기도 전에 땡깡을 피웠다. 힘들다, 안 먹겠다, 엄마가 먹여달라. 어떤 것도 진실은 아니었다. 그저 떼를 위한 떼를 이어가기 위한 구실에 불과했다. 최대한 앉은 자리에서 달래 보려 했지만 시윤이는 고집불통이었다. 어쩔 수 없이 화장실에 데리고 가서 최고 단계의 훈육을 실시했다.
‘밥 먹다 말고 땀을 삐질삐질 흘려가며 이게 뭐 하는 짓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훈육을 마치고 자리에 돌아왔는데 밥맛이 뚝 떨어졌다. 평정심을 잃고 훈육을 하지 않아서 다행이었지만, 대신 훈육을 하고 나니 평정심을 찾기 어려웠다. 밥 먹다가 이럴 때는 자주 그런다. 그래도 꾸역꾸역 밥을 먹었는데 이번에는 강소윤이 등장했다.
소윤이도 계속 주의를 받았다. 식사에 집중하지 않고 장난치고, 열심히 먹지 않는 태도를 바로 하라고 몇 번을 얘기했다. 대답은 넙죽넙죽 잘 하는데 행동은 똑같았다. 결국 소윤이에게도 최종 단계의 훈육을 실시했다. 그나마 남아 있던 밥맛마저 싹 달아났다. 오기로 다 먹었다.
“강소윤, 강시윤. 너네 이제 당분간 간식은 금지야. 오늘 할머니 집에 갔을 때도 저녁 먹기 전까지는 간식 못 먹는 거야. 저녁 먹고 나서도 몸에 안 좋은 간식은 못 먹어. 알았어?”
“왜여”
“니네가 밥을 감사하게 열심히 안 먹으니까. 그 습관 고칠 때까지는 엄마도 아빠도 간식 안 사 줘”
식사를 마치고 신림동(아내의 시댁)으로 갔다. 애들은 가는 길에 잠들었다. 소윤이는 내가 강력하게 재웠다.
“소윤아. 오늘은 낮잠 꼭 자”
“왜여?”
“어제 늦게 자고 오늘 일찍 일어났으니까. 가는 길에 차에서 자. 할머니 집에 도착할 때까지 안 자면 들어가서 잘 거야. 아빠가 들어가서 재울 거고, 몇 시간이 걸리든 낮잠 잘 때까지 기다릴 거야”
지나친 수면 부족으로 인한 건강상의 문제를 방지하기 위해 낮잠을 재워야 했다. 다만, 점심때의 짜증 나는 감정이 남아서 좀 강하고 차갑게 말하긴 했다. 덕분에 둘 다 차에서 재우는 성과도 거뒀지만.
소윤이는 거의 도착할 때쯤 깨서 나랑 먼저 들어갔다. 아내는 시윤이가 깰 때까지 차에서 기다리기로 했다. (내) 엄마는 결혼식에 가서 없었고, (내) 아빠만 계셨다. 소윤이는 들어가자마자 할머니의 간식 보관함과 비밀 장소(이제 비밀이 아니지만)를 뒤졌다.
“소윤아. 오늘은 안 되는 거 알지?”
곧바로 시무룩한 표정으로 행동을 멈춘 소윤이의 지원군이 등장했다.
“에이, 소윤아. 그래도 할아버지 집에 왔으니까 좀 먹어도 돼. 괜찮아”
“알았어. 소윤아. 그럼 사탕, 젤리, 초콜렛 같은 거 말고 몸에 좋은 것만 먹어”
(내) 아빠가 땅콩을 꺼내줬다. 시윤이도 깨서 아내와 함께 들어왔고, 바로 땅콩 취식에 합류했다. 소윤이는 땅콩을 먹고 나서 다른 간식도 탐하기 시작했다.
“소윤아. 그만. 지금도 많이 봐 준거야. 알지?”
다시 지원군이 등장했다. 결국 내가 졌다. 점심때의 엄포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큰 교훈을 얻었다. 할머니, 할아버지 집에 갈 때는 간식 금지령을 내려봐야 효력이 발생하지 않는다.
“소윤아, 시윤아. 오늘은 할머니 집에 와서 그런 거고 당분간 너네 간식 못 먹는 건 그대로야”
아내는 계속 누워 있었다. 자기도 했고. 나도 소파에 앉아서 꾸벅꾸벅 졸았다. 결혼식에 갔던 (내) 엄마를 마중 간다고 아빠가 소윤이와 시윤이를 데리고 나갔다. 애들이 나가자 잠이 싹 달아났다. (좀 졸았으니까 그랬겠지?) 집에 돌아온 소윤이와 시윤이는 쭈쭈바를 하나씩 들고 있었다.
'그래, 먹어라 먹어'
저녁 먹고 들어와서도 소윤이와 시윤이의 주전부리는 끊이지 않았다.
"아빠. 그런데 왜 계속 간식 먹어여?"
"소윤아, 시윤아. 너희 원래 간식 먹는 거 아니지? 그런데 할머니랑 할아버지가 허락하셨으니까 먹을 수 있는 거야. 할아버지, 할머니는 엄마, 아빠보다 더 어른이라 엄마, 아빠도 할아버지, 할머니 말을 듣는 거야. 알았어?"
아내가 아이들에게 일말의 죄책감(?)이라도 가지라는 투로 앞뒤 사정을 설명했다.
다른 때였으면 부모님 댁에 왔으니 당연히 밤 데이트를 즐겼겠지만 아내는 그럴만한 상태가 아니었다. 10시쯤에 잠깐 친구를 만나러 나갔다. 물론 그때도 소윤이와 시윤이는 안 자고 있었지만 (내) 엄마가 있으니 편한 마음으로 떠났다. 시윤이는 뜬금없이 나랑 함께 나가겠다며 매달렸지만 잘 설득해서 다시 할머니 품으로 돌려보냈다.
들어간 카페가 11시 마감이라 생각보다 일찍 친구와 헤어졌다. 소윤이와 시윤이는 막 잘 준비를 다 마친 상태였다. 아내는 여전히 입덧의 고난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었고. 재우는 것도 엄마에게 맡겼다.
"아빠도 누워여엉?"
"아니, 오늘은 할머니가 재워주실 거야"
어둠 속에서 홀로 휴대폰을 만지작 거리고 있는데 금방 엄마가 나왔다.
"벌써 자?"
"어. 다 자네. 너도 얼른 자"
"네"
둘이 되고 나서는 맡기고 나가는 건 물론이고 부모님 집에 가는 것도 가끔 눈치가 보였다. 눈치라기보다는 부모님의 피로도 및 상태가 어떤지를 더 살폈다고 해야 하나. 내년이면 셋이 된다고 생각하니 지금 열심히 맡겨야겠다는 생각이 잠깐 스쳤다.
너무 비양심적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