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피난처

19.09.04(수)

by 어깨아빠

"여보. 내일 어떻게 할 거야?"

"난 아무래도 쉬어야 할 거 같아"


"소윤아. 내일 엄마는 못 가신다는데 소윤이 그래도 아빠 따라갈 거야?"

"네"

"아빠 드럼 치러 가면 소윤이 혼자 앉아 있어야 되는데 괜찮겠어?"

"괜찮아여"

"그래. 알았어"


소윤이는 새벽에 일어나서 교회 가는 걸 무엇 때문에 좋아할까. 그냥 뭐가 됐든 안 자고 뭔가 하는 것 자체가 좋은가. 어쨌든 혼자 앉아 있는 게 처음 있는 일은 아니니 크게 걱정은 하지 않았다.


알람 소리에 눈을 떴는데 아내가 보이지 않았다. 문을 열고 거실에 나가 보니 아내가 먼저 일어나 있었다.


"여보? 뭐해?"

"아. 잠이 안 와서 일찍 일어났어"

"몇 시에?"

"네 시쯤에"

"진짜? 같이 가게?"

"어. 같이 가려고"


드럼 치려면 평소보다 조금 더 일찍 가야 하는데 깜빡하고 평소와 같은 시간에 알람을 맞춰놨다. 부지런히 애들을 깨우고 챙겨서 교회로 갔다. 아내에게 주차를 맡기고 먼저 내려서 교회로 들어갔다.


아내와 아이들이 들어와서 맨 앞자리에 앉는 게 보였다. 어제와는 다르게 소윤이와 시윤이 모두 활동력이 매우 떨어져 보였다. 어제도 얌전하긴 했지만 어제 흥이 차지했던 자리를 피로감이 대신한 듯했다.


반주를 마치고 아내와 아이들이 앉아 있는 곳으로 갔다. 시윤이가 날 반갑게 맞으며 나에게 안기겠다고 해서 시윤이를 내 무릎 위에 앉혔다. 잠깐 앉아 있다가 다시 아내의 품으로 돌아갔다.


소윤이와 시윤이 모두 아내의 허벅다리 위를 경쟁하듯 점령하고 있었다. 둘 다 많이 졸려 보였다. 소윤이는 조금 더 말을 잘 들으니까 "소윤이가 양보하고 아빠한테 와"라고 말할 수는 있었지만 그건 너무 명분 없는 양보와 배려의 강요고, 시윤이한테는 그렇게 얘기하면 분명히 싫다고 할 테고 강요하면 울어버릴 테니 일단 그대로 뒀다.


소윤이도 시윤이도 아내의 품에서 가만히 있는 게 아니고, 누웠다가 안겼다가 앉았다가를 반복했다. 이게 엄청 성가시고 은근히 힘들다. 아내의 수용력(?)이 한계에 다다른 것 같길래 소윤이와 시윤이 모두에게 얘기했다.


"둘 중에 한 명은 아빠한테 와"


당연히 둘 다 싫다며 거부했다. 소윤이에게는 미안했지만 아내의 숨통을 트이게 하는 게 먼저였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소윤에게 부탁(혹은 강요)했다.


"그럼 소윤이가 일어나서 똑바로 앉아"


고맙게도 소윤이는 한참을 바른 자세로 앉아 있었다.


어찌 됐든 큰 탈 없이 예배를 마치고 아침을 먹으러 식당으로 갔다. 오늘은 미역국이었다. 오늘도 둘 다 깨끗이 싹싹 비웠다.


"우와. 소윤아. 오늘은 아빠가 열심히 먹으라는 말 한 번도 안 했는데 소윤이가 스스로 열심히 잘 먹었네?"

"우와. 시윤이도 스스로 숟가락질해서 많이 먹었네?"


오늘도 집에 와서 잠깐 누웠다. 고작 30분 남짓한 시간이었지만 어제랑 다르게 깊이 잠들었다. 아내가 나를 안방에 격리시켜 준 덕분이었다.


출근해서 일하고 있는데 애들을 10시쯤 재웠다고 하면서 아내에게 전화가 왔다. 그러고 나서 1시쯤 영상통화가 왔다. 시윤이만 보였다.


"아빠. 지굼 이여나떠여"

"지금 일어났다고?"

"네"


"여보. 진짜야?"

"어. 대박이지"

"와. 엄청 오래 잤네"

"그러니까"

"소윤이는?"

"아직도 자"

"엄청 피곤했나 보다"


영상통화를 하고 있는데 소윤이도 깨서 나왔다. 이건 낮잠이라고 하기도 그렇고. 아무튼 밤에 엄청 일찍 자지는 않을 것 같았다. 하루 종일 비가 와서 어디 나가지도 못할 테고.(축구도 비가 오는 바람에 취소됐다) 퇴근하면 애들 데리고 어디라도 나갔다 오면서 아내 혼자 좀 쉴 시간을 줄까 싶었다. 스타필드를 가든지 아니면 그냥 놀이터에 데리고 나가서 비를 맞으며 놀게 하든지. 아내는 내가 너무 힘들지 않겠냐며 걱정했다. 어떻게 할지 고민하고 있는데 아내에게 카톡이 왔다.


[여보 오빠네랑 같이 스타필드 갈까?]

[그래]


귀국한지 일주일 됐는데 이미 삼촌, 숙모의 덕을 톡톡히 보고 있다. 퇴근하고 집에 가서 아내와 아이들을 태워서 스타필드로 갔다. 저녁으로 평양냉면을 먹었다. 애들은 만둣국이 있어서 시켜줬는데 아내의 표현을 빌리자면 두부 맛이 굉장히 많이 나는, 고기가 안 들어갔나 싶은 정도의 담백한 맛이었다. 소윤이도 시윤이도 하나 먹고는 더 이상 달라고 하지 않았다. 새벽에 교회에서 밥 먹을 때의 반만큼만 열심히 먹어도 참 좋을 텐데 둘 다 어찌나 뺀질뺀질거리던지.


밥 먹고 나니 할 게 없었다. 사실 스타필드는 늘 그렇다. 할 게 많아 보이지만 막상 없다. 혼잡함에 취해, 목적 없이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시간을 소비하는 곳이다. 그래도 오늘처럼 비가 내리는 날에는 애들 키우는 이들에게는 감사한 피난처다.


마트에 가서 장을 보고 카페에 갔다. 하는 일도 늘 비슷하다. 애들이 좀 얌전히 있어주면 수다도 떨고, 애들이 좀 비협조적이면 통제하고, 시윤이가 똥 싸면 가서 닦아주고, 삼촌과 숙모를 만난 탓에 잔뜩 흥이 올라 도를 지나치는 소윤이를 자제시키고. 아내와 둘이 데리고 가도 이건 마찬가지인데 거기에 조력자가 둘이나 붙으면 사실 아내와 나는 굉장히 편해진다. 애들도 엄마와 아빠하고만 있는 것보다는 나름 즐거울 거고.


오늘도 카페에 앉아서 '시윤이 똥 닦아주는 것만 졸업하면(기저귀 떼면) 더 편해지겠다'고 생각하다가 롬이가 떠올랐다. 아주 잠깐씩 '이제 좀 편해졌는데' 하는 한탄 비슷한 감정이 느껴질 때가 있다. 대신 그만큼 셋이 되면 뭐가 좋을지도 많이 생각한다. 의지를 가지고 일부러 생각할 때도 있지만, 대개는 소윤이와 시윤이가 노는 걸 보다 보면 자연스럽게 상상이 겹쳐진다. 혼란한 시기다. 원래 애들 키우는 게 낭만과 현실의 박 터지는 전투니까.


집에 돌아올 때쯤에는 모두 피곤했다. 아내도 애들도. 나도 피곤하긴 했지만 제일 쌩쌩했다. 애들을 씻기고 옷을 갈아입혔다. 습도가 높아서 둘 다 땀을 많이 흘린 터라 샤워를 해야 했지만 그 정도의 여력은 없었다. 다 준비하고 애들하고 방에 들어가서 아내를 기다리는데 소윤이가 얘기했다.


"아빠. 우리 오늘 즐거웠던 거 말하기 할까여?"

"그럴까?"

"저는 엄마랑 아빠랑 시윤이랑 삼촌이랑 숙모랑 만나서 놀았던 게 즐거웠고 같이 밥도 먹어서 즐거웠어여"

"아, 그랬어? 그럼 시윤이는?"


"나늠(나는). 엄마양 아빠양 누나양 땀똠(삼촌)이양 쭉모(숙모)양 재미떠떠여엉"

"아, 그랬어? 시윤이도 좋았어?"

"네에"

"왜?"

"그양(그냥)"


"아빠. 아빠는여?"

"아빠도 삼촌이랑 숙모랑 만나서 맛있는 거 먹고 소윤이, 시윤이가 즐겁게 노니까 감사하고 즐거웠지"

"아빠도 좋았어여?"

"그럼"


자기 전에 오늘 하루 감사했던 일 말하기 같은 거 하면 참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조만간 한 번 해봐야겠다.


"여보. 오늘은 여보도 집 치우지 말고 자"

"어. 안 그래도 오늘은 나도 못 치울 거 같아"


여보. 난 오늘 여보가 말 안 했어도 못 치우고 잤겠지만 여보가 미리 말해줘서 마음의 짐을 덜 수 있어서 감사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