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비를 넘지 못하면

19.09.05(목)

by 어깨아빠

어제는 아내가 미리 얘기했다.


"여보. 난 내일 아무래도 쉬어야 할 거 같아"

"알았어"


나도 소윤이에게 미리 얘기했다.


"소윤아. 내일은 엄마가 새벽 기도 못 가실 거 같대. 그러니까 소윤이도 내일은 그냥 집에서 쉬어. 대신 금요일, 토요일은 아빠가 드럼 안 치니까 엄마가 가시든 안 가시든 아빠랑 가자. 알았지?"

"네"


도둑고양이처럼 몰래 일어나 옷을 입고 나갈 준비를 하는데 아내가 깨서 나왔다.


"어? 안 간다며?"

"깼어"

"가려고?"

"응"


덕분에 소윤이와 시윤이도 3일 연속으로 새벽 기도에 출석했다. 애들도 사람인지라 날이 갈수록 피곤이 쌓이는 게 눈에 보인다. 첫날에는 일어나자마자 정신을 차리고는 가는 내내 종알대더니, 오늘은 고요했다. 눈빛은 힘아리가 하나도 없고.


오늘도 어제와 비슷했다. 둘이서 아내의 허벅다리와 옆구리를 하나씩 나눠서 붙어 있었다. 시윤이는 어제보다 더 졸음에 허덕였고 소윤이는 비슷했다. 오늘은 별말을 하지 않았다. 해봤자 별로 효용도 없는 거 같고.


오늘은 아내가 애들을 데리고 먼저 식당에 가고 내가 남아서 기도를 좀 더 했다. 오늘의 아침은 빵과 우유였다. 딸기잼을 듬뿍 바른 모닝빵 한 개, 사과 한 조각, 바나나 한 토막, 삶은 계란 한 개, 우유 한 컵. 이런 구성이었다. 평소에는 이게 쨈을 바른 건지 안 바른 건지 분간이 안 될 정도로 야박한(?) 빵만 먹다가, 오늘은 쨈이 넘쳐서 빵을 비집고 나올 정도로 가득 발라진 빵을 먹으니 꿀맛이었나 보다. 특히 시윤이는 너무나 맛있게, 행복하게 먹었다. 빵을 먹고 나더니 나머지는 별로 구미가 안 당기는지 먹지 않았다.


"아빠아. 이게 간직(간식) 이에여어?"

"이거? 간식 아니야. 오늘은 이게 아침이야"

"아니잖아여어어어"

"진짜야. 오늘은 아침으로 밥대신 이거 먹는 거야"

"시더여어엉. 밥 먹으꺼에여엉"

"시윤이 밥 먹고 싶어?"

"네"

"밥은 없고 집에 가서 떡 먹어"


아, 은근히 한식파라니까. 소윤이는 야물차게 다 먹었다.


아내와 아이들은 오전에 처치홈스쿨 기도 모임에 가야 해서 차를 내줬다. 난 교회에서 돌아오는 길에 원흥역에 내려서 통근버스를 타고 바로 출근했다. 뭐 어떤 면에서는 운전 안 하고 잘 수 있으니 나름 좋다.


아내하고는 한 두시쯤 통화를 했다. 기도 모임 마치고 점심도 먹고 들어왔다고 했다. 소윤이와 시윤이는 한숨도 안 잤고. 아내는 어찌해야 할지 고민했다. 내 퇴근 시간을 즈음해서 큰 고비(견딜 수 없는 피로로 인한 폭풍 짜증)가 찾아 오리라고 예상했다. 물론 그전에 재우면 되겠지만 그럼 바로 야근 예약이니 그 잠깐의 고비(잠깐이지만 거대한 태풍일지도 모르는)만 넘겨볼까 하는 유혹에 늘 시달린다. 여러 번의 성공 경험을 가지기도 했고.


오랜만에 버스를 타고 퇴근했다. 피로함을 물리치려고 게임을 하고 있는데 아내에게 전화가 왔다.


"여보"

"어. 여보"

"어디야?"

"난 지금 버스지. 여보는 뭐 했어?"

"잤어"

"진짜? 애들도?"

"응"

"지금은?"

"아직도 자"

"진짜? 대박이네"

"어쩔 수가 없었어. 나도 너무 졸리고 애들도 너무 졸려 하더라고"

"그럴만하지. 새벽부터 깼으니"


집에 가면서 밤 시간에 뭘 할지 고민했다.


"아빠아"


소윤이가 먼저 달려와서 안겼다. 소파에 앉아 통화하는 아내 옆에 붙어서 손가락을 빨고 있었다.


"아빠. 이거 포도 좀 드세여. 엄청 맛있어여"


소윤이가 내 입에 포도 한 알을 넣어줬다. 시윤이도 옆에 와서 한마디 덧붙였다.


"아빠아. 우이가(우리가) 남겨놔떠여어"

"아, 아빠 먹으라고 남겨 놨어?"

"네에"


시윤이는 맛이 없다면서 포도를 먹지 않았다. 진정성이 의심됐다.


"아빠. 우리 밥 먹고 놀이터에 가도 돼여?"

"오늘 비 와서 다 젖었을 거야"

"그럼 일단 나가서 젖었는지 안 젖었는지 보고 젖었으면 그냥 들어오고 안 젖었으면 놀고 그러면 어때여?"

"나가서 보고 말고 할 것도 없이 오늘은 젖었어. 비가 많이 와서"

"그런데 아까 해가 떴잖아여"

"해가 떴어도 너무 잠깐이라 안 말라"


냉장고 앞에 주저앉아 쉬고 있었다.


"여보. 우리 오늘 저녁은 시켜 먹든지 나가서 먹자"

"그래"

"여보 뭐 먹고 싶은 거 없어?"

"나? 난 아무거나 다 괜찮지. 여보 먹고 싶은 걸로 골라야지"

"아니야. 그래도 여보 먹고 싶은 걸로 골라 봐"


"소윤아. 놀이터 안 가는 대신 우리 오늘 나가서 저녁 먹자"

"아빠. 그냥 시켜 먹으면 되잖아여"

"시켜 먹으면 밖에 못 나가는 건데?"

"아. 맞다. 맞다. 아빠 나가서 먹자여 나가서"


차 안 타고 가도 되는 가까운 곳에서 먹으려고 했는데 마땅한 곳이 떠오르지 않았다. 음식이 맛있었던 행신동에 있는 식당이 원흥역에도 분점을 냈다길래 거기 가기로 했다. 나가는 길에 버리려고 음식물 쓰레기를 챙겼다. 비가 오니 우산도 챙겼다. 소윤이가 자기가 들고 가겠다며 우산을 가지고 가자 시윤이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며 얘기했다.


"아빠. 바께 비 오니까 우잔(우산) 가져가여엉"


음식을 시키려는데 고민이 됐다. 두 개를 시킬지 세 개를 시킬지. 오늘은 배도 고프고 자제할 생각이 없어서 세 개를 시켰다. 파스타와 볶음면, 볶음밥을 시켰는데 파스타가 생각보다 매워서 애들이 먹기에는 힘들었다. 소윤이가 먹기는 했는데 계속 먹다 보면 혀에 무시하기 힘든 매운 기운이 도는 정도였다. 소윤이와 시윤이는 볶음밥만 먹었다. 평소에 집에서 볶음밥 해주면 소윤이와 시윤이가 잘 먹는 딱 그런 느낌의 맛이었다. 기름 풍미 가득한. 둘 다 엄청 잘 먹었다.


밥 먹기 전에 소윤이가 대표로 기도를 했다.


"엄마가 밥 먹으면서 웩하지 않게 해주시고..."


소윤이의 기도 덕분이었을까. 먹는 동안에는 정말 증상이 없었다.


"아. 너무 졸리다아. 엄마 너무 졸려여"


소윤이는 피로를 호소했다. 한 번, 두 번이 아니라 계속 그러는 걸 봐서는 정말 피곤한 듯했다. 밝을 때 자는 잠은 아무리 많이 자도 어두울 때 잠깐 자는 잠에 못 미치는 건 애들도 마찬가지인가 보다. 그래도 오늘 저녁 식사는 그야말로 평화였다. 덕분에 나머지 파스타와 볶음면은 내가 거의 다 먹었다. 아내는 입덧 때문에 얼마 못 먹었고.


이제 소윤이는 글자 읽는 속도가 제법 빨라졌다. 가게 안 이곳저곳에 쓰인 글씨를 단어 단위로 읽곤 한다. 자기도 재밌나 보다. 아내와 내가 소윤이가 뭔가 읽을 때마다 격하게 반응을 해주면, 시윤이도 옆에서 보다가 입을 뗀다.


"나두 이글 주 이떠여(읽을 수 있어여)"

"진짜? 뭐라고 쓰여있어?"


그러면 누나가 읽었던 걸 어설프게 따라 하기도 하고 기억이 안 나면 아무 말이나 막 한다. 잠시 같은 세상을 살던 소윤이와 시윤이가 다시 다른 세상으로 분리되고 있다.


아내는 내일 반찬으로 짜장을 만들어야 한다고 했다. 나든 아내든 애들 재우고 나오면 너무 늦을 것 같았다. 소윤이와 시윤이를 차례대로 씻기고 나서 둘을 불러 얘기했다.


"소윤아. 시윤아. 이리 좀 와 봐"

"네, 아빠"

"엄마가 내일 처치홈스쿨 반찬을 만드셔야 한대. 그러니까 오늘은 소윤이랑 시윤이만 들어가서 자자"

"아빠는여?"

"아빠도 할 일이 있어. 그러니까 오늘은 소윤이랑 시윤이만 들어가서 자. 이따가 엄마가 소윤이랑 시윤이 옆에 누우신대. 알았지?"

"네"


소윤이는 바로 수긍했는데 시윤이는 또 떼 시동을 걸었다.


"아아아아. 엄마양 지굼 자꺼야아앙"

"시윤아. 떼부터 쓰지 말고. 아빠 말 들어 봐. 시윤아. 어차피 엄마는 오늘 너희를 못 재워줘. 엄마는 어차피 안 되고 자려면 아빠랑 자야 돼. 그러니까 오늘은 누나랑 같이 들어가서 자. 알았지? 대신 아빠가 책 한 권씩 읽어줄게"

"엄마늠 이따 누워여어엉?"

"어. 이따가 시윤이랑 누나 옆에"


책 한 권씩 읽고 방에 들어갔다.


"소윤아. 소윤이는 오늘 하루 동안 뭐가 제일 감사했어?"

"어 저는 처치홈스쿨에서 친구들 만나서 놀았던 게 재밌었고 엄마랑 아빠랑 시윤이랑 같이 저녁 먹은 게 감사했어여"

"그랬구나"


"아빠아. 나늠. 나늠. 친구드이양, 엄마양, 아빠양, 이모양, 누나양"

"어"

"아빠양 친구양 엄마양. 이모양. 누나양"

"어 어땠어?"

"암자했떠여"

"뭐라고?"

"암자"


"아빠. 감사하다는 말이에여"

"아. 그렇구나"


"아빠늠여?"

"아빠는 비가 오는데 회사 무사히 잘 다녀오고 저녁에 소윤이랑 시윤이랑 엄마랑 즐거운 시간 보내서 감사했어"


기도는 소윤이가 했다. 요즘은 아내의 입덧을 위한 기도를 꼭 한다. 기특한 큰 딸.


소윤이와 시윤이는 정말 둘이 잤다. 이제 한 번씩은 이렇게 재워도 되겠다. 재우는데 시간을 안 써서 엄청 좋긴 한데, 얼른 들어가서 만지고 싶고 부비고 싶은 이 마음은 뭐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