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9.09(월)
잠결에 방 안을 살펴보니 아내가 없었다. 방이 적당히 밝은 걸로 보아 이른 아침인 듯했고. 문을 열고 나갔더니 아내는 소파에 앉아 있었다.
"여보. 뭐해?"
"아, 잠이 안 와서"
그렇다. 아내는 요즘 이런 상태다. 쉬지만 쉬는 게 아니고 자지만 자는 게 아니고. 아내가 외로워 보여서 나도 거실에 누웠다.
"여보는 들어가서 더 자"
"싫어. 여보랑 있을래"
말처럼 같은 공간에 있기만 했다. 그것도 누워서 눈을 감고. 일어나서 출근 준비를 해도 이상하지 않을 시간이라, 잠들면 좀 더 자고 아니면 말고 하는 심정으로 누워 있었다.
시윤이가 먼저 깨서 나왔다. 약간 무의식의 상태로 아내와 나에게 차례로 안기며 뽀뽀를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소윤이도 등장했다. 소윤이는 나와의 포옹, 뽀뽀를 거부했다. 아직 정신을 차리는 중이니 건드리지 말라는 신호였다.
아내는 아침이었지만 상태가 영 좋지 않았다. 어제 점심 이후로는 제대로 뭘 못 먹었으니 기운이 날 리가 없었다.
"여보. 냉장고에 있는 불고기 좀 볶아줘"
"알았어"
불고기를 볶아서 애들 아침상을 차려줬다. 불고기를 볶는데 비보가 들려왔다.
"아빠. 시윤이 똥 쌌어여"
시윤이를 데리고 화장실에 들어갔다.
"아빠아. 또옹. 또옹. 휴지로 따까여어어"
나도 안다. 이놈아.
출근하는 날 애들 아침상을 차려준 건 정말 오랜만이다. 기억에만 근거하자면 처음이라고 말해도 무방하다. 아내도 밥과 고기를 조금 먹었다. 어제 아내가 토하는 걸 보니 이제 뭐가 됐든 조금이라도 먹는 게 중요하다는 걸 깨달았다. 롬이의 생명과 임산부의 건강을 치명적으로 위협하는 것만 아니라면, 몸에 도움이 덜 되더라도 안 먹는 것보다는 먹는 게 낫다고 결론지었다.(내 마음대로)
아내가 얼마 전에 다른 건 전혀 먹고 싶은 생각이 나지 않는데 딸기는 먹고 싶다는 말을 했었다. (지난번 롬이 보러 갔을 때 병원 TV에 강아지들이 딸기를 맛있게 먹는 걸 보고는 그런 욕구가 일었다고 했다.) 우리 동네와 일산의 큰 마트와 하나로클럽 로컬푸드 매장까지, 한 열댓 곳에 전화를 해봤지만 돌아오는 답은 똑같았다.
"아, 혹시 거기 딸기를 판매하는지 확인해 주실 수 있나요?"
"딸기요?"
"네. 생딸기요"
"딸기는 없습니다"
"아, 네"
짜잔 하고 딱 내밀고 싶었는데 아쉬웠다.
낮에는 장모님이 오셨다. 퇴근하는데 아내에게 전화가 왔다. 아이들과 장모님이 집 앞 카페에 있으니 거기로 가라고 했다. 시윤이는 막 잠에서 깼고, 소윤이는 엄청 기분이 좋았다. 쉴 새 없는 군것질과 무한 수용의 할머니의 영향이었다.
시윤이는 카페 오는 길에, 그러니까 한 다섯 시 넘어서 잠들었다가 40분 자고 깬 거라고 했다. 잠이 부족했는지 집에 와서도 한참 동안 우울한 표정과 몸짓을 내보냈다. 할머니나 소윤이가 웃겨주면 웃으려다가도 일부러 꾹 참고 그랬다. 난 아직 우울하니 관심을 끊지 말라는 것처럼.
아내의 얼굴은 헬쑥을 넘어 창백에 가까웠다. 그래도 오늘은 아침, 점심 모두 조금씩 먹었다고 했다. 한 번도 토하지 않았고. 저녁은 밖에서 먹기로 했는데 아내는 혼자 집에 남으려다가 마음을 바꿔 함께 나갔다. 소윤이의 강력한 요청으로 근처 중국 음식점으로 갔다.
장인어른도 오셔서 같이 드셨다. 소윤이와 시윤이 모두 짜장면을 거의 안 먹었다. 시윤이는 원래 짜장면을 그렇게 좋아하지 않고, 소윤이는 그때그때 다른데 오늘은 이럴 거라고 예상했다. 대신 시윤이는 언제나처럼 탕수육은 아주 잘 먹었다. 소윤이는 탕수육도 먹는 둥 마는 둥이었다.
"여보. 특밥이 매콤한 거였나?"
"응"
"그럼 여보는 송이버섯밥 먹을래?"
"나 특밥 먹고 싶은데"
"특밥 먹었다가 토하면 더 아프지 않을까. 매워서"
"그런가"
"아니다. 그냥 여보 먹고 싶은 거 먹어. 그래 특밥 먹어"
어쨌든 아내도 조금 먹긴 먹었다. 먹는 동안에는 구역질도 없었고.
장인어른, 장모님과는 저녁 먹고 바로 헤어졌다. 소윤이와 시윤이도 전혀 아쉽지 않다는 듯 인사를 건넸다. 형님네(아내 오빠)한테 전해줄 짐이 있어서 잠깐 들렀다. 주차장에서 만났다. 소윤이와 시윤이는 차에서 내리지 않고 카시트에 앉은 채로 창문을 통해서 아주 짧은 인사를 나눴다.
"소윤아, 시윤아 잘 가"
"삼촌, 숙모 내일모레글피에 보자여"
"땀똠(삼촌), 욱모(숙모) 이따가(나중에) 만나여어"
삼촌, 숙모하고도 마찬가지로 아쉬움 없이 이별. 참 많이 컸다. 이렇게 잠깐 보러 왔다가 더 있겠다고 울고불고 하는 소윤이 때문에 일부러 나중에 전해주고 그러던 시절도 있었는데.
"여보. 속은 괜찮아?"
"그냥 뭐. 비슷해"
토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감사했다. 어제 아내가 담즙을 올린 걸 보고 나서는 더 걱정이 됐다. 입덧이야 아내가 괴로울 뿐이지만 위액이나 담즙을 넘기는 건 실제로 육체의 손상까지 동반하니까.
아내는 틈틈이 아몬드 브리즈도 마시고 견과류도 먹었다고 했다. 어쨌든 삼시 세끼를 다 챙겨 먹기도 했고. 그래서인지 확실히 오늘 밤의 아내는 어제보다 훨씬 나아 보였다. 물론 어제보다 나을 뿐, 일반인(?) 평균에 비하면 한참 밑이지만.
"여보. 그래도 어제보다 훨씬 나은 것 같아"
"그래?"
"어. 일단 토를 안 하잖아. 어제는 너무 공복이라 그랬나 봐"
"그런가"
"어. 공복이 제일 안 좋은 거 같아. 토해도 제일 아프고. 그러니까 틈틈이 아몬드 브리즈 마셔"
"그래야지"
그나마 아몬드 브리즈(두유와 비슷한 아몬드 음료)가 반작용이 덜 하다고 했다. 다행이다. 뭐라도 하나 먹을 걸 찾아서. 내가 애들 재울 때부터 잠들기 전까지 거실에서 요양(?)하던 아내는 아이스크림도 먹고 과자도 몇 개 먹었다. 이렇게 써 놓으면 '먹을 건 다 먹었나 보네' 라고 훗날의 나와 내 자식들이 오해할까 봐 자세히 적자면, 여전히 파김치 같은 상태이나 뭐라도 먹어야 살겠기에 입에 넣었다는 걸 밝혀둔다. 아무튼 그걸 먹고 나서도 토하지 않았다. 심하게 울렁거린다고 하지도 않았고.
"여보. 어쩌면 내일부터 좋아질지도 몰라. 원래 정점을 찍으면 내려오잖아"
물론 입덧에 관한 나의 예언(이라고 쓰고 바람이라고 읽는다)이 맞은 적은 거의 없다.
최종 관문이라고 할 수 있는 양치도 무사히 넘겼다.(사람들은 이걸 '양치덧'이라고 한다는 걸 어제 처음 알았다.)
애들 재우러 들어가서 둘 사이에 누웠는데 소윤이와 시윤이가 먼저 내 손을 찾아 더듬었다. 그러더니 시윤이가 얘기했다.
"아빠아. 자장가"
"그래. 알았어. 자장 자장 우리 아가"
"아빠. 그거 말고 '하나님은 너를 만드신 분' 이거 불러주세여"
"알았어"
어둠 속이라 애들 얼굴이 보이지 않았지만 잡은 손에서 느껴지는 기운과 고요함 속에 들리는 숨소리가 진지하게 듣고 있음을 말해줬다. 소윤이와 시윤이는 어떤 하루를 보냈을까. 환자라고 해도 다름없는, 활동성이 0에 가까워진 엄마와 지내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아빠. 내일 회사 안 가여?"
"응. 아빠 내일부터 쉬어. 주일까지"
"아빠. 그럼 내일 나랑 하루 종일 놀자여. 놀이터도 가고. 맛있는 것도 먹고"
"소윤이랑 시윤이는 내일 처치홈스쿨 가야지"
"아빠는여?"
"아빠는 안 가지. 엄마 선생님들이랑 하잖아"
"아빠도 와여"
"에이. 아빠는 안 돼"
"아, 그래도여어어. 아빠도 와여어어. 네?"
"아빠가 데려다 주기만 할 게. 대신 처치홈스쿨 끝나면 아빠랑 놀자. 소윤이 내일 낮잠 자니까"
다 기특하다. 아내도, 소윤이도, 시윤이도. 그리고 롬이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