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를 위한 조기 퇴근인가

19.10.09(수)

by 어깨아빠

아내는 원래 교회에서 하는 선교 모임(혹은 기도회)에 가려고 했다. 점심 무렵에 가서 저녁까지 있어야 하는 일정이었다. 난 애들 데리고 어디를 가야 하나 고민했고.


"여보. 오늘 날씨는 엄청 좋다"

"그러게. 가지 말까?"

"어디? 교회?"

"응"

"왜?"

"그냥 배도 계속 아프고"


아내는 아침부터 화장실을 들락날락하기는 했다. 기분 나쁘게 배가 살살 아픈 모양이었다. 아침 먹고 나서는 소파에 누워 있다가 잠들었다.


"소윤아. 오늘 어디 가고 싶어?"

"어디 공원 같은데여"


날씨가 좋으니 어디 실내에 있는 건 아까웠고. 밖으로 나가고 싶긴 했다.


"소윤아. 그럼 우리 호수 공원에 갈까?"

"아, 좋아여"

"가서 자전거도 타고. 킥보드도 타고"

"좋아여. 좋아여"


소윤이와 시윤이가 소란스럽게 떠드는데도 아내는 깨지 않고 잠을 잤다. 아내는 30분 넘게 자고 일어났다.


"여보. 괜찮아?"

"응"

"호수 공원 갈까 하고"

"좋지"

"여보는 몸 안 좋으면 집에서 쉬어. 내가 애들 데리고 갔다 올게"

"아니야. 괜찮아"


꽤 일찍 집에서 나갔다. 한 12시쯤. 아내는 나가기 전에 나한테 휴대폰을 달라고 하더니 어딘가로 입금을 했다. 전혀 모르는 사람의 통장으로.


"왜? 뭐 샀어?"

"아, 좀 이따 말해줄게. 10분 뒤면 알게 돼"


남편의 본능으로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먹을 것'을 샀다는 걸 알아차렸다. 그때 아내의 휴대폰에 [달콤 도넛]이라는 단어가 얼핏 보였다. 반가웠다. 도넛이 반가운 게 아니라 아내의 입덧이 조금씩 사라지고 있다는 증거였다. 밥이고 빵이고 아무런 식욕이 없던 그녀에게 조금씩 먹을 것에 대한 욕망이 생긴다는 건 점점 정상인으로 돌아오고 있다는 거였다.


근처 아파트 단지 입구에 가니 도넛 상자를 가득 싣고 있는 탑차가 보였다. 아내가 내려서 뭐라고 얘기하니(아마 입금자 이름을 얘기했겠지) 도넛 상자 하나를 내어주셨다.


"여보. 입덧이 없어지고 있나 봐"

"그러게. 이거 엄청 가성비가 좋대"

"이건 또 어디서 알았대?"

"그냥. 다 파악하고 있는 거지"


머지않았다. 치킨 한 마리 무료 쿠폰을 쓸 날이.


"아빠. 호수 공원에 가서 너무 좋아여"

"그래? 재밌게 놀고 오자"


사실 별다른 구상은 없었다. 그냥 돗자리 펴고 앉아서 간식 먹고, 자전거 타고, 킥보드 타고, 공놀이하고. 거기서 엄청난 재미를 느끼는 게 무리일지 모르지만 엄마, 아빠와 함께 좋은 날씨를 누리는 것 그 자체가 행복이라는 걸 깨달았으면 좋겠다. 자극이 없어도 만족하는 인간이 되길 바라고 있다.


'가면서 시윤이는 한숨 잤으면 좋겠다'라고 생각하면서 시윤이를 슬쩍슬쩍 봤는데 안 자고 있었다. 손을 빨고 있었는데도 일부러 모른 척했다. 그때 안 자면 돌아오는 길에 잘 거고, 그럼 아내는 또 긴 밤을 보내게 되니까. (난 축구하러 갈 예정이었고.)


"어, 여보. 시윤이 잔다"


거의 다 도착했을 때 아내가 말했다.


"잘 됐네. 지금 자야 딱 좋지"

"그럼 어떻게 하지? 가서 돗자리에 눕힐까?"

"그럴까?"

"아니면 내가 시윤이랑 차에 좀 더 있다가 갈까?"

"그래. 나랑 소윤이랑 먼저 가 있을 게"


소윤이랑 먼저 가서 자리를 잡았다. 돗자리를 펴고 앉아서 도넛 상자를 열었다.


"소윤아. 뭐 먹을래?"

"아빠. 이거여"

"그래. 그럼 반 잘라서 아빠랑 나눠 먹자"


소윤이는 엄청 잘 먹었다. 아주 맛있게. 앉은 자리에서 두 개를 먹어치웠다.


"소윤아. 이제 엄마랑 시윤이 오면 같이 먹자"

"그러자여"


소윤이는 자전거와 킥보드를 번갈아 타며 놀았다. 한 30분 후에 아내랑 시윤이도 왔다. 시윤이도 앉자마자 도넛을 먹었다. 얘도 잘 먹었다.


"엄마. 이거 이거 크임(크림) 마지따아(맛있다)"


거기 나온 사람들은 대체로 이런 걸 하고 있었다.


1. 자전거, 킥보드를 가지고 와서 타거나

2. 연을 날리거나

3. 비눗방울을 하거나

4. 자전거를 빌려서 타거나


소윤이는 연을 날리고 싶어 했다. 비눗방울도 하고 싶어 했다. 자전거도 빌려서 타고 싶어 했다. (어른 자전거를 빌려서 그 뒤에 왜건을 달고 거기 앉는) 연은 예전부터 하고 싶다고 했는데 그런 데서 파는 건 너무 비싸고 아까워서 계속 안 사줬다. 비눗방울은 집에 많다는 핑계로.(챙겨 나온 적이 별로 없다.) 자전거는 저번에 호수 공원에 왔을 때 빌려서 탔는데 소윤이가 엄청 재밌어했다.


"소윤아. 그럼 연이랑 비눗방울, 자전거 중에 딱 하나만 골라 봐"

"어, 그럼 비눗방울?"

"비눗방울? 그런데 비눗방울은 금방 끝날 텐데"

"그럼 연?"

"연? 그런데 연은 아 시윤이 때문에. 너무 돈이 아깝기도 하고"

"그럼 자전거여"

"자전거? 자전거는 소윤이 자전거 있는데 또 빌리면 좀 그렇지 않을까?"

"아빠. 세 개 다 안 된다고 할 거면 왜 말했어여"


그래. 그건 니 말이 맞네. 얘기하다 보니 셋 다 별로라서 그랬다. 결국 아무것도 안 했다. 그런 거 안 하고도 재밌게 놀기는 했다. 특별히 한 것도 없는 것 같은데 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저녁은 집에 가서 먹기로 했다. 아내가 속이 계속 안 좋은 게 요즘 너무 자극적인 걸 자주 먹어서 그런 것 같다고 하길래, 들어가는 길에 죽을 사기로 했다.


너무너무 졸렸다. 출발한지 얼마 안 돼서 운전대를 아내에게 넘겼다. 조수석에 앉자마자 그대로 잠들었다. 갑자기 아내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소윤아. 안 돼. 자면 안 돼"


나도 화들짝 잠에서 깼다. 서둘러 소윤이를 잠의 늪에서 구해냈다. 소윤이를 구한 건지, 아내와 나를 구한 건지. 아무튼 소윤이를 다급하게 깨우고 난 다시 쏟아지는 잠을 이기지 못해 또 잤다.


"여보. 다 왔어. 가서 죽 좀 찾아줘"

"어. 어"


잠이 덜 깬 바람에 죽 집 옆에 있는 갈비집에 들어가서 전화주문한 거 찾으러 왔다고 얘기했다.


"여보오오옥"


아내의 외침에 뒤를 돌아보면서 깨달았다. 다시 죽 가게에 가서 주문한 죽을 찾았다. 소윤이한테 구슬 아이스크림도 사주기로 약속했는데 하필 오늘 마트 휴무일이었다. 집 앞 편의점에 가봤지만 없었고, 대신 쌍쌍바를 샀다.


집에 가서 저녁 먹고 나서 쌍쌍바를 주려고 쌍쌍바 하나를 꺼내 반을 쪼개려고 하니 소윤이가 얘기했다.


"아빠. 하나씩 줘야지여"

"응?"

"하나씩 먹기로 했는데 왜 나눠서 줘여?"

"하나는 너무 많아. 이렇게 나눠 먹으면 되지"

"아아, 싫어여어"


뭐 사실 소윤이 말대로 했어도 되는데 소윤이가 짜증을 섞어 말하는 바람에 그렇게 하지 못했다. 그대로 반으로 잘랐더니 소윤이가 막 울었다. 짜증 내면서. 소윤이의 그런 태도에 나의 훈육이 이어졌는데, 약간 목소리가 높긴 했다. 소윤이는 눈물의 쌍쌍바 반쪽을 먹었다. 세상에서 가장 우울한 표정으로 쌍쌍바를 먹었다.


소윤이는 한동안 우울한 기분을 떨쳐내지 못하다가 씻을 때쯤 돼서 나에게 먼저 얘기를 했다.


"아빠. 아빠가 쌍쌍바를 반으로 잘라서 속상했는데 아빠가 또 무섭게 얘기하니까 더 속상했어여"

"그래. 그런데 소윤아. 소윤이가 아무리 속상했어도 아빠한테 짜증 내고 소리 지르는 건 잘못된 행동이잖아. 그래서 아빠가 얘기한 거야. 알았어? 다 먹고 싶다고 얘기하는 거야 언제든 그럴 수 있지만"


다 씻었을 때쯤에는 다시 원래 기분이 돌아왔다.


오늘은 7시까지 축구장에 가야 했다.(평소에는 7시 30분) 모든 준비(애들 취침 준비)를 6시쯤 마쳤다.


"여보. 오늘은 6시 30분에 들어가"

"가능할까?"

"뭐 소윤이는 바로 잘 거 같고. 시윤이도 금방 자겠지"


아내와 아이들은 6시 30분쯤 방에 들어갔다. 나의 축구 때문에 서두른 감이 없지는 않지만 잘만 진행되면 아내에게도 이른 자유가 주어지니 부디 빠른 퇴근을 바라며 축구장으로 갔다.


축구를 마치고 아파트 정문을 들어오며 우리 집을 올려다봤는데 거실 불이 켜져 있었다.


"여보"

"어. 지금 끝났어?"

"어. 집에 왔어. 여보는 뭐해?"

"난 동백꽃 필 무렵 봐"

"바로 나왔어?"

"시윤이는 조금 걸렸어. 한 8시쯤 나왔나?"

"꽤 걸렸네?"

"어"

"뭐 필요한 거 없어?"

"그냥 뭐. 주전부리?"


아내는 근래에 보기 드물게 편안한 모습으로 소파에서 드라마를 보고 있었다. 내가 사다 준 과자를 조금의 거리낌도 아주 맛있게 먹었다. 아내의 입덧이 하향세에 접어든 게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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