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 좀 쉬어여

19.10.15(화)

by 어깨아빠

일어나면서 아내를 깨웠다. 현관 앞에는 아내가 자기 전에 시켜 놓은 반찬거리들이 배송되어 있었다. 아내는 송이버섯전을 만들어야 했다. 매일이 전쟁이지만 처치홈스쿨 하는 날, 특히 맡은 게 있는 날, 오늘처럼 여러 개가 겹쳐 있는 날은 세계 대전이 따로 없을 거다. 부디 평화로운 아침을 보내길 바라며 출근했다.


오늘은 퇴근할 시간이 다 되었는데도 연락이 없었다. 대화역에 도착해 지하철을 타며 아내에게 전화를 했다.


"여보"

"응. 어디야"

"우리는 지금 집에 가는 중"

"나도 지금 대화역에서 탔어"

"알았어. 여보 오늘은 버스 타고 와"

"알았어"


삼송역에서 내려 버스를 막 탔을 때 아내에게 카톡이 왔다.


[여보. 우린 잠깐 놀이터. 아까 그네 못 탔다고 너무 타고 싶어 해서]

[난 버스 탐. 놀이터로 갈게]


소윤이와 시윤이는 이미 어두워진 놀이터에서 그네를 타고 있었다. 하람이(505호 사모님 딸)도 같이 있었다. 소윤이는 신나게 그네를 탔는데 시윤이는 뭔가 부자연스러웠다.


"소윤아. 시윤이 왜 그래?"

"아빠. 시윤이 똥 싸서 그네를 못 타여"


"시윤이 똥 쌌어?"

"네"

"그렇구나. 조금 이따 집에 가서 닦자"


이제 시윤이도 안다. 똥을 쌌을 때 엉덩이를 뭉개면 어떻게 되는지. 그 느낌도 싫은가 보다. 막 돌아다닐 때는 괜찮았는데 뭔가 엉덩이를 써야 할 때는 주저했다. 놀이터에 가자마자 소윤이 뒤에 서서 그네를 밀어주려고 했더니 소윤이가 말했다.


"아빠. 하루 종일 일하고 왔는데 저기 가서 좀 쉬어여"

"어? 괜찮아"

"아니에여. 얼른 가서 좀 앉아 있어여"

"괜찮다니까"


"아빠아. 좀 지어여(쉬어여). 하유 종 이하고 왔쯔니까 지어여"

"괜찮아. 시윤아"


소윤이의 매력이다. (시윤이는 누나가 하는 말 따라 하는 수준이고.) 기르고 먹이는 나나 아내에게만 허락된 매력. 시윤이가 아무리 날고 기어도 넘보지 못하는 첫 자녀의 위상이 이런 거다. (막상 쉬려고 앉으면 바로 불렀을지도 모르지만.)


아내가 들어가자고 하길래 시윤이에게 얘기했더니 마지막으로 미끄럼틀을 타겠다고 했다. 미끄럼틀 타겠다고 올라간 시윤이가 날 바라보며 얘기했다.


"아빠. 어떻게 타여어?"

"시윤이 엉덩이에 똥 있어서 못 타겠어?"

"네"

"그럼 엎드려서 타"


그토록 열심히 엉덩이를 지켜내던 시윤이는 집에 가서 양말을 벗다가 그만 주저앉고 말았다.


"으이이이잉. 앉았떠영"

"괜찮아. 아빠가 바로 씻겨줄게"


시윤이와 소윤이를 차례대로 씻기고 밥을 먹였다. 아침, 점심, 저녁 다 비슷한 반찬이라 좀 지겨워서 그랬는지 둘 다 엄청 맛있게 먹지는 않았다.


"감사히, 열심히 먹어요"


그래도 감사하게 먹어야 한다. 세 끼 굶지 않고 먹는 건 정말 감사한 일이니까.


아내가 씻는 동안 책도 읽어주고 숨바꼭질도 했다. 만사가 귀찮은 시간이었지만 아이들과의 시간은 '양보다 질'이라는 진리를 떠올리며 진심을 다해 놀았다. 그래 봐야 한 10분이지만 10분으로도 얼마든지 '좋은' 아빠가 될 수 있다.


아내가 애들을 재우러 들어가고 난 오랜만에 헬스장에 갔다. 한 시간 정도 운동하고 왔는데 아내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오늘도 님아 그 강을 건넜구만'


아내가 건너고 나 홀로 남은 이쪽 편에는 설거지가 쌓여 있었다. 어제 미룬 것도 있고 아침에 처치홈스쿨 반찬 만드느라 추가된 것도 있고 저녁 먹고 난 것도 있고. 만만치 않은 양이었다. 설거지를 시작하면 음식물 쓰레기도 모아야 하고, 재활용 쓰레기도 모아야 하고, 주방도 정리해야 하고. 한 시간이 넘게 걸렸다. 마음 깊은 곳에서 거친 말들이 올라왔다.


'하아. 지겹다. 지겨워. 앞으로 얼마나 이 짓을 해야 할까'


(실은 더 격한 내면의 짜증이었다.)


나름의 요령이다. 한 번씩은 누구를 향해서가 아닌 그냥 허공에 대고 이렇게 분풀이라도 해야 한다. 뭐 나만의 대나무숲에 소리치는 거다. 누구 탓을 하랴. 어제 묻고 더블로 간 내 잘못이지.


막 설거지를 다 끝내고 한숨 돌릴 때 아내가 방에서 나왔다.


"여보. 또 다 정리했네. 설거지도 다 하고"

"응. 욕하면서 했어"


사실 뭐 집 좀 정리하고 (그것도 눈에 보이는 것만) 설거지 좀 하는 건데, 엄청 힘이 드는 것도 아닌데, 왜 이렇게 싫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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