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끝났다

19.12.02(월)

by 어깨아빠

드디어 끝이 보이기 시작했다. 길고 길었던 소윤이의 투병(?) 생활이 끝날지도 모로는 강력한 희망을 품었다. 엄마, 아빠는 안다. 애들 말투만 들어도 얘가 평소랑 다른지 아닌지를. 소윤이의 말투에 본연의 익살이 묻어 있음을 느꼈다. 시윤이를 향해 내뱉는 말에도 사라졌던 권위가 느껴졌고.


"소윤아. 좀 괜찮아졌어?"

"네? 네. 이제 괜찮아졌어여"


그러고 나서 지어보이는 특유의 미소. 건강한 소윤이 그 자체도 반가웠지만 간병을 끝내고, 자욱했던 병의 기운을 걷어낼 수 있다는 것도 기뻤다. 물론 다시 상황이 안 좋아질 가능성도 배제하기는 어렵지만 느낌적인 느낌, 예감적인 예감이 강하게 꽂혔다.


"여보. 드디어 끝나나 보네"

"그러게. 이번엔 진짜 길었다"


물론 여전히 기침은 많이 했다. 기침만 보면 크게 나아지지 않았지만, 열이 내렸고 무엇보다 기력을 회복했다. 총총대며 돌아다니고 이것저것 시윤이한테 시키는 걸 보니 나아진 건 분명했다. 웃음을 되찾고 시끄러워진 소윤이를 보니 꽉 막혀 있던 뭔가가 뻥 뚫리는 느낌이었다.


아내는 간병의 종료를 축하하는 의미로 나한테 어디라도 나갔다 오라고 했다. 제대로 의역하자면 "잠시라도 이곳을 탈출해도 좋아"였다. 소윤이가 좋아졌다고는 해도 아내도 여전히 기침을 많이 했고, 두 아이와 아내만 남겨두고 아무 이유 없이 나가는 게 계속 마음에 걸렸다. 아내는 내가 출근했으면 어차피 같은 상황이었을 테니 상관없다고 했다. 출근은 '소득 획득'이라는 유익한 목적이 존재하지만 현재 나의 외출은 아무런 이득이나 이유가 없기 때문에 선뜻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간병의 수고를 보상받는다는 의미보다 모두를 위해 내 스스로를 환기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나갔다.


"여보. 나갈게. 복귀가 필요하면 언제든 연락해"


10분 내로 복귀가 가능한 동네 스타벅스에 갔다. 저녁에 롬이를 보러 가야 해서 비상 상황(내가 복귀해야 할 만한)이 없으면 아내가 시간 맞춰서 나오기로 했다. 다행히 그런 일은 없었고 소윤이와 시윤이, 아내 모두 병세가 악화되지도 않았다. 다만 아내의 기침은 더 심해졌다.


"여보. 어디 아프거나 몸살 기운이 있는 건 아니야?"

"어. 그냥 기침이 너무 심해서 지쳤어"


지난번에 롬이 보러 갔을 때는 소윤이와 시윤이가 다소 산만하고 관심이 없는 듯했는데 오늘은 둘 다 아주 진지했다. 정밀 초음파를 보는 날이라 부분 부분 세밀하게 봤는데 소윤이는 특히 진심이 느껴졌다.


"아빠. 저거 봐여. 손가락"

"아빠. 저게 롬이 옆모습이에여?"


평소에도 그렇다. 소윤이의 반응은 언제나 진짜였다.


"아빠. 롬이가 태어나면 진짜 얼마나 귀여울까여?"

"아빠. 롬이가 태어나면 세상에서 제일 예쁠 거에여"


시윤이는 물론 진심도 섞였겠지만, 내가 보기엔 '바람직해 보이는' 누나의 말과 행동을 따라 하는 듯 소윤이가 했던 말을 거의 그대로 반복한다.


"아빠아. 롬이 딘따 기엽겠져어?"


롬이와의 만남을 마치고 아내에게 저녁 메뉴를 고르도록 했다. 장르에 상관없이 아내와 아이들이 모두 맛있게 먹을 수 있는 걸로 고르라고 했다. 비용은 생활비가 아닌 내 용돈으로.(용돈쟁이에게 이건 엄청난 일이다.) 아내는 최종 후보로 두 가지를 고민하다가 샤브샤브를 택했다. 쌀쌀한 날씨가 뜨끈한 국물을 생각나게 하기도 했고, 왠지 애들이랑 먹기에 더 풍성할 것 같은 느낌이기도 했고. 무엇보다 샤브샤브가 좀 더 저렴했다. (남편의 주머니를 생각하는 아내의 사려 깊음, 칭찬해)


식당에 들어서니 입구 근처에 아이들 놀이 공간이 있었다. 뽀로로가 재생되고 있는 TV, 게임기 몇 대, 블록같이 생긴 쿠션 몇 개, 벽걸이형 농구대 정도가 있는 매우 단출한 공간이었지만 소윤이와 시윤이는 바로 반응했다.


"아빠. 저기서 먼저 놀아도 되여?"

"그렇게 해"


애들은 거기 풀어두고 우리의 식사부터 시작했다. 아이들을 잘 먹이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일단 아내부터 잘 먹이고 싶었다. 아내는 평균 이상으로 고기를 즐기지 않기 때문에, 샤브샤브 집에 와서 야채만 먹고 가도 매우 만족한다. 아내에게는 파스타만큼이나 성공률이 높은 음식이 샤브샤브인 이유가 거기 있을지도 모른다. 두 번 정도 야채를 가득 채워서 익혀 먹고, 월남쌈을 양껏 먹을 때까지 아내와 나는 매우 자유롭고 평화로웠다.


"여보. 괜찮다"

"그러게"


괜찮다는 말은 많은 걸 담고 있었다. 일단 샤브샤브를 먹으면서 그토록 평화롭게 먹었던 적이 없을 정도로 손에 꼽히는 안정적인 시간이었다. 아내와 나의 배가 어느 정도 찼을 때쯤 소윤이와 시윤이도 지루해졌는지 그만 놀고 밥을 먹겠다며 놀이방에서 나왔다.


소윤이는 야무지게 월남쌈을 싸 먹었다. 재미로 두어 개 싸 먹고 만 게 아니라 배를 채울 정도로 많이 싸서 먹었다. 쌈 싸는 '재미'는 당연하고 쌈의 '맛'도 깨달은 게 분명했다. 시윤이는 월남쌈에는 아예 손도 대지 않고 고기와 버섯만 공략했다.


"여보. 그래도 우리 애들 진짜 얌전하다. 샤브샤브를 이렇게 평화롭게 먹다니"

"맞아. 오히려 다른 집이랑 먹으면 더 정신없다니까"


정말 그랬다. 영상 하나 보지 않고 자리에 딱 앉아서 식사를 진행하는 소윤이와 시윤이가 기특했다. (이렇게 써 놓으면 애들이 너무 모범적이라고 생각하겠지만 사실 그렇지는 않다. 애들은 애들일 뿐이다.)


만족스러운 식사를 마치고 잠시 생활용품점에 들렀다. 아내가 뭐 살 게 있다고 해서 들렀는데 정작 그건 없었고 애들 스티커만 하나씩 샀다. 소윤이는 자동차 스티커, 소윤이는 꽃 스티커를 골랐다. 소윤이는 처음에 손톱에 붙이는 스티커를 골랐는데 너무 비싸서 제지했다. 집에 가면 방바닥 여기저기를 뒹굴 거라는 걸 알기 때문에 굳이 돈을 더 들이고 싶지 않았다. (설령 그게 몇 천 원이라고 해도)


아내가 애들을 재우러 들어갔는데 아내는 기침이 매우 심해져서 잠드는데 방해가 될 정도였다. (이렇게 써 놓으면 너무 건조하다. 누가 들으면 심한 폐 질환이 있나 생각할 정도로 격렬한 기침이 이어졌다. 실제로 아내는 천식 환자고 호흡이 불편하다고 얘기도 했다.) 소윤이와 시윤이가 모두 잠들고 나서도 아내는 잠들지 못했다. 자려고 마음먹었는데도 잠들지 못한 거다. 다시 나와서 물도 마시고 그랬는데 효과가 없었다. 동거인 중에 기침 환자가 있는 사람은 공감하겠지만 컹컹대는 기침 소리는 듣는 이로 하여금 엄청난 스트레스를 유발한다. 이게 뭐 상대를 향한 스트레스라기보다는 그냥 신경을 곤두서게 한다고나 할까. 이미 몇 번이나 기침 때문에 나왔다가 들어갔던 아내가 다시 나왔을 때, 이번에는 시윤이가 깨서 울었다.


보통은 깨더라도 잠깐 울다 말거나 아예 울지 않고 문을 열고 나와서 엄마를 찾기 마련인데, 오늘은 뭔가 느낌이 좀 달랐다. 엄청 시끄럽게 울었다. 마치 누구한테 맞은 것처럼.


"오늘 왜 이렇게 심하게 울지?"

"그러게?"


시윤이는 스스로 문을 열고 나와서 아내에게 안겼다. 아내가 책상에 앉은 나의 무릎을 치며 긴박하게 얘기했다.


"여보. 대박"

"왜?"

"얘도 뜨겁네"

"진짜?"

"어. 완전 불덩이야"

"진짜? 하아"


체온을 재보니 39도 이상이었다. 그래서 그렇게 심하게 울었구나. 짠했다. 모두가 아프고 어두운 기운에 사로잡혔을 때, 유일하게 맑고 밝은 공기를 불어넣어 준 게 시윤이었다. 마치 자기 소임을 다하고 현역에서 물러나는 퇴역 군인 같은 느낌은 너무 과장이고, 그냥 안쓰러웠다.


안쓰러움과 동시에 끝난 줄 알았던 간병인 생활이 다시 시작된다고 생각하니 숨이 턱 막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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