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에 막힌 우리 사랑

20.02.22(토)

by 어깨아빠

"아빠. 내일 할머니 집에는 언제 갈 거에여?"

"응.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어제의 대화를 근거로 소윤이와 시윤이는 눈을 뜨자마자 할머니 집에 가자고 보챘다. 심지어 평소보다 더 빨리 일어났다. 아내와 나도 진작에 눈을 뜨긴 했는데 행동은 굼떴다.


현재 시점에서 소윤이와 시윤이의 가장 큰 차이는 자신의 욕망을 성취하기 위해 스스로 뭔가 할 능력이 되느냐 안 되느냐다. 소윤이와 시윤이 모두 한시라도 빨리 할머니 집으로 가기를 바랐지만 시윤이가 할 수 있는 건 그저


"얼른 가자여엉"


이라고 말하는 것뿐이었다. 그에 비해 소윤이는 훨씬 능동적인 어필이 가능했다. 소윤이는 혼자서 옷을 다 갈아입었다.


"아빠. 저는 벌써 준비 다 됐어여"


오늘의 위탁 육아의 공식적인 명분은 [결혼기념일 데이트]다. 결혼기념일은 내일이지만 조금 더 자유롭고 많은 시간을 확보하기 위해 오늘 놀기로 했다. 코로나 사태가 더 심해져서 움직이는 게 매우 조심스럽지만 그렇다고 결혼기념일인데 방 안에만 처박혀 있을 수는 없었다.


"아침은 할머니 집에 가서 먹자"


라는 이유로 집에서 아침을 안 차렸는데 막상 할머니 집에 도착한 건 정오를 얼마 안 남겼을 때였다. 소윤이, 시윤이에게 좀 미안했다. 아마 배가 많이 고팠을 거다. 가자마자 미뤘던 아침을 먹었다. 아내와 나도 배가 고프긴 마찬가지였지만 곧 나가서 점심을 먹어야 했기 때문에 간단히 허기만 잠재웠다.


"아빠아. 빨리 가여어어엉. 나가여어엉"


시윤이가 얼른 나가라며 떠밀었다. 장난이 아니었다. 시윤이는 진지했다. 그냥 안 나갈 거라고 장난을 좀 쳤더니 정색을 하면서 얼른 나가라고 난리였다. 지난주에는 아내가 아예 하룻밤을 맡기고 따로 잘까도 생각했었는데 시윤이 때문에 반나절로 바꿨다. 시윤이가 싫다고 했다.


"시더여어엉. 엄마, 아빠랑 다고 디퍼여어엉"


그럴 때는 언제고 빨리 나가라니. 나가지 말라고 붙잡아도 나갈 거다, 이 녀석아.


예약제로 운영되고 당일에는 거의 자리가 나지 않는 인기가 많은 식당에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아침에 문자를 보냈었다.


[혹시 오늘 예약 가능한가요? 2명이요. 12시요]


처가에 있을 때 답장이 왔다. 12시 30분에 가능하다고. 코로나 때문에 사람이 없는 건가 싶었는데 막상 가보니 빈자리는 없었다. 운이 좋게도 한자리가 취소됐나 보다. 분위기도 좋고, 음식도 맛있었지만 가장 큰 매력은 역시 아이들과 함께 오기 힘들다는 것이었다. (저녁과 주말에는 아예 노키즈존으로 운영한다.) 노키즈존이 아니더라도 이런 곳을 애들이랑 와서 배불리 먹으려면 곳간이 거덜 날 거 같았다.


그다음은 카페. 안 가 본, 신선한 곳을 가고 싶어서 여기저기 찾아보며 고민했지만 아내와 나는 오늘도 도전하지 못했다. 아내와 나는 분위기 좋은 곳보다는 '커피가 맛있는 곳'을 더 원했다. 늘 가던 곳을 갔다. 분위기도 좋지만 커피 맛도 좋다는 걸 이미 아는 곳. 처음에는 커피만 한 잔씩 시켰는데 나중에 초코 쿠키를 하나 더 샀다.


"여보. 마음껏 먹자. 애들 눈치 보지 말고"


밥 먹고 차 마시니 할 일이 없었다. 영화를 볼까 말까 많이 고민했는데 아무래도 불안했다. 그냥 일반인도 아니고 임산부인데 굳이 그런 위험을 감수할 필요가 없었다. 오히려 아내는 영화관에 사람이 없으니 괜찮지 않겠냐는 반응이었다.


"여보. 아무래도 안 되겠어. 가도 불안해서 집중이 안 될 거 같아"

"그래, 그럼. 다음에 보자. 그럼 우리 이제 뭐 하지?"

"그러게"


시간은 많은데(사실 많은 것도 아니었는데, 할 게 없으니 그렇게 느껴졌다) 할 게 없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갈 수 있는 곳이 없었다.


"여보. 알라딘 잠깐 갈까?"

"알라딘? 왜?"

"그냥. 소윤이랑 시윤이 선물로 책 한 권씩 사서 가면 좋잖아"

"그래, 그러자"


다행히 아직까지는 책 선물을 매우 좋아한다. 어제 때아닌 육아책을 선물로 받았던 시윤이를 위해 온전히 시윤이만을 위한 소방차가 나오는 책도 한 권 골랐다.


날이라도 좀 따뜻하면 산책을 하든 앉아 있든 바깥에 좀 있었을 텐데 그러기에는 또 애매했다. 겨울이라고 하기에는 많이 따뜻한 편이었지만 그래도 바람이 좀 불었다. 아내는 평균 이상으로 추위를 많이 타는 편이기도 했고.


결혼기념일 선물은 이미 주문해서 배송이 되는 중이었지만 그와는 별개로 소소한 선물을 받고 싶은 건 없냐고 물었다. 아내는 (아주 저렴한) 귀걸이를 얘기했다. 라페스타쪽에 있는 로드샵에 가서 하나 샀다. 구경하는 데 오래 걸리지는 않았다. 두 번째 들어간 가게에서 바로 샀으니까.


그러고 나서는 [맑음 케이크]에 갔다. 장모님과 장인어른, 소윤이, 시윤이에게 줄 에그 타르트를 사러 갔다. 간 김에 잠깐 앉았다. 아내는 딸기 케이크를 하나 샀다.


"여보. 먹자. 애들 눈치 보지 말고. 마음껏 먹어"


호기롭게 저녁까지 먹고 들어가겠다고 말씀드렸는데 코로나 때문에 할 게 없었다. 그래도 일찍 들어가는 건 뭔가 억울했고. 저녁으로는 가볍게(?) 수제 버거를 먹었다. 여기도 역시 평소에는 줄이 길어서 많이 기다려야 한다고 했는데 시국이 시국이라 그런지 그 정도로 많지는 않았다.


이제 아내와 나의 공식적인 일정은 모두 끝났다. 남은 건 귀가뿐이었다. 아쉬웠다. 갈 데도, 할 것도 없는데 자꾸 어디라도 가자고 조르는 소윤이의 마음이 그랬을까.


"여보. 뭔가 아쉬운데"

"그치?"

"여보. 차 구경하러 갈까?"

"어디? 여기 근처에 있어?"

"어. 여기 풍동 어디에 있다고 그런 거 같은데"


아내와 내가 잠시 고민했지만 마음을 접은 브랜드의 전시장이 근처에 있었다. 롬이가 태어나면 지금 차로는 안 되니까 여러 종류의 차를 고민했다. 목표 대학에 호기롭게 SKY라고 적었다가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현실을 깨닫고 배치표의 아래쪽에 눈을 돌리는 고3 수험생(시절의 나)처럼, 현실을 자각하고 고려 대상에서 제외한 차였다. 구경은 공짜고 시간은 남고, 집에 가는 건 아쉬우니까 한 번 가 봤다. 역시 재미는 없었다. 나에게 있어서 가장 재미있는 쇼핑은 총알을 들고 가서 바로 쏠 수 있는 상태의 쇼핑이다. 공포탄 들고 가는 건 영 재미가 없다.


아쉽긴 했어도 오랜만에 아내랑 오붓하게 시간을 보내서 좋았던 짧은 데이트를 마치고 처가로 복귀했다. 장모님과 장인어른, 아이들은 근처의 장인어른 지인 댁에 가고 없었다. 아내와 내가 들어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돌아오셨다.


"엄마. 그런데 할 말이 있어여"

"뭔데?"

"우리 오늘 자고 가도 될까여?"

"자고? 글쎄 생각 안 해 봤는데"

"그럼 엄마가 생각해 보고 결정해주세여. 알았져?"


소윤이는 들어오자마자 아내에게 물었다. 결정권을 아내에게 넘기긴 했지만 기대가 잔뜩 담긴 말투였다. 기대를 넘어서 자신의 제안이 수락될 거라는 걸 확신하는 듯했다. 아내는 결정과 대답을 미뤘다. 자고 가는 것도 큰 문제는 아니었는데 뭔가 너무 갑작스러웠고 내일 동선도 고민이었다. 아내랑 얘기를 나눈 건 아니었지만 너무 심해지는 코로나 사태 덕분에 교회에 가야 할지 말아야 할지를 마음속으로 고민하고 있었다. 만약에 가지 않는 걸로 결정을 하게 되면 차라리 오늘 밤에 집에 가는 게 나았다. 교회는 안 가더라도 집에서 실시간으로 예배는 드려야 했으니까.


고민을 하던 아내는 소윤이에게 얘기했다.


"소윤아. 우리 오늘은 자기로 하고 온 게 아니니까 나중에, 다음에 미리 정하고 와서 자고 가자. 오늘은 집에 가야 할 거 같아. 알았지?"


소윤이는 특유의 못난이 울음으로 화답했다. 너무 슬플 때 나오는 표정과 울음이었다. '나의 울음으로 이 상황을 반전시키고 내 뜻을 관철시키겠다'라는 의도가 담긴 울음하고는 확연히 달랐다. 그저 슬프고 아쉬워서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이었다. 누나가 속상함에 울고 있는 동안 시윤이는 몰려오는 졸음 탓에 전혀 맥락 없는 지점에서 떼를 쓰고 고집을 피웠다. 아수라장이었다.


그래도 소윤이와 시윤이는 각자의 책 선물을 아주 기쁘게 받았다. 특히 시윤이를 위해 고른 책은 엄청 길었다. 솔직히 그렇게 긴 줄 알았으면 안 샀을지도 모르는데 대충 훑어봐서 잘 몰랐다. 엄청 길었다. 그 긴 책을 시윤이는 한 번도 시선을 떼지 않고, 읽어주는 걸 집중해서 잘 들었다. 뿌듯했다. 앞으로 자기 전에 이 책을 고르면 어떻게 하나 걱정이 좀 되긴 했지만.


양치까지 다 마치고, 잘 준비를 모두 끝내고 처가에서 나왔다. 장인어른, 장모님도 서러운 소윤이의 눈물에 안쓰러운 마음을 감추지 못하셨다.


"엄마. 저는 엄마가 우리 내복까지 챙긴 걸 봐서 아마 자고 갈 거라고 생각했어여. 그래서 더 슬펐던 거에여"

"아, 그랬구나. 이렇게 늦게 갈 경우를 대비해서 옷 갈아입히고 잘 준비도 하고 가려고 내복 챙긴 거였어. 소윤아. 많이 속상했지?"

"네"

"그래. 속상했을 거야. 우리 다음에는 미리 정하고 와서 꼭 자고 가자?"

"네"


시윤이는 카시트에 앉자마자 잠들었고, 소윤이는 집에 도착해서 아내와 함께 방에 들어갔다.


내일은 애들이랑 함께 있어야 하니 사실상 오늘이 결혼기념일이나 마찬가지였는데 못내 아쉬웠다. 뭔가 더 재밌고 즐겁게 여기저기 돌아다녔어야 했는데. 한편으로는 뭐 맛있는 것도 많이 먹고 오랜만에 둘이 데이트해서 좋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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