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23(주일)
교회를 가지 않고 집에서 예배를 드리기로 했다. 실시간으로 예배를 중계한다고 해서, 아침 먹고 자리를 잡았다. 아내는 소윤이와 시윤이를 낳고 나서 홀로 집에서 예배를 드린 적이 있었지만 난 36년을 살면서 교회에 가지 않은 경험 자체가 거의 없었다. 소파 앞에 소윤이와 시윤이의 의자를 놓고 그 앞에 소윤이 책상을 두고 노트북을 올려놨다.
장소만 집이었을 뿐 소리 내서 찬양도 하고 기도도 하고 똑같이 했다. 소윤이와 시윤이는 각자 자기 의자에 앉으니 자연스럽게 더 얌전해졌다. 물론 좀이 쑤시니까 중간중간 몸을 비틀긴 했지만 자리를 벗어나지는 않았다. 내가 문제였다. 소파에 앉아서 그랬는지는 몰라도 왜 이렇게 잠이 쏟아지는지. 앞에 앉은 애들한테는 바로 앉으라고 하면서 난 뒤에서 막 졸았다. 아내가 나의 허벅다리를 자극하며 깨웠는데도 좀처럼 헤어 나오지 못했다.
결혼기념일인데 전혀 결혼기념일 같지 않았다. 까치까치 설날도 어제고 우리우리 결혼기념일도 어제인 느낌이었다. 약 오르게 날씨는 엄청 좋았다. 화창하고 미세먼지도 없고. 집에만 있을 수는 없었다. 특별한 이유는 없지만 그랬다. 그건 너무 답답하니까.
"여보. 스타벅스라도 갔다 오자"
"그래"
커피 두 잔을 샀다. 애들한테는 어제 사 온 에그 타르트와 초코 마들렌을 줬다. 아내는 간식거리를 두둑하게 챙기지 않은 대신 연습장과 색연필을 챙겼다. 그림이나 그리면서 좀 앉아 있길 바라는 마음이었다. 그때그때 다르기는 한데 보통 소윤이는 우리의 바람을 잘 만족시켜주고 시윤이는 그렇지 못하다. 아무래도 아직 표현의 기술이 부족한 시윤이가 금방 싫증을 내긴 한다.
의외로 오늘은 아니었다. 둘 다 한참 동안 색연필을 쥐고 그림을 그렸다. 시윤이의 그림은 그저 무규칙한 선의 중첩이었지만 어쨌든 나름대로는 다 이름을 붙였다. 열심히 호응만 해주면 신나서 다음 종이를 달라고 하고는 거침없이 색연필을 휘둘렀다. 소윤이는 그린 그림은 붙인 이름과의 괴리가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제법 그럴싸했다. 덕분에 제법 여유롭게 앉아서 아내와 대화를 나눴다.
주일 축구 참석 여부에 진작부터 [불참]이라고 표시를 했다. 결혼기념일에 축구를 하러 갈 수는 없으니까. 그때는 코로나 사태가 이렇게 심각해질 줄 몰랐다. 결혼기념일이니 가족 데이트로 어디든 갈 생각이었다. 상황은 바뀌었고 우리의 향할 곳은 집뿐이었다.
"여보. 이제 집에 가면 뭐 할 거야?"
"애들 목욕이나 시켜줄까?"
"아, 그럴까?"
깊은 내면의 고민이 시작됐다.
'어차피 아무 데도 못 가는데 그냥 축구를 하고 오면 안 되나'
크게 보면 두 가지의 고민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결혼기념일에 축구를 하러 가는 게 마땅한 일인가], [코로나 때문에 온 나라가 난리인데 축구가 가당키나 한가]. 축구가 취소되었다는 소식이 없었다. 하늘은 더 파랗게 맑아졌고.
"여보. 나 축구하러 가도 될까?"
아내의 첫 반응은 웃음이었다.
"아니, 어차피 아무 데도 못 가니까. 혹시나 해서 해 본 말이야. 여보가 안 된다고 하면 당연히 안 가는 거고. 어쨌든 결혼기념일이니까"
"결혼기념일인 건 상관없어. 어차피 집에 있어야 되는데 뭐"
"그렇긴 하지"
"괜찮겠어?"
"뭐가?"
"축구하러 가도"
"아, 그런데 오히려 축구는 괜찮을지도 모르지. 밀폐된 공간도 아니고 사람이 그렇게 많은 것도 아니니까. 그래도 뭐 여보가 가지 말라고 하면 안 가지"
"갔다 와. 조심하고"
"진짜 괜찮아?"
"어, 난 상관없어"
집에 돌아와서 늦은 점심을 차렸다. 저녁에는 간단히 감자나 계란을 삶아서 주기로 했다. (물론 저녁은 아내가 차리겠지만.) 점심은 든든히 먹이기 위해서 고기를 구웠다. 아내는 혼자서라도 애들 목욕을 시키겠다고 했다. 혼자서 애들 씻기는 게 좀 힘들기는 하지만 욕조에 들어가서 노는 동안에는 나름의 자유가 주어지기도 한다. 물론 소윤이와 시윤이가 사이좋게 잘 논다는 전제 아래.
"소윤아, 시윤아. 이따가 목욕할 때 엄마가 '이제 그만하자. 나와'라고 말씀하시면 어떻게 해야 되지?"
"네, 엄마. 이렇게여"
("네, 엄마아. 이케")
"그래. 엄마가 말씀하시면 바로 딱 듣는 거야. 알지? 그리고 저번처럼 욕조에서 서로 좁다고 징징대고 싸우고 그러면 돼, 안 돼?"
"안 돼여"
("안 대여엉")
"오늘이 마지막 기회야. 만약에 오늘도 그렇게 다투거나 싸우면 이제 당분간 욕조에서는 목욕 안 할 거야. 알았지?"
"네"
("네")
내가 비록 죽어서 떠나는 건 아니어도 유훈 통치가 원활하게 이뤄지길 바라는 마음으로 소윤이와 시윤이에게 다시 한번 얘기했다.
아무리 그래도 결혼기념일이니까 밤에는 초밥이라도 먹으면서 영화를 보자고 미리 아내와 이야기를 마쳤다. 축구가 끝나고 휴대폰을 확인해 보니 아내에게 카톡이 와 있었다. 다 씻고 자리에 누워서 책을 읽으려고 한다는 내용이었다. 야식은 초밥이든 뭐든 좋으니 알아서 사 오라는 내용도 함께 있었다.
우선 동네 꽃집으로 갔다. 안타깝게도 문이 닫혀 있었다. 인근의 꽃집이 어디 있나 검색하다가 한 곳에 전화를 했다.
"아, 혹시 지금 영업하시나요?"
"음, 어디신데요? 저희가 지금 문을 닫으려고 하는 중이어서요"
"아, 여기 신원마을인데 한 10분 걸릴 건데"
"그럼 오세요. 기다릴게요"
"아, 감사합니다"
꽃다발까지는 아니고 조촐한 꽃 몇 송이를 샀다. 동네 횟집에 가서 연어 초밥과 활어 초밥도 샀다. 마트에 들러서 과자도 사고. 막 엘리베이터를 타려고 할 때 아내에게 또 카톡이 왔다. 시윤이가 깨서 잠시 방에 들어갔다고 했다. 조용히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서 옷을 벗었다. 일단 샤워부터 해야 했다. 그 사이 아내가 나왔다. 아내의 기분과 동태를 살피기 위해 촉각을 곤두세웠다. 너무 힘들었는지 좀 쌀쌀맞은 기운이 느껴지나 싶었는데 다행히 오해였다. 설령 그렇다고 해도 나에게는 비장의 무기, 꽃이 있었다. 아내는 꽃을 아주 좋아한다. 특히 생각지도 못하게 받았을 때.
소윤이와 시윤이는 1시간 정도 목욕을 했다고 했다. 아내는 마치 노래방 사장님처럼
"5분만 더 해"
라고 얘기하며 끊임없이 뜨거운 물을 채워줬다고 했다. 모르긴 몰라도 아내도 편했던 거다. 나중에는 소윤이가 약간 질려서
"왜 계속 더 해여?"
라고 물어봤을 정도라고 했다. 내가 없는 저녁 시간이 전반적으로 괜찮았냐는 나의 물음에
"응. 견딜만한 정도였어"
라고 대답했다. 골프로 치면 최소한 파 정도는 선방의 느낌이었다.
점심을 늦게 먹었으니 배가 고프지 않을 거라는 우리의 예상과는 다르게 배가 고팠다. 작디작은 초밥 몇 알(물론 진짜 몇 알은 아니지만)로는 턱도 없이 부족했다. 아내는 짜짜로니 끓이면 먹을 거냐고 물었다. 뚠뚠이가 왜 뚠뚠이가 되었냐면 차려져도 먹기 싫으면 안 먹으면 되는데 별생각 없다가도 차려지면 안 먹고 싶어도 먹으니까 그렇게 되는 거다. (동의했다는 말을 최대한 이해하지 못하게 하는 중이다) 간단하게 먹으면 되지 않겠냐는 애초의 논의는 온데간데없고 코스처럼 등장하는 야식을 먹으며, 없는 듯 지나는 결혼기념일이 아쉬워서 결혼기념일을 굳이, 다시 기념했다.
"여보. 축하해. 결혼기념일"
"그래, 여보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