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02(월)
아내는 어제 자기 전에 또 가위바위보를 하자고 했다.
"여보. 가위바위보 하자"
"아냐. 내가 일어날게"
"아, 왜. 가위바위보 해"
"내가 일어날게. 여보 자"
"아, 그래도 요즘 맨날 내가 일찍 일어나잖아"
"아니야. 내일은 내가 일어날게"
오늘도 새벽같이 일어난 아이들 덕분에 눈이 떠졌지만 자는 척했다. 자꾸 방을 들락날락하는 소윤이와 시윤이에게 괜히 엄포도 한 번 놓고.
"소윤아, 시윤아. 방 문 자꾸 열지 마. 엄마, 아빠 자잖아. 알았지?"
"아빠. 언제까지 잘 거에여?"
"몰라"
어쨌든 아내보다 먼저 일어나기로 약속했으니 다시 잘 생각은 없었지만 단 몇 분이라도 더 편히 있고 싶었다. 거실에서 소윤이와 시윤이가 사이좋게 노는 소리, 투닥거리는 소리, 삐지는 소리, 누나한테 대드는 소리가 쉴 새 없이 들렸다. 이제 슬슬 나가볼까 하던 찰나에 잠이 확 깨는 일이 생겼다. (자세한 얘기는 하기가 좀 그렇지만 층간 소음 때문에 아래층과의 갈등이 있었다.)
소윤이와 시윤이는 자동차와 블럭을 가지고 놀고 있었다. 아내는 나와 함께 잠시 깼다가 다시 자는 중이었다. 소윤이와 시윤이가 제법 잘 놀길래 (내가 아무것도 안 하고 옆에 앉아 있는 것도 가능하길래) 굳이 아침을 차려주지 않고 미뤘다. 블럭으로 뭘 만들 때마다 나에게
"아빠"
"응?"
"이거 뭔지 알아여?"
"뭔데?"
"이거 동물원이에여"
"오, 진짜 동물원 같은데. 잘 만들었다"
"아빠아"
"응?"
"이거 먼디 아다여엉?"
"뭔데?"
"이거 동무던이에여엉"
"오, 그래? 시윤이도 잘 만드는데?"
말을 거는 게 조금 성가셨지만 그 정도도 안 하겠다고 하면 그건 너무 비양심적이라는 생각에 열심히 대답했다. 소파에 앉아 책을 들여다볼 호사를 누리는 게 어디냐고 생각하면서.
아내는 꽤 오랫동안 잤다. 소윤이와 시윤이가 아침을 거의 다 먹었을 때쯤 일어났다. (미루다 보니 오늘도 애들한테 늦은 아침을 주게 됐다.) 아내랑 나는 점심에 가까운 아침을 먹었다.
아내는 오늘 오렌지를 사러 가야 한다고 했다. 차로 10분 정도 거리에 있는 동네의 과일 가게에서 특별 할인을 하는 걸 알고 어제 예약을 했다고 했다. 바람도 쐴 겸 다 함께 다녀오기로 했다. 오렌지는 출발의 명분이었고 진짜 목적은 카페였다. 어젯밤에 나 혼자 카페에 다녀왔는데 아내가 바닐라 라떼가 먹고 싶다면서 자기 것도 사 오라고 했다. 아내는 시간이 너무 늦었으니 좀 참는 게 어떠냐는 나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막상 집에 들어가니 '그냥 사 오라고 할 걸 그랬다'면서 후회했다. 아내는 오늘 바깥 커피를 꼭 마셔야만 했다.
외출 준비는 거의 아내가 제일 마지막이다. 애들 짐 챙기고 덜 된 집안일 마무리하고 그러다 보면 아내가 막 준비를 시작할 때쯤 나와 아이들은 이미 준비가 끝난다. 오늘도 마찬가지였고 먼저 나가 있었다. 소윤이와 시윤이가 집 앞에 있던 킥보드를 차까지만 타고 가겠다고 해서 그러라고 했다. 금방 내려올 거 같던 아내는 꽤 오래 걸렸다. 한 20-30분 아내를 기다리는 동안 소윤이와 시윤이는 건물 입구의 조그마한 공간에서 엄청 신나게 놀았다. 킥보드 타고, 뛰고. 예상치 못한 곳에서 누린 기쁨이었다.
"아빠"
"어?"
"엄마가 왜 이렇게 안 오시지?"
"그러게"
"그런데 엄마가 늦게 오시니까 좋기도 해여"
"왜? 많이 놀 수 있어서?"
"네. 맞아여"
코로나가 사라지기 전까지는 종종 거기 나가서 놀까 하는 생각을 했을 정도로 너무 신나게 놀았다.
오렌지를 사고 자연드림에 들러서 애들 간식거리도 좀 샀다. 카페는 작은 규모의 아주 조용한 분위기였다. 소윤이와 시윤이가 조금이라도 돌아다니거나 시끄럽게 굴 여지가 없는 곳이었다. 준비한 간식은 자연드림에서 산 초코과자와 빵 하나뿐이었다. 아이들의 간식이 떨어지는 순간, 엉덩이를 떼고 나가야 할지도 모른다는 각오로 앉았다. 한편으로는 다른 또래 아이에 비해 제법 얌전하게 있을 줄 아는 소윤이와 시윤이를 향한 기대도 있었다.
먹거리가 모두 떨어졌다는 건 아이들의 관심이 어딘가로 향한다는 말이다. 그건 곧 자꾸 어딘가로 손과 팔을 뻗거나 자리에서 이탈해 이동한다는 말이고. 워낙 협소하고 조용한 곳인데다가 커피 플레이팅이 워낙 정성스러워서 테이블 위에 놓인 게 많았다. (조금만 잘못 건드려도 깨질만한 게 많았다.) 그때 아내가 소윤이와 시윤이에게 아주 자그마한 종이 하나를 반으로 잘라서 줬다. 내 손바닥보다 조금 작은, 내가 마신 커피의 원두를 어떻게 블렌딩했는지 설명해 놓은 안내지였다. Action of the Day였다. 그 작은 종이 하나 때문에 한 시간을 더 앉아 있었다. 원래 그런 거 가지고 사부작거리는 걸 좋아하는 소윤이와 누나가 하는 건 다 따라 하고 싶은 시윤이에게 아주 좋은 놀이감이었다. 다 마시고 일어서면서 '다음에 또 와야겠다'라고 생각을 했다. 수월했다는 거다. (반대의 예로, 공덕의 [프릳츠커피]는 딱 한 번 방문한 뒤로 다시 간 적이 없다. 막 걸음마를 시작한 소윤이와 함께 갔었는데, 잠시 지옥 체험을 했었다.)
소윤이는 며칠 전부터 찰흙놀이가 하고 싶다고 했고 아내는 어제 약속을 했다.
"내일 다이소에서 팔면 찰흙 좀 더 사자"
집에 가는 길에 다이소에 들러 찰흙을 사고 집에 오자마자 상을 펴서 찰흙놀이를 시작했다. 그렇게 두 시간이었다. 오늘은 애들이 뭔가 호흡이 길었다. 물론 찰흙놀이의 후폭풍은 좀 거셌지만 (온 바닥에 흩어지고 옷 여기저기 들러붙은 찰흙을 처리하며 아내는 여러 차례 한숨을 내쉬었다) 애들이 찰흙 가지고 노는 동안 아내도 나도 좀 쉬었다.
오늘 하루는 소윤이에게 좀 더 많이 표현하려고 애를 썼다. 요즘 아내와 자주 하는 얘기가, 우리도 모르게 시윤이한테만 다정하게 대할 때가 많다는 거였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이제 6살이 된 소윤이는 뭘 해도 어설픈 구석이 없어서 아기 같은 천연의 귀여움 같은 게 잘 느껴지지 않는다. 그에 비해 이제 막 고차원 인간의 형상을 갖추기 시작한 시윤이는 뭘 해도 새롭고 어설픈 데서 유발되는 특유의 매력이 한창일 때고. 물론 소윤이가 지금 시윤이 시기였을 때는 비할 바가 아닐 정도로 사랑을 받았지만, 2020년의 소윤이에게 그걸 설명하면 무슨 소용이 있으랴. 그런 이유로 일부러 소윤이한테 더 다정하게 대하고 많이 표현했다.
"으, 귀여워"
"누가여?"
"소윤이"
"제가여? 제가 아직도 귀엽다구여?"
"그럼. 당연하지. 소윤이도 아직 귀엽지"
어떤 상황이었는지는 기억이 나질 않지만 소윤이랑 이런 대화도 나눴다. 소윤이도 갈망이 있다는 게 느껴졌다. 이제 롬이가 나오면 어쩔 수 없이 더 그럴 텐데 지금부터 의식하고 연습해야지 넋 놓고 있다가 갑자기 소윤이가 상한 마음을 쏟아내면 너무 가슴이 아플 거다.
대신 소윤이하고는 특별한 유대를 공유하기도 했다. 예를 들면, 시윤이가 제멋대로 굴거나 자기 뜻대로만 하려고 고집을 부릴 때 따로 소윤이하고 눈짓을 교환하며 '냅둬. 쟨 아직 어리잖아. 넌 아빠랑 놀 군번이야' 라는 메시지를 보내는 거다. 군대에서 말년 병장이 됐을 때 소대장이나 부소대장이 더 이상 사병 취급을 하지 않고 반 간부 취급을 하며 자기 방에 따로 불러서 게임도 시켜 주고 술도 주고 그럴 때 느끼는 묘한 쾌감과 고마움이랑 비슷하려나. 아무튼 소윤이도 뭔가 안다는 듯한 눈빛과 미소로 대답하곤 했다.
물론 수도 없이 가르치고 소윤이 입장에서는 잔소리였을 훈계도 많이 했지만, 그건 정당한 훈육 행위였다. 다만 가르치는데 열을 올리다 보면 사랑의 곳간을 채워주는 것에 소홀하기 마련이니 채워주는데 조금 더 집중하자는 의미랄까.
소윤아. 이 일기를 보며 기억하거라. 너에게는 벌써 두 동생에게 없는 든든함이라는 게 생겼다는걸. 그래도 노력할게. 널 어른처럼 대하지 않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