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04(수)
역시 모든 것은 마음먹기에 따라 달린 건가. 어제는 예상치 못하게 찾아온 마음의 시름으로 눈을 떴을 때부터 뭔가 이상했는데 오늘은 아니었다. 이른 시간 혼자 잠에서 깨서 누구든 한 명이라도 더 일어나길 기다리던 소윤이와 눈이 마주쳤고 소윤이를 매트리스 위로 불러들였다.
"소윤아. 이리 와서 누울래?"
"왜여?"
"그냥"
소윤이는 나와 아내 사이를 더 원했겠지만 아내의 수면을 방해하지 않으려고 내 옆, 끝 쪽에 눕혔다. 소윤이 손을 잡고 좀 더 잤다. 물론 소윤이는 자지 않았다.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시윤이도 깨서 소윤이랑 거실에서 놀고 있었다.
아내는 어제 나의 일기를 보더니 이렇게 얘기했다.
"여보. 나는 메모리 게임 얘기만 들어도 지겨워"
그래. 꼭 나의 탓만은 아닐 거다. 하나에 꽂히면 집요하게 그것만 들이대는 소윤이의 성향도 분명히 공로가 있을 거다. 다행히 오늘은 메모리의 메자도 꺼내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정말 웬일이지.
어제 아내가 오늘 점심에는 족발을 먹자고 했다. 아내는 족발을 좋아하지 않는다. 아니, 거의 입에 대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내가 족발 얘기를 꺼낸 건 동네 족발 가게에서 점심 특가 할인을 했고, 나와 아이들을 먹이기 위해서였다.
소윤이와 시윤이가 눈을 뜨는 7시에 바로 밥을 먹이지 않는 이상 아침과 점심의 간격은 항상 짧기 때문에 아침을 거하게 먹이면 점심을 잘 안 먹을 거 같았다. 점심 족발의 만족감을 극대화하기 위해서 아침은 간단하게 감자와 계란, 과일을 먹였다.
요즘의 여느 날처럼 소윤이와 아내, 나는 각자 할 일을 했고 시윤이는 그 한복판(거실)에서 자동차를 가지고 놀았다. 시윤이의 속마음이야 어떤지 몰라도 겉으로 보기에는 결코 외로워 보이지 않았다. 한시도 쉬지 않고 중얼거리면서 자동차 왕국의 전지전능자가 되어 이리저리 굴리며 웃고 그랬다.
족발은 제값 주고 먹기에는 좀 아까웠지만 (가뜩이나 우리 집은 아내가 거의 안 먹기 때문에) 할인된 가격으로 먹는 건 괜찮은 구성이었다. 소윤이와 시윤이도 엄청 잘 먹었다.
"아빠. 저는 이거 쫄깃한 부분이 맛있어여. 그거 주세여"
"아빠아. 저두여엉. 그거가 맛이떠여엉"
살코기도 당연히 잘 먹었지만 껍데기도 그 부분만 골라 먹을 정도로 잘 먹었다. 나중에는 뼈다귀도 하나씩 쥐여줬는데 그것도 아주 야물딱지게 발라 먹었다.
오후에는 잠시 카페에 갔다 왔다. 바람이 너무 많이 불고 추워서 밖으로 나가 걷거나 놀기에는 무리였다. 대신 내가 사기로 했다. 아내는 평소에는 잘 사지 않는, 디저트 중에서는 가격이 좀 있는 편인 티라미슈도 주문했다. (사실 아내가 커피 쿠폰 하나를 찬조했다.) 소윤이와 시윤이의 쿠키도 하나씩 샀다.
오늘도 소윤이와 시윤이는 그림 삼매경이었다. 덕분에 아내와 나는 아주 편히 있었고. 시윤이가 태어날 무렵에도 이런 생각을 했다.
'편해질만하니까 새로운 놈이 나타나는군'
지금 생각하면 그때 편한 건 편한 것도 아니었다. 소윤이가 25개월이었으니까. 지금이야말로 좀 편해지려니 다시 reset 이 코앞에 온 느낌이다. 한 달 정도 후면 카페에서 지금처럼 여유롭게 시간을 보내는 건 꿈도 못 꿀 일이 될 거다. 이 마지막 시간을 열심히 돌아다니며 놀고 그래야 하는데 코로나 때문에 갇혀서 생활하다니. 억울하다.
저녁은 간단히 먹이기로 했다. 점심을 잘 먹였으니까. (그러고 보니 아침은 점심을 잘 먹일 거니까 간단히 먹이고, 저녁은 점심을 잘 먹었으니까 간단히 먹였네.) 김치를 볶아서 두부와 함께 줬다. 시윤이가 매워서 못 먹으면 어쩌나 걱정이긴 했는데 그냥 줬다. 다행히 시윤이는 '쓰읍. 하아'를 연신 반복하긴 했지만 끝까지 잘 먹었다.
"시윤아. 안 매워?"
"매운데 마시떠서 먹으는 거에여엉"
"오, 시윤이 진짜 오빠네"
요즘 매일 자기 전에 아내의 배 위에 손을 올리고 기도를 한다. 애들 재울 때쯤 되면 온몸 구석구석 숨어 있던 피곤이 다 모이는 듯한 느낌이다. 빨리 끝내고 싶어서 '오늘은 그냥 넘어갈까' 이런 생각도 하는데 소윤이 덕분에 거르지 않고 있다.
"아빠. 오늘도 롬이한테 손 올리고 기도할까여?"
셋째가 누리는 특권이 이런 건가 보다. 부모뿐만 아니라 언니와 오빠에게 받는 사랑을 뱃속에서부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