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07(토)
소윤이는 자기 생일을 조금이라도 일찍 자축하려는 듯, 정말 엄청 일찍 일어났다(고 아내가 얘기해 줬다. 난 자느라 몰랐고). 아내도 함께 일찍 일어나서 반찬을 만들었다. 난 조금 더 늦게까지 잤다.
"소윤아. 생일 축하해"
소윤이를 보자마자 인사를 건넸다. 소윤이는 세상에 둘도 없는 환한 미소로 답했다. 시윤이에게는 어제부터 오늘이 누나의 생일이라는 걸 알려줬다. '생일'이 정확히 어떤 의미인지 알고 있는지는 모르겠다. 어쨌든 뭔가 좋은 날이라는 걸 알고 있을 거다. 벽에 풍선도 붙고 엄마, 아빠가 아침부터 반찬도 만들고 그랬으니까. (대개 아침은 초간편식이다.)
요즘은 밥 먹을 때 주로 소윤이나 시윤이한테 기도를 시킨다. 오늘은 내가 했다. 소윤이를 축복해 주려고 그랬는데 "소윤이가 태어난 지 6년이 되었습니다"처럼 아무것도 아닌 말을 하는데 속이 꿀렁거렸다. 여러 번 그랬다. 민망한 상황이 벌어질 뻔했다. 해가 갈수록 느는 건 나이와 청승이다.
소윤이와 시윤이는 기분이 너무 좋아서 그랬는지 사실 밥 먹는 태도는 불량했다. 생일인 걸 참작해서 '불량한 태도' 허용치를 평소보다 대폭 늘렸다. 그래도 다 맛있게 먹었다. 소윤이와 시윤이는 너무 맛있다면서 미역국을 푹푹 떠먹었다. 소윤이가 먹다 말고 물었다.
"아빠. 근데 생일에 왜 미역국을 먹어여?"
"음, 왜냐면 소윤이 낳고 나서 엄마가 미역국을 엄청 많이 먹었거든?"
"왜여?"
"미역국이 아기 낳은 엄마들한테 좋다고 해서"
"그런데 왜 제 생일날 미역국을 먹는 거에여?"
"아, 엄마가 소윤이 낳고 미역국을 많이 먹었잖아. 엄청 고생도 많이 하시고. 그러니까 엄마, 아빠는 미역국 먹으면서 그때 생각도 하고 소윤이는 '아, 엄마가 고생을 많이 하셨겠구나' 생각하면서 엄마한테 감사하라는 뜻이야"
"아, 그래여?"
갑작스럽게 답한 것치고는 제법 그럴싸했다. 정말 그렇다. 생일 당사자의 음식이 아닌 그 부모의 음식인 미역국을 굳이 끓이는 건, 아마 그런 의미가 있지 않을까. 소윤이와 시윤이가 미역국을 먹는 모습을 보니 그때의 기억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지겹도록 미역국만 먹으며 밤낮없이 젖을 물리던 아내의 모습도.
소윤이가 밥을 먹다 말했다.
"아빠. 아빠한테 귓속말할 게 있어여"
"뭔데?"
"잠깐만여"
소윤이는 자리에서 일어나 나에게 오더니 귀에 대고 속삭였다.
"이따가 엄마 꽃 사주자여"
"오, 좋아. 그러자"
아주 좋은 생각이었다. 굳이 귓속말을 하더니 아내에게도 자기가 먼저 얘기했다.
"엄마. 우리가 이따가 꽃 사줄게여"
아침을 먹고 난 소윤이는 할머니, 할아버지를 애타게 기다렸다. 할머니, 할아버지가 오시려면 얼마나 남았냐는 질문을 정말 자주 했다.
"아빠. 할머니랑 할아버지 오시려면 몇 분 남았어여?"
"아직 많이 남았어. 한 2시간?"
"아, 빨리 오셨으면 좋겠다"
시윤이는 결이 조금 달랐다.
"아빠아. 이따가 할머니양 하아버지 오시먼 께익 먹으꺼에여엉?"
"어. 점심 먹고 집에 와서 생일 축하하고 먹을 거야"
"빨리 먹으고 시뻐여엉"
소윤이는 오늘도 메모리 게임을 찾았다. 생일이니까. 더욱 기쁘게, 즐겁게. 그러나 역시 한계는 비슷했다. 서너 판 하면 몸이 배배 꼬인다. 뭔가 묘수를 마련해야 할 거 같다. 나를 위해서라도 게임의 변주가 필요하다.
드디어 신림동, 파주 할머니 할아버지를 만났다. 집 근처 식당에서 식사를 했다. 때가 때이니만큼 올해는 우리 가족끼리 보낼까 생각도 했는데 소윤이가 너무 서운해했다. 처치홈스쿨에서 행하는 생일 예배도 엄청 기다렸는데 개강이 미뤄지는 바람에 못하게 돼서 실망이 컸다. 슬쩍 할머니, 할아버지를 부르지 않는 건 어떠냐고 운을 떼봤는데 말도 안 되는 소리라는 표정이 돌아왔다.
식당에서의 자리 배치도 소윤이가 원하는 대로 했다. 소윤이의 요구는 간단했다.
"신림동 할머니랑 파주 할머니 사이에"
소윤이 생일 기념 식사가 시작되었다. 시윤이가 엄청 잘 먹었다. 마치 자기 생일인 것처럼 별로 떠들지도 않고 먹는데 집중했다. 여기저기서 시윤이의 활발한 먹성을 향한 감탄과 찬사가 터져 나왔다.
"어머. 시윤이 좀 봐. 어쩜 저렇게 잘 먹니"
"우와. 시윤이 엄청 잘 먹네"
"시윤아. 그렇게 맛있어? 옳지. 잘 먹네"
소윤이도 엄청 잘 먹었다. 다만 시윤이보다 더 격식 있게, 매너를 갖춰서 얌전히 먹을 뿐이었다. 더 야만적이고 원시적으로 요란스럽게 먹고, 뭘 해도 예쁨을 받는 황금기를 지나는 시윤이가 조금 더 관심을 끌었다. 아내가 굳이 소윤이의 사소한 말과 행동을 집어서 칭찬하는 게 느껴졌다. 나도 소윤이랑 눈이 마주칠 때마다 엄지를 치켜세웠다.
식사를 마친 뒤에는 모두 우리 집으로 왔다. 소윤이와 시윤이를 식탁에 앉히고 생일 축하 의식을 시작했다. 소윤이는 매우 밝은 표정으로 생일 축하 노래를 함께 불렀다. 시윤이도 나란히 앉아 누나의 생일을 축하했다. (사실은 촛불 함께 끄고 싶은 게 더 컸겠지만.) 그래도 소윤이는 다행이다. 이렇게 온전한 생일 축하를 받았으니까. 시윤이의 올해 생일은 그렇지 못할 거다. 롬이가 시윤이 생일보다 먼저 태어날 가능성이 크고, 그럼 모든 관심과 집중이 아무래도 롬이한테 갈 거다. 거기에 시윤이의 1번 사랑인 엄마는 산후 조리로 정신이 없을 거고. 불쌍한 둘째 같으니라고.
모든 의식을 마친 후에는 소윤이와 시윤이의 시간이었다. 이것저것 하면서 놀았는데 백미는 메모리 게임과 보물 찾기였다. 양가 할머니들의 적극적이고 확실한 호응과 참여 덕분에 소윤이와 시윤이에게서 웃음이 끊이지 않았다. 하자고 하는 만큼 군말 없이 다 해주고 "딱 한 판만 더"라고 약속했어도 계속 계약 갱신이 가능하고. 육아에 찌든 엄마, 아빠랑 놀 때하고는 많이 달랐을 거다. 이게 진정한 생일 선물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소윤이의 흥이 무르익을수록 이별의 슬픔도 클까 봐 걱정했는데 의외로 덤덤했다. 워낙 충분히 놀아서 그랬나 보다.
"할머니. 오늘 자고 가여"
자기도 안 되는 거 알면서 장난스럽게 던진 말이었지만 진한 아쉬움이 느껴졌다.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가고 아내는 방에 쓰러져 누웠다. 요 며칠 자주 있는 일이고 앞으로도 흔히 볼 광경이다. 일단 배가 너무 커져서 앉아 있기가 힘드니까 누워 있게 되고 누워 있다 보면 잠이 들게 되고. 사실 육아의 끝자락쯤 가면 나도 지쳐서 꾸벅꾸벅 졸 때가 많다.
애들을 데리고 잠시 밖으로 나왔다.
"아빠. 우리 어디 가는 거에여?"
"소윤아. 우리 엄마 꽃 사러 가자"
"오, 좋아여"
동네 꽃집에 가서 꽃 세 송이를 샀다. 장미 한 송이, 튤립 두 송이.
"소윤아. 시윤아. 집에 가면 엄마한테 '지금까지 키워주셔서 감사합니다'하고 꽃 드려. 알았지?"
"네"
아내는 여전히 자고 있다가 우리가 들어오는 소리에 몸을 움직였다.
"엄마. 지금까지 키워주셔서 감사해여"
"엄마아. 짐까지 껴주셔서 감답니다앙"
역시 아내는 꽃 사줄 맛이 난다. 엄청 좋아했다. 알고 받아도 좋은가 보다.
저녁은 간단히 미역국에 말아서 먹였다. 소윤이는 이렇게 얘기했다.
"벌써 생일이 다 끝났네"
아침에는 이렇게 얘기했었다.
"엄마. 내년 생일이 되려면 1년 기다려야 돼여?"
시윤이는 이렇게 얘기했고.
"엄마아. 내 댕일은 언데에여엉? 그때도 이거 뿡던(풍선) 하자여엉?"
걱정하지 말아라. 아빠가 살아있는 한 너희 생일은 아무리 다닥다닥 붙어 있어도 (롬이가 소윤이와 시윤이 사이에 태어날 가능성이 매우 크다)다 따로따로, 최대한 성의껏 챙겨줄게. 롬이까지도. 너희는 너희를 낳아준 분에게 감사의 마음만 잊지 말도록 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