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09(월)
느지막이 일어나서 밥 먹고 성경 좀 읽다가 책도 좀 읽고, 쉬었다가 기타 치며 노는 내 모습이 정말 여유롭기 짝이 없었다.
"여보. 나 완전 한량이네. 한량이야"
어떻게 보면 소윤이와 시윤이보다도 더 나은 삶이었다. 소윤이와 시윤이는 이것저것 하지 말 것, 해야 할 것 등 제약도 많은데 난 그런 것도 없다. 다시 오지 않을 (정확히는 다시 오면 안 되는) 감사한 하루하루다.
소윤이가 얼마 전부터 저번에 은으로 씌운 이의 잇몸이 아프다고 했다. 처음에는 눈에 보이는 증상은 없어서 미뤘는데 시간이 지나자 염증처럼 부어올랐다. 지난주에 치과에 가보려고 했는데 코로나 때문에 어영부영 미뤘다가 어제저녁에는 부어오른 곳이 하얗게 (마치 고름처럼) 차서 오늘 바로 예약을 잡았다. 가능한 시간이 늦은 오후밖에 없다고 했다.
소윤이의 치과 진료만큼 중요한 일이 하나 더 있었다. 소윤이, 시윤이와 약속한 치킨 먹기였다. 소윤이는 아침부터 이를 재차 언급했다.
"엄마. 오늘 치킨 먹어여?"
아내가 소윤이와 병원에 가고 난 시윤이와 함께 치킨을 사러 가기로 했다.
"시윤아. 엄마랑 누나는 치과 가고 시윤이는 아빠랑 둘이 치킨 사러 가자. 어때?"
"조아여엉"
"괜찮아? 아빠랑 둘이 가도?"
"네. 아빠양 가늠 것도 도아여엉"
소윤이와 아내를 병원에 내려주고 시윤이와 함께 치킨을 사러 갔다. (교회 근처에 있는 치킨집이었다.) 소윤이가 진료를 받는 시간과 치킨을 사 오는 시간이 얼추 맞을 거 같아서 돌아가면서 다시 아내와 소윤이를 태우기로 했다. 아내는 혹시나 진료가 먼저 끝나면 버스를 타고 가겠다고 했다.
"아빠. 천천히 와여"
"왜? 버스 타고 싶어서?"
"네"
"시간은 정해져 있지. 뭐 더 오래 걸리거나 그러지는 않을걸"
"아니. 아빠가 운전을 엄청 천천히 해여. 막힐 때처럼"
소윤이는 나와 시윤이가 늦길 간절히 바랐다.
시윤이는 치킨 사러 가는 길에 고비를 맞았다. 자꾸 잠이 들려고 했다. 운전을 하면서 그것도 내 뒤에 앉은 시윤이를 깨우는 건 매우 어렵다. 응가송도 틀어주고 신호에 걸릴 때마다 괜한 소란을 피우며 시윤이의 잠을 방해했다. 치킨집에 도착할 때까지 겨우겨우 잠드는 것만큼은 막아냈다.
치킨을 기다리고 있는데 아내에게 전화가 왔다.
"어. 여보. 벌써 진료 끝났어?"
"응. 여보는?"
"아직 기다리고 있어. 소윤이는 뭐래?"
"그냥 염증이래"
"그래? 괜찮은 건가"
"음식이 껴서 그렇다고, 양치를 더 자주 하래"
"은니랑은 상관없고?"
"원래 은니를 하면 음식이 잘 끼고 염증이 생기기도 한대"
"그래?"
뭔가 미심쩍었다. 오히려 충치일 때는 멀쩡하다가 치료를 하고 나니 증상이 더 심해진 걸 이해하기 어려웠지만, 당장은 별 방법이 없으니 선생님의 처방과 안내를 따라야 했다. 아내와 소윤이는 버스를 타고 먼저 가겠다고 했다. 시윤이에게도 소식을 전했다.
"시윤아. 누나랑 엄마는 벌써 끝나서 먼저 집에 간대"
"아빠아. 머 따고 가여엉?"
"버스 타고"
"버쯔? 아빠양 나늠 찌꽈 안 가여엉?"
"어. 우리도 바로 집으로 가면 돼"
"아빠아. 나도 뻐쯔 따고 디퍼여엉"
"아, 시윤이도 버스 타고 싶어?"
"네에. 우리도 뻐쯔 따자여엉"
"그건 안 되지. 우리는 차 타고 왔잖아"
"왜여어엉. 나도 따고 디퍼여엉"
"우리도 다음에는 버스 타자"
"언제여엉?"
"나중에"
"나둥에 나도 찌꽈 가 때여엉?"
"어. 그래. 시윤이도 나중에 치과 가면 버스 타자. 아빠랑"
시윤이는 버스를 타지 못하는 걸 매우 아쉬워했다. 덕분에 집에 오는 길에는 졸지 않았다. 차에서 내내 자기도 버스 타고 싶다, 다음에는 꼭 버스 타자 이런 얘기를 하느라 잘 틈이 없었다.
치킨이 우리의 저녁 식사였다. 오늘도 두 마리였다. 양념 한 마리, 프라이드 한 마리. 일단 살코기부터 발라서 소윤이와 시윤이의 그릇에 가득 담아줬다. 소윤이는 내가 발라준 것과는 별개로 닭다리를 하나 잡더니 뜯기 시작했다. 난 양념만 먹었다. 나까지 프라이드를 먹으면 애들 먹을 게 모자랄지도 모르니까. 난 프라이드를 더 좋아하고 나중에는 양념만 먹으니 좀 지겨웠지만 그래도 묵묵히 양념만 집었다. 소윤이와 시윤이는 오늘도 잘 먹기는 했는데 저번처럼 무서운 기세는 아니었다. (저번과 비교해서 그렇다는 거지 지지부진했다는 건 아니다. 또래의 다른 아이가 얼마나 먹는지는 모르겠는데 아무튼 둘 다 많이 먹기는 한다.) 시윤이는 졸리기까지 했다. 남은 치킨의 양으로 비교하면 저번보다 15% 정도 덜먹었다. 두 녀석이 식탁을 떠나고 나서야 프라이드를 집어 들었다.
아내는 소윤이와 시윤이를 곧장 씻겼다. 온 손과 얼굴에 기름기가 가득했기 때문에 바로 씻겨야 했다. 아내가 애들을 씻기는 동안 나는 식탁과 주변을 정리했다.
"아빠. 이제 바로 자야 돼여?"
"아니, 아직 그 정도는 아닌데. 시간이 조금 남긴 했어"
"아빠. 그럼 메모리 게임 할까여?"
"그래. 그러자"
최대한 밝은 얼굴로 조금의 거절감이 느껴지지 않도록 소윤이에게 대답하고는 소윤이가 메모리 카드를 꺼내기 위해 뒷모습을 보였을 때 소파에 앉은 아내에게 속삭였다.
"여보. 하기 싫다"
몸이 먼저 반응했던 걸까. 아니면 시간이 그럴 수밖에 없는 시간이었던 걸까. 메모리 게임을 하다가 졸았다.
"아빠. 아빠 차례에여"
"어. 어"
"아하하하. 아빠 되게 못하네"
"어. 어"
메모리 게임이 아니라 드리밍 게임이었다.
"아빠. 잤어여?"
"어. 아니야. 어. 아빠 차롄가?"
"네. 하세여"
"아빠. 하나 더 뒤집어야져"
"어. 어. 아우"
소윤아, 미안하다. 솔직히 아빠도 모르겠어. 한량 생활이 뭐가 그렇게 피곤한 건지. 어른들 말이 하나도 틀린 게 없다니까. 백수가 제일 바쁘다고. 구차하지만 변을 하자면 아마 너희랑 보내는 시간이 즐겁긴 해도 결코 녹록하지 않다는 말밖에 할 수가 없구나. 아무튼 고의는 아니었다. 꼭 알아줘. 아빠(엄마)는 너희와의 시간을 그저 때우지 않기 위해서 부단히 노력하고 있다는걸. 특히 메모리 게임은 정말 많이 노력하고 있단다. (하아, 이걸 괜히 만들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