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06(금)
어제 자취를 감췄던 메모리 게임은 다시 등장했다.
"아빠. 우리 밥 먹고 메모리 게임 할까여?"
"그럴까? 대신 아빠 설거지 좀 하고"
"아빠. 설거지 오래 걸려여?"
"아니야. 금방 해"
설거지를 하다 보니 배가 아팠다.
"아빠. 설거지 다 끝났어여?"
"어. 그런데 아빠 화장실 좀 갔다가"
"배 아파서여?"
"응. 조금만 기다려"
"안 되는데. 배 아픈 거면 너무 오래 걸리는데"
고의는 아니었지만 어쩌다 보니 자꾸 미루게 된 메모리 게임을 드디어 시작했다.
'진짜 기쁘고 즐겁게 해야지"
오늘도 시윤이가 걸리적거렸다. 사실 시윤이한테 완전한 '플레이어'의 역할을 기대하는 건 무리가 있다. 아직 네 살이니까. 어린 시절, 얼음땡이나 술래잡기를 하면 '깍두기'라는 제도가 있었다. 어떤 이유로든 함께 게임을 하기 어려운 (주로 또래 친구의 동생이거나 친구더라도 조금 지능이 부족한) 친구를 배제하지 않고 함께 놀되, 모든 규칙에서 열외거나 완화된 규칙을 적용하는 거였다. 깍두기는 최소한 '고의적 방해'만 하지 않으면 대부분 배척하지 않았다. 시윤이가 깍두기였다. 물론 마음먹고 하면 두어 개 정도는 제 능력으로 찾아내기도 했지만, 그 마음먹는 게 어려운 네 살이었다. 그렇다고 아예 배제하면 자기는 같이 안 논다고 울음을 터뜨리니까 껴주기는 해야 하고. 그럼 자리에 딱 앉아서 누나와 아빠의 게임을 방해는 하지 말아야 하는데 자꾸 일어나서 돌아다니고 흐름을 끊고 그랬다.
"아, 강시윤. 그러면 시윤이는 하지 마. 그렇게 할 거면 가서 혼자 놀아"
이 한마디에 서러움이 폭발했는지 울음이 터졌다. 시윤이는 작은방에 있던 아내에게 가서 위로를 구했다. 난 크게 신경 써주지 않았다. 소윤이와의 메모리 게임에 집중하고 있다는걸, 소윤이에게도 보여줘야 했다. 그 정도로 굳세게 마음을 먹고 임했는데 한계치는 서너 게임이었다.
메모리 게임을 서너 판 하고 나니까 막 좀이 쑤시고 갑자기 막 소리를 지르고 싶고 그랬다. 아무 이유 없이 '이제 그만하자'라고 하면 안 되니까 뭔가 합당한 명분을 찾았는데 쉽지 않았다.
아내는 거의 하루 내내 작은방의 옷을 정리했다. 누군가 한 명이 무언가에 집중하고 있을 때, 특히 그 일이 가족 모두를 위한 '공적 업무'라면 더더욱, 나머지 한 명은 아이들을 전담해야 한다. 아내가 열심히 작은방을 치우는 동안 아이들하고 씨름했다. 물론 함께 있는 시간 동안 내내 같이 뭘 하거나 논 건 아니었다. 다만 중간중간 발생하는 크고 작은 민원을 모두 홀로 처리해야 하는 부담이 생긴다.
오후가 되자 소윤이와 시윤이가 요즘 매일 빼먹지 않는, 필수 질문을 던졌다.
"아빠. 우리 오늘 어디라도 나갈 거에여?"
내가 더 그러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러던 차에 친구에게 연락이 왔다. 밤에 잠깐 볼 수 있겠느냐는 거였다. 연락만으로도 숨통이 트이는 느낌이었다. 잠정적으로 (아내의 최종 재가가 필요하니 단정 짓지는 않았다) 약속 시간을 정하고 아내에게 얘기했다. 아내는 당연히 그러라고 했다. 나의 외출이 예정됨과 동시에 기회를 상실한 아이들을 위해 오후에 잠깐 편의점에 데리고 갔다. 아이스크림을 하나씩 사줬다. 미리 양해를 구했다. 오늘은 이 정도의 외출밖에 안 된다고.
아내는 요즘 급격히 힘겨워졌다. 배가 많이 부르기도 했고 출산이 다가와서 그런지 호흡도 가빠지고, 앉는 것도 서는 것도 눕는 것도 어느 자세도 불편함이 심해졌다. 조금만 움직여도 금방 헉헉댔다. 오늘도 옷 정리를 하느라 체력을 이미 많이 소모했다. 그래서 좀 미안하긴 했는데 그래도 뭐 하루 종일 같이 있다가 애들 잘 시간 거의 다 돼서 잠깐 나가는 거니까 괜찮겠지라고 자기 최면을 걸었다.
내일은 소윤이 생일이다. 간단하게라도 집에 꾸밀 게 필요했다. 친구와 약속이 잡히기 전에는 아내에게 다녀오라고 할까 싶었다. 잠깐이나마 바람이라도 쐬라는 뜻이었다. 친구와 만나기로 하고 나서는 시간이 빠듯해서 내가 가야 했다. 약속 시간보다 조금 빠르게 집에서 나왔다. 아이들은 장난 반 진담 반으로 가지 말라며 나를 붙잡았다. 아내는 작은방에 앉아 있었다. 피곤하거나 지쳤을 때 나오는 아내 특유의 어떤 '쌀쌀맞음' 같은 게 느껴졌다. 막 화를 내는 것도 아니고, 엄청 차가운 것도 아니고, 신경질을 내는 것도 아닌데 분명히 뭔가 씁쓸한 맛이 느껴지는 오묘한 무언가가 있다. 내 아내랑 살아보면 느껴지는.
'옷 정리하느라 피곤했나 보다'
'이제 진짜 배가 많이 불러서 피곤한가 보다'
라고 생각하며 크게 신경 쓰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아내는 애들 저녁먹이고 나서 잠깐 밖에 나갔다 온다고 했다. 내일 아침에 소윤이 생일상을 차릴 재료를 사러 간다고 했다.
친구와의 만남을 마치고 집에 돌아왔다. 가스레인지 위에는 미역국이 끓고 있었고 아내는 매우 지친 표정으로 식탁에 앉아 있었다. 졸려 보이기도 했다. 집에서 나갈 때 느껴졌던 특유의 그 느낌이 여전히 느껴졌다. 아내는 내가 나가고 난 뒤의 시간이 녹록지 않았다고 얘기했다. 특별한 사건이 있거나 그런 건 아니고 그저 일상이었다. 이제 그것도 버거운 만삭 임산부가 된 거다. 대신 오늘은 거기에 소윤이 생일상 준비한다고 애들 재우고 나서도 이것저것 한 게 많았다. 거창한 생일상은 절대 아니었다. 미역국과 아주 간단한 반찬 몇 가지 정도였지만 이제 그마저도 버거운 만삭의 임산부가 된 거다. 거기에 오늘은 아예 바깥에 나가지도 못했고.
나도 손만 씻고 바로 투입됐다. 아내가 볶던 미역을 이어 받았다. 순간적으로 뇌에서 짜증이 감지됐다. 뭔가 유쾌하지 않은 아내의 모습을 보니 친구랑 만나고 온 게 뭔가 잘못한 거 같고 들어오자마자 기계처럼 알아서 기는 내 모습도 싫고. 이런 건 깊게 곱씹으면 안 된다. 그냥 무념무상이 좋다.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 소리를 들은 아내가 물었다.
"왜? 무슨 일 있어?"
"아니야. 그냥 숨 쉰 거야"
아내가 자주 하는 대답을 차용했다. 점점 옅어지고 투명해지는 미역이 많아지는 걸 보며 쾌감을 느끼기 위해 노력했다.
아주 약식이지만 소윤이 생일을 축하하기 위한 장식을 했다. 풍선 몇 개 불고, 소윤이 첫돌 때부터 써먹은 [HAPPY BIRTHDAY] 글자도 붙이고. 아침에 그걸 보고 놀라며 기뻐할 소윤이를 생각하니 뿌듯했다. 오늘도 얼마나 기대를 하던지.
"엄마. 내일 나 생일이져?"
"엄마. 내일 어떤 풍선으로 장식할 거에여?"
"엄마. 저 자고 있을 때 장식할 거에여?"
계속 질문했다.
모든 걸 마치고 아내가 먼저 자러 들어갔는데 아내가 갑자기 다급하게 날 불렀다.
"여보. 여보. 시윤이 피 나"
"뭐? 어디? 어디?"
놀라서 방으로 가 보니 시윤이의 베개와 이불, 옷에 피가 묻어 있었다. 손과 얼굴에도 피의 흔적이 보였다. 흘린지 좀 된 듯했다. 자세히 살펴 보니 한쪽 코 안에 굳은 피와 코딱지가 보였다. 혼자 굴러다니다가 어디 부딪히거나 소윤이의 발길질이나 팔질에 맞았거나 아니면 잠결에 코를 파다가 그러지 않았을까 싶었다. 엄청 많이 흘린 건 아니었지만 여기저기 묻었다. 각종 얼룩 제거의 장인인 아내는 즉시 이불에 묻은 핏자국을 지우는 초기 작업을 시작했다. 난 시윤이를 데리고 화장실에 가서 손과 얼굴을 씻겼다. 소란스러움에 소윤이도 눈을 떴다. 소윤이는 거실에 나와서 자기 생일을 기념하기 위해 마련된 장식도 봤다.
"아, 내일 아침에 소윤이 깜짝 놀라게 해주려고 했는데 먼저 봤네"
"아빠. 그래도 좋아여. 엄청 좋아여"
그래 봐야 고작 풍선 몇 개인데 정말 엄청 좋아했다. 자면서도 내일 아침을 기대하는 게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