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18(수)
정말 신기하다. 알람이 울리는 시간에 맞춰서(정확히는 5분 전쯤) 시윤이가 움직인다. 침대로 스물스물 기어올라서 자기 나름대로는 양심을 발휘하는 건지 꼭 아내와 나의 다리 쪽에 가서 자리를 잡는다. 시윤이가 잠들어 있는 상태가 아니라는 걸 알았지만 급히 알람을 끄고 방에서 나왔다. 혹시 다시 잘 지도 모르니까. 아침에 애들 보고 가면 나야 좋지만 애들이 너무 피곤하고, 피곤한 애들은 육아의 강도를 상승시키니 쭉 자면 좋겠지만, 아직 첫 주라 그런지 기어코 일어난다.
시윤이는 아내의 알람이 울렸을 때 혼자, 먼저 나왔다.
"시윤아. 잘 잤어?"
"네에"
"엄마는?"
"엄마늠 일어났는데 아딕 다구 이떠여엉"
"시윤이는 왜 나왔어, 더 자지"
"시더여엉"
"다시 들어가서 자. 너무 피곤하잖아"
"아아이이, 시더여엉"
그럴 리가 없지. 소윤이는 내가 집에서 나가기 5분 전에 방에서 나왔다. 아내가 방문을 열었더니 매트리스에 누워서 잠과 사투를 벌이고 있었다. 아빠 얼굴을 보려면 나가야 하는데 몸은 피곤하고, 그런 상황이었나 보다.
"소윤아. 내일부터는 아침에 그냥 자. 아빠 보려고 일찍 깨지 말고"
"싫어여. 그러면 하루 종일 못 보잖아여"
아침을 먹고 있는 소윤이와 시윤이 사진이 카톡으로 왔다. 아내가 직접 만든 사과잼과 토스트가 오늘의 아침 식사였다. 오후에는 셋(아내, 소윤, 시윤)이 누워서 찍은 사진도 왔다. 깊어진 그리움을 일하는 중간중간 사진을 보며 달래는 것도 나름의 재미라면 재미다.
일하면서 딱 한 번 통화했다. 시윤이가 집에서 놀다가 넘어졌는데, 뾰족한 색연필에 엉덩이를 찔렸다고 했다. 너무너무 심하게 울면서 아프다고 하길래 걱정이 돼서 엉덩이를 봤더니 똥구멍 바로 위쪽, 그러니까 엉덩이 골이 갈라지는 지점쯤에 찍힌 자국이 났다고 했다. 다행히 상처가 나거나 피가 보이지는 않았는데 시윤이는 많이 아팠는지 한참 안겨서 울었다고 했다.
퇴근하는 길에 카페에 들러 아내의 커피를 샀다. 어제부터 남이 만들어 주는 에스프레소 맛 진한 커피가 먹고 싶다고 했다. 집에 도착했을 때는 열심히 저녁을 만드는 중이었기 때문에 일단 냉장고에 넣어 놨다. (이런 상황을 대비해서 얼음을 뺀 아이스바닐라라떼를 샀다.)
"여보. 미안 저녁을 못 먹였네"
아내는 내가 퇴근하고 최대한 육아와 집안일에서 자유롭게 하려고 애를 쓴다. 안 그래도 되니까 그냥 여유 있게 하라고 하는데도 양 볼이 발개지도록 열심을 낸다. 물론 빠른 육아 퇴근은 아내에게도 좋은 일이지만, 아내는 본인은 퇴근하고 나는 출근하는 상황을 만들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거다. 의 좋은 형제다. 나는 아내한테 내가 할 테니 그냥 두라고 하고, 아내는 괜찮다며 어떻게든 자기가 하려고 하고. 이렇게 써 놓으니 사이좋은 부부처럼 보이겠지만, 맞다. 굉장히 사이좋은 부부다. '당연히'는 없애고 '감사히'만 남기려고 노력하고 있다. 당연함은 육아의 적이다.
소윤이는 물론이고 시윤이도 김치찜을 아주 잘 먹었다. 시윤이한테는 최대한 매운 국물이 묻지 않은 고기를 골라주기는 했어도 매운맛이 났을 텐데, 그래도 잘 먹었다. 소윤이는 특별한 추가 공정 없이 아내나 나하고 똑같이 먹었다. 시윤이는 매운 것보다 졸린 것 때문에 고생이었다. 꾸역꾸역 저녁은 먹었는데 다 먹고 나니 피곤이 몰려왔나 보다. (내가 퇴근하기 직전에도 한 번 최대치를 찍었다고 했다.)
"시윤아, 씻자. 이리 와"
"하아아아. 지겹다아앙"
"뭐가 지겨워, 힘든 거겠지. 졸려?"
"네에"
"그래도 씻어야지"
"하아아아. 실타아아아"
"얼른. 그래야 씻고 아빠랑 좀 놀지"
"하아아아"
많이 피곤해 보이긴 했다. 일단 소윤이부터 씻겼다. 누나까지 씻고 나니 피할 데가 없다는 걸 알았는지 온몸을 쥐어짜며 화장실로 걸어왔다.
"시윤아. 너무 졸려?"
"네에. 눈물이 난다앙"
"너무 졸려서?"
"네"
자기 전에 메모리 게임 두 판, 보물 찾기 두 판, 책 한 권을 읽기로 했다. 시윤이는 졸리다더니 갑자기 팔딱거렸다. 애나 어른이나 놀 때는 힘이 나나 보다. 난 메모리 게임을 정말 열심히 했다. 여기서 열심히라는 건 같은 짝을 찾기 위한 열심이 아니라, 소윤이와 시윤이의 만족을 위한 열심이었다는 말이다. 과장된 몸짓과 좀 더 높은 음성, 선명한 기쁨과 슬픔의 표현 등을 구사했다. 보물 찾기도 마찬가지였고, 책 읽기도 마찬가지였다. 시간이 늦어서 그렇지 애들이랑 보내는 시간은 정말 얼마 안 된다. 양은 확보하는 게 어려우니 질이라도 보장하려는 거다. 열 덩이도 먹겠다 싶을 정도로 아담한 크기지만 질이 너무 훌륭해서 충분히 만족스러운 고가의 스테이크(...먹어 본 적이 별로 없...)같은 육아다. 애들은 다 안다. 양이든 질이든 엄마와 아빠가 갖고 있고, 전하려는 마음이 뭔지. 일하는 엄마, 아빠들이여 힘을 내라. 10분이어도 진심을 쏟으면 투 플러스 한우가 된다.
어제 '눈물의 치실' 사건(?)이 뇌리에 깊게 박혔다. 물론 아내는 조금도 나를 원망하지 않았지만 미안했다. 오늘은 각별히 노력했다. '난 잘 못한다'는 이유로 아내에게 미루던 치실질도 내가 했다. 소윤이의 이에서 고기를 많이 빼냈다. 역시 못 해서 안 하는 게 아니라 안 해서 못 한다는 말이 맞는 건가.
아내는 애들을 재우고 나왔다. 잠들지 않고 나왔다. 그렇게 힘들고 피곤한데 꼬박꼬박 나오는 걸 보면 고요함 속에 누리는 밤의 자유가 많이 달콤하긴 한가 보다. 거기에 오늘은 커피까지 있고.
빨리 거실에 가서 아내랑 놀아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