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09(목)
소윤이와 시윤이를 파주에서 데리고 오기 위해서 아침 일찍 병원에서 나왔다. 소윤이와 시윤이는 이미 준비를 마치고 기다리고 있었다. 평소 같았으면 할머니 집을 떠나는 아쉬움이 가득할 텐데 오늘은 전혀 그래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엄마와 롬이를 만날 생각에 들떴다. 소윤이는 롬이와 엄마를 향한 그리움과 기대를 계속 얘기했고 시윤이는 이것저것 자기에게 있었던 일,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 등을 매우 풍성한 말투와 몸짓과 함께 말했다.
"소윤아, 시윤아. 집에 가는 거 좋아?"
"네. 그럼여"
"왜? 할머니 집이 더 좋지 않아?"
"아니여. 집이 제일 편하져"
소윤이, 시윤이와 롬이의 첫 만남은 병원에서 이뤄졌다. 내가 애들을 데리러 갔다 오는 동안 아내는 퇴원 수속을 밟았다. 남편만 출입이 가능하기 때문에 애들을 데리고 올라가서 도와줄 수가 없었다. 1층에서 아내와 롬이를 기다렸다.
"아빠. 엄마랑 롬이 왜 이렇게 안 와여?"
"그러게. 오래 걸리나 보다"
한참 앉아서 기다린 끝에 드디어 아내와 롬이가 등장했다. 소윤이와 시윤이는 곧장 롬이에게 달라붙었다. 겉싸개에 쌓인, 인형같이 작은 생명체를 향한 관심이 엄청났다. 아내는 안중에도 없었다. 10개월 동안 엄마 뱃속에 숨어 있던 동생을 처음 보는 날이니 그럴 만도 했다. 특히 소윤이는 눈을 떼지 못했다.
소윤이와 약속한 대로 아내와 롬이를 환영하기 위해 꾸민 집을 먼저 사진으로 보여주지 않았었다. 덕분에 문을 연 아내는 진심으로 감동받은 듯했다. 마음이 마시멜로처럼 말랑말랑해진 상태라 더 그랬을 거다. 허접하지만 진심이 가득한 환영 장식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었다. 본격 5인 체제 가동 기념사진.
소윤이는 롬이 곁을 떠나지를 못했다. 사람의 마음은 갈대니 언제 어떻게 변할지 모르지만 당장의 모습만 봐서는 우리 가운데 가장 뜨거운 사랑이다. 어쩔 줄 몰라 했다. 그래, 이게 정확한 표현이다. 꼬물거리는 동생을 향해 끓어오르는 사랑을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듯했다. 사랑은 넘치는데 만져서도 안 되고 너무 가까이 가서도 안 되고. 시윤이도 롬이를 예뻐하는 게 느껴지긴 했지만 누나만큼은 아니었다.
장모님이 싸 주신 반찬으로 점심을 차렸다. 온 가족이 앉아 식사를 시작한 지 한 3분쯤 지났을 때.
"으에에에엥. 으에에에엥"
난 소윤이 아기 인형의 소리인 줄 알았다. 롬이의 울음소리일 거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사실 롬이가 소파에 누워 있다는 사실조차 잊을 뻔했다. 아내는 식사에 시동을 걸기도 전에 숟가락을 내려놓고 롬이에게 갔다. 소파에 앉아 수유를 시작했다.
'아, 진짜 시작이구나'
잠시(?) 잊고 지내던 초기 육아의 고난이 신경 세포 구석구석 되살아나는 느낌이었다. 롬이는 꽤 오래 젖을 먹었다. 수유를 마친 아내가 나에게 얘기했다.
"여보. 손수건 대고 롬이 좀 안아줘"
"어? 손수건? 어디에?"
"다 까먹었어? 트림 좀 시켜야지"
"아, 맞다. 어깨에?"
"응. 트림 안 해도 돼"
"괜찮아?"
"응. 안 해도 상관없어"
소윤이는 날 부러운 눈빛으로 바라봤다.
'롬이를 안을 수 있는 특권을 가졌다니'
이런 눈빛. 아빠는 너에게 모두 양도하고 싶구나. 이 특권.
시윤이가 졸려 보였다. 낮잠 좀 자자고 했더니 습관성 아니오 증후군 증세를 보였다. 나도 엄청 졸렸다. 마침 아내가 먼저 "아빠랑 한숨 자"라고 하길래 나도 거들었다.
"그래, 시윤아. 아빠랑 한숨 자자. 오늘은 아빠도 시윤이랑 계속 같이 잘게. 중간에 안 나가고"
시윤이는 그게 정말이냐는 표정으로 날 쳐다봤다.
"시윤아. 한숨 잘까? 아빠랑?"
"네에. 달래여엉"
자러 들어가려고 하는데 아내가 날 다급히 불렀다.
"어, 여보. 여보"
"어. 왜? 왜?"
"롬이 똥 쌌다"
"아, 진짜?"
"여보가 좀 닦아줘"
"아, 내가? 이번만 여보가 닦으면 안 돼?"
"난 팔에 힘이 안 들어가서"
"아, 물로 닦아야 되나?"
"그렇지"
"아, 그렇구나. 알았어. 그런데 어떻게 닦아?"
"글쎄. 이렇게 한 팔에 걸쳐서"
"아, 그렇게?"
2학기가 끝나갈 때쯤 펼쳐본 1학기 중간고사 시험 범위처럼 기억이 가물가물했다. 무엇보다 애가 너무 작아서 조금만 힘을 줘도 부러질 거 같았다. 소윤이와 시윤이를 키우며 악한 의도를 품지 않는 이상 그런 일을 거의 없다는 걸 배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무 작았다. 살짝만 삐끗해도 떨어뜨릴 것만 같았다. 끔찍한 상상은 집어치우고 조심스레 롬이를 팔에 걸쳤다. 나머지 손으로 엉덩이를 닦아줬다. 오랜만에 보는 황금빛 똥이었다. 속세의 때가 많이 묻은 소윤이와 시윤이의 그것만 보다가 밝고 맑은 황금색을 보니 신기했다.
임무를 마치고 시윤이와 방에 들어갔다. 기저귀를 갈더니 상쾌했는지 잠든 롬이도 아기 침대에 눕혔다. 소윤이는 밖에서 롬이랑 놀고 싶은데 방에 눕힌다고 하니 아쉬움이 가득했다.
"소윤아. 엄마랑 시간 좀 보내. 쿠키도 먹고"
소윤이와 아내를 내보내고 시윤이와 침대에 누웠다. 시윤이는 오랜만이라 그런 건지 애교가 가득했다.
"아빠아. 나양 얘기하다 자자여엉"
내 두 손을 모두 잡고 다정하게 얘기했다. 물론 우리는 아무 얘기도 나누지 못했다. 그러기에는 둘 다 너무 졸렸다. 달콤하게 자고 나서 정신이 들락말락 할 때쯤 방문이 열렸다. 아내와 소윤이가 들어왔다.
"여보. 잘 잤어?"
"어. 얼마나 잤지"
"두 시간 정도?"
"진짜? 그렇게 많이?"
시윤이도 기분이 좋아 보였다. 소윤이는 나와 시윤이가 자는 동안 롬이를 오매불망 기다렸다고 했다. 왜 이렇게 오래 자는 거냐, 이제 들어가서 깨우면 안 되냐, 계속 자냐 등의 질문을 끊임없이 던지며 롬이가 깨기를 간절히 빌었다고 했다.
롬이는 수시로 먹었다. 이 정도로 자주 먹었나 싶을 정도로.
"여보. 원래 이렇게 자주 먹어? 아니면 롬이가 그런 편인 거야?"
"처음에는 다 이렇지"
"아, 그런 거야?"
앉으나 서나 수유, 뒤돌아서면 수유, 밤낮없이 수유. 밤이 두려웠다. 나보다 아내가 백배, 천배는 더 고생이지만 나도 자유로울 수는 없었다. 아내 대신할 수 있는 건 없지만 그렇다고 자빠져 자기만 하는 건 너무 부담스러우니까.
소윤이, 시윤이 하고는 자연 다큐를 하나 보기로 했다. 지구의 동물에 관한 건데 아내가 괜찮을 거 같다면서 예전부터 찜해 둔 거였다. 롬이 낳기 전에 다 함께 보려고 했는데 시간이 안 돼서 못 봤다. 그걸 오늘 보기로 했다. 아내는 방에 들어가서 좀 눕겠다고 했다.
나와 소윤이, 시윤이는 다큐를 보고 아내는 방에 들어가서 누운지 한 5분도 안 되었을 때 롬이 울음소리가 들렸다. 잠깐 들리다 말길래 다행히 다시 잠들었을 거라고 생각했다. 소윤이와 시윤이는 다큐를 아주 재밌게 시청했다. 궁금한 걸 계속 질문해 가며 집중을 했다. 시윤이는 과장과 익살을 바탕으로 한 화법, 소윤이는 그런 시윤이를 '철이 덜 들었네'하는 표정으로 바라보면서 차분히. 아무튼 끝까지 즐겁게 봤다.
다큐가 거의 끝났을 때 아내가 문을 열고 나왔다.
"왜 벌써 나와? 더 자지"
"응? 나 지금까지 수유했어"
"아, 그런 거야? 엄청 오래 했네?"
"그런가?"
아내는 잠시 앉았다가 다시 방으로 들어갔다. 어느새 저녁 시간이 되어서 애들 저녁을 먼저 차려줬다. 저녁 먹으면서 한 번 더 물어봤다.
"소윤아. 소윤이는 집에서 자는 게 더 좋아?"
"네. 집이 제일 편해여"
"시윤이는?"
"아빠아. 저늠 딥이 데일 도아여엉"
심지어 소윤이는 내일 신림동에 가는 걸 아쉬워했다.
"소윤아. 그럼 내일 신림동 할머니 집에 가는 것도 별로 안 좋아?"
"네"
"진짜?"
"롬이를 못 보잖아여"
오랜만에 (그래 봐야 일주일도 안 됐지만) 쉴 틈 없이 빡빡한 육아와 집안일의 연속이었다. 매우 고됐다. 모든 준비를 마치고 자러 들어가기 전에 소윤이와 시윤이를 세워 놓고 새로운 주의 사항을 일러줬다.
"소윤아, 시윤아. 오늘부터는 방에 들어가서 소리 내면 안 되고 바로 자야 돼. 그리고 이제 엄마가 재워줄지 아빠가 재워줄지 몰라. 롬이가 언제 깨고 잘지 모르니까 엄마는 거기에 맞춰야 하거든. 알았지?"
"네"
"그리고 너희 잘 때까지 못 기다리고 엄청 빨리 나올지도 모르고"
소윤이는 눕자마자 잠들었고 나와 함께 거나하게 낮잠을 잔 시윤이는 아니었다. 아기 침대에 누워 있던 롬이가 울기 시작했다. 아내가 들어와서 롬이를 데리고 나갔고 나도 시윤이에게 인사를 건네고 나왔다.
"시윤아. 아빠 나갈게"
"네"
"시윤이도 얼른 자. 알았지?"
"네"
소윤이와 시윤이를 재우고 나오면 퇴근이었는데 이제는 아니다. 롬이가 떡하니 버티고 있었다. 그래도 나는 양반이다. 아내는 출근도 퇴근도 없는 삶이 시작됐다. 어제까지만 해도 조금의 낭만이 있었는데 하루 만에 너무 처절한 현실이 되었다. 잠과 깸의 구분이 무의미해진 아내가 안쓰러웠다. 세 번째여도 너무 오랜만이라 몸과 마음이 적응할 시간이 필요하다.
힘내야 한다. 아내도 나도. 애들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