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15(수)
대학생 시절에 황학동에 있는 이마트의 프로스펙스 매장에서 판매 알바를 했던 적이 있다. 일주일에 이틀이었고 저녁에 가서 마감까지 해야 했다. 사장님은 없이 나 혼자. 프로스펙스는 내가 초등학생 때 위용을 떨치던 브랜드였고 당시에는 막 워킹화 라인을 출시해서 다시 과거의 위상을 회복할랑 말랑하는 때였다. 운동화나 운동복을 사러 굳이 프로스펙스를 찾아오는 손님이 많을 리 없었다. 게다가 마트 자체에 손님이 엄청 없었다. 손님이 없으니 바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힘들지 않은 건 아니었다. 내내 서 있어야 했고 손님이 많지는 않았어도 드문드문 오기는 했다. 마이너 브랜드 제품을 어떻게든 팔아 보려고 열심을 내기도 했고. 아무튼 나름대로 고되긴 했다. (우와. 그러고 보니 이때 아내랑 사귈랑 말랑할 때였다. 그때는 없던 용어지만 소개팅하고 나서 '썸'타는 기간이었다. 그때는 썸 탔고 지금은 분유 탔...)
당시 사장님은 프로스펙스를 떠나 다른 곳에 스케처스를 개업하게 됐다며 다음 점장에게 나를 추천했고 그분도 동의했다고 했다. 난 나가지 않았다. 잠시 쉬다 다른 아르바이트를 찾았는데 선릉역에 있는 이디야의 점원이었다. 무수히 많은 고층 빌딩과 그 사이를 바쁘게 오가는 정장 남녀들이 가득한 어느 곳에 위치한 작은 곳이었다. 마찬가지로 일주일에 이틀, 아침 10시부터 오후 8시까지. 프로스펙스 하고는 다른 양상이었다. 점심시간에 어마어마하게 손님이 몰아쳤다. 12시부터 2시까지 하루 매출의 90% 이상이 몰렸다. 정신없이 주문받고 커피 만들고. 숨 쉴 틈 없이 바빴다. 당연히 힘들었고.
소윤이랑 시윤이가 집에 돌아왔다. 소윤이와 시윤이가 없을 때의 육아가 꼭 프로스펙스 아르바이트 같았다. 뭔가 엄청 바쁜 건 아닌데 나름대로 힘들긴 하다(철저히 내 기준이다. 아내는 다르다. 아내는 24시간이 모자랄 정도로 수유 또 수유. 수유리로 이사 가야 할 판). 소윤이와 시윤이가 함께하는 육아가 꼭 이디야 아르바이트 같다. 밀도가 무지하게 높다. 피로도는 급격하게 증가하고.
6년간 많이 느꼈지만 오늘 하루 만에 새삼 또 느꼈다.
(내) 엄마와 아빠가 소윤이, 시윤이를 데려다주셨다. 괜히 시윤이에게 마음이 쓰였다. 시윤이의 마음을 정확히 읽기도 힘들고 대화로 파악하기도 좀 힘들지만 서윤이의 등장이 마냥 즐겁지만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거기에 (내) 엄마는 첫 손주인 소윤이에 대한 애정과 집중이 좀 두드러지는 편이고 (그렇다고 시윤이에게 쌀쌀맞게 굴거나 그러는 건 절대 아니지만. 내가 치킨은 다 좋아하지만 그래도 양념보다는 후라이드를 더 좋아하는 그런 느낌이랑 비슷하달까) 아빠는 시윤이가 너무 귀여워서 막 울고 떼쓰고 그러는 걸 봐도 웃기 바쁘시고. 아무튼 (내) 엄마네 집에서 지내는 동안 엄마가 보내준 시윤이가 떼쓰는 동영상 속의 시윤이는 속상해 보였다. 아무도 자기 마음을 몰라준다는 느낌이었다. (떨어져 있는 그리움이 왜곡된 해석을 유발했을지도 모르지만)
소윤이가 너무 빤히 알아차리지 못하도록 은근하게 시윤이를 챙겼다. 더 받아주고 더 세워주고. 사실 둘 다 엄청 반가웠다. 여러모로. 소윤이랑 시윤이도 할머니, 할아버지와의 이별이 크게 아쉽지는 않아 보였다.
"소윤아. 안 아쉬워? 할머니, 할아버지 집에서 못 자는데?"
"네. 그럼여. 롬이를 계속 볼 수 있잖아여. 실컷"
"시윤이도?"
"네. 딥이 도아여엉"
엄마와 아빠는 마지막까지 손주 육아를 위해 하얗게 불태우고 가셨다.
엄마와 아빠가 가시고 저녁에 잠깐 애들을 데리고 밖에 나갔다. 오랜만에 만난 기념으로 과자도 사고 바람도 쐴 목적이었다. 그때 느꼈다. 든든했다. 두 녀석의 손을 잡고 걸어가는데 그 오묘한 든든함이 느껴졌다. 과자도 사고 꽈배기도 사고 아내의 저녁 반찬으로 줄 돈까스도 샀다.
"소윤아. 아빠는 소윤이랑 시윤이 보니까 엄청 반갑네"
"왜여?"
"왜긴. 오래 못 봤으니까"
"저도 그래여"
"아빠는 엄청 든든하네"
"누가여? 우리가여?"
"응. 소윤이랑 시윤이 만나니까 든든한데?"
참 신기한 게 이 조그만 녀석들 키우면서 꽤 자주 느끼는 감정이 든든함이다. 부양가족이니 먹여 살려야 할 막중한 책임이 있지만 부양할 가족이 있으니 다행스러운 느낌을 뭐라 설명해야 할까.
점심을 매우 늦은 시간에 애매하게 먹어서 애들 저녁은 밥 대신 특식을 제공했다. 돈까스, 꽈배기. 후식으로 과자. 소윤이와 시윤이가 오니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서윤이가 잠이 많은 덕분에 고요한 시간이 꽤 많았는데 둘이 등장하니 시끌벅적했다.
"아오. 정신없다"
소리가 절로 나왔다. 식탁에 앉아 장난을 치며 과자를 먹는 소윤이와 시윤이를 보고 아내가 말했다.
"여보. 안정감이 있다"
"그치? 진짜 그러네"
맞다. 그거였다. 새벽같이 나와서 일하고, 밤이 꼴딱 새우도록 일하고, 휴일에도 나와서 일하고, 휴가도 반납하고 일하면서 '난 일하는 게 편해'라고 말하는 일중독 부장님들처럼 육아에 잘못 중독됐는지는 모르지만 정신없이 떠들고 조잘대는 애들을 보니 마음의 안정이 찾아오긴 했다.
물론 고됐다. 딱히 이유도 없이. 소윤이랑 시윤이가 특별히 힘들게 한 것도 아니었다. 말도 잘 듣고 잘 웃고 그랬다. 그렇지만 힘들어졌다. 손이 많이 가고 일이 많아진 건 사실이니까.
없을 때는 프로스펙스, 등장하니 이디야.
가끔 셋 데리고 어딘가를 돌아다녀야 하는 상상을 하면 (아기띠로 서윤이 안고 유모차도 끌면서 킥보드 타고 질주하려는 소윤이, 시윤이 통제하면서 아기띠 한 채로 서서 꾸역꾸역 밥 먹어가며 소윤이, 시윤이도 봐 주고 정신이 없어도 이렇게 없나 싶을 정도로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고전하는 나 혹은 아내의 모습을 떠올리면) 가끔 숨이 턱턱 막히기도 하지만 애 셋이 함께 있으니 뭔가 제자리를 찾은 느낌이다. (물론 아내는 아닐지도 모른다. 철저히 내 위주의 일기)
애들 재우고 남은 집안일과 정리를 하다가 쌀을 쏟았을 때는 어디 공터에 가서 쌍욕을 하면서 크게 소리치고 싶었다.
"으아아아아아아아아. 이런 ㅆ@#$!#$ㅆ!@#$!@#$ㅎㅂ!@#$!#@$!@#$!"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게 원래 내 옷인 듯 편안한 이 느낌은 뭐지.
육아홀릭 됐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