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17(금)
한동안 우리 집에서 사라졌던 낮잠 시련이 돌아왔다. 시윤이와 서윤이를 재우며 부족한 잠을 보충하려던 아내의 계획은 소윤이 때문에 무산이 됐나 보다. 대체 졸린데 왜 안 자려고 하는 거냐며, 마음을 지키기가 힘들다는 아내의 카톡이 왔다.
아내는 현재 만성 수면 부족에 시달리고 있으니 그게 언제든 잠의 기회를 박탈당했을 때 예민해질 수밖에 없다. 거기에 셋 중 둘을 재웠다면 기대는 더욱 컸겠지. 실망도 컸지만. 아내 입장에서는 함께 자라고 한 것도 아니고 그저 동생들 재울 때 조용히 하고 엄마(아내)의 낮잠을 방해하지만 말라는, 소윤이 친화적인 조건에도 불구하고 이행하지 않는 소윤이가 야속했을 거다.
그 후에 어떻게 됐는지는 듣지 못했다. 대신 아내가 카톡을 하나 보냈다.
[여보 시윤이 두 시간째 자고 있음]
나도 답장을 보냈다.
[여보. 나 오늘 그냥 회사에서 야근하고 가도 될까?]
이때 이미 내려놨다. 내 마음을.
퇴근하면 밥 먹고 애들 데리고 잠깐이라도 나갔다 와야겠다고 생각했다. 시윤이가 두 시간이나 잔 것도 큰 이유였고 하루 종일 밖으로 나가지 못한 소윤이와 시윤이가 안쓰럽기도 했다. 아내에게 두 녀석으로부터 잠깐이나마 해방(?)되는 시간을 주기 위한 것도 있었다.
시윤이는 어제와는 다른 사람이었다. 진짜 그랬다. 다른 인격이었다. 수다스럽고 장난기 많고. 짜증은 없고 울음도 없고. 그런 시윤이를 보며 아내는 결의를 다졌다.
"내일부터는 꼭 재워야지"
저녁을 먹고 나서 소윤이와 시윤이에게 깜짝 제안을 했다.
"소윤아, 시윤아. 밥 먹고 밖에 나갔다 올까?"
"왜여?"
"그냥 소윤이, 시윤이 색종이도 살 겸"
"으잉?"
소윤이와 시윤이가 색종이가 필요하다는 걸 아내가 미리 알려줬다. 난 아이들의 마음까지 읽어낸 신통방통한 아빠가 되었고.
시윤이가 나에게 물었다.
"아빠아. 끽뽀드 따고 가도 대여엉?"
"안 돼. 너무 어두워서"
시윤이는 서운하다는 듯 미련을 보였다. 낮에 비하면 밤이 위험하지만 그렇다고 또 못 탈것도 아니었다.
"그래. 시윤아. 타고 가"
어제, 오늘 부쩍 얼굴이 수척해진 아내와 롬이를 남겨두고 집에서 나왔다. 안타깝게도 색종이를 사려던 문구점이 문을 닫은 뒤였다. 색종이는 애초에 목적이 아니었다. 오히려 명분이었다.
"아빠. 이제 어디 가여? 바로 집에 가여?"
"아니. 저기 광장에 가서 좀 놀다가 가자"
소윤이와 시윤이는 힘차게 땅을 차며 킥보드를 탔다. 소윤이는 자꾸 나에게 함께 놀자고 했다. 같은 공간에 있었는데도 그랬다. 놀이의 제목을 만들고, 그 안에 규칙도 정하고. 이번 판에는 누가 어떻게 해야 하고, 누구는 저렇게 해야 하고. 평소에도 그러는 편이지만 내 마음 때문인지 소윤이가 괜히 짠해 보였다. 그런데 분명히 뭔가 느낌이 다르긴 했다. 하루 종일 엄마랑 함께 있어도 같이 놀지 못하는 아쉬움 때문인가 싶었다. 소윤이가 시키는 대로 다 했다. 사실 어려운 건 하나도 없다. 그냥 조금 귀찮을 뿐이지. 서라 그러면 서고, 가라 그러면 가고, 뛰라 그러면 뛰고.
시끄럽게 웃으며 킥보드를 타는 소윤이와 시윤이를 기분 좋게 바라보다 망상이 도졌다.
'만약에 며칠 뒤에 내가 죽어야 하는 상태라면 어떨까. 이렇게 애들이랑 함께 있는 시간이 얼마나 귀할까'
죽는 건 너무 슬프고 극단적이니까 조금 더 현실적인 걸 찾았다.
'해외 출장 중이라 내일 출국해야 하면 이 시간이 얼마나 귀할까'
작위적으로 이끌어 낸 생각도 아니었고 훗날 오늘의 일기가 더 아름다워 보이게 하기 위한 것도 아니었다. 너무 행복하게 뛰어노는 소윤이와 시윤이를 보니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내일도 볼 거고, 모레도 볼 거고, 그다음 날도 볼 거니까 그냥 그러려니 하며 넘기지만, 사실 엄청난 순간인데. 그러다 아내 생각도 났다.
'하루 종일 애들 못 보다 보니 이런 낭만도 생기지. 아내는 그럴 틈도 없지'
맞다. 평일에는 이런 생각이 잘 안 든다. 오늘 금요일이라 육아에 낭만이 깃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