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아의 세계

20.04.18(토)

by 어깨아빠

소윤이가 가장 먼저 일어나서 누군가 한 명이라도 일어나길 기다리고 있었다. 그 누군가는 내가 됐다. 어차피 일어나야 할 시간이라 억울하지는 않았다.


아침에 서윤이 병원에 다녀와야 했다. 출생 후 정기 검진이었다. 부지런히 주먹밥을 만들어서 출발했다. 아내랑 서윤이만 병원에 들어가고 나와 소윤이, 시윤이는 차에서 기다리기로 했다. 기다리면서 소윤이, 시윤이에게 주먹밥을 먹였다.


"아빠. 너무 배고팠어여. 너무 맛있어여"

"아빠아. 마디따여엉. 너무 배고빠떠여엉"


아내도 배가 고플까 싶어 나름대로 아내 몫까지 싼 거였는데 애들이 다 먹어버렸다. 서윤이는 기본 진료와 함께 황달 검사도 했다고 했다. 다행히 모두 정상이었다. 아침에 부지런을 떤 게 아까워서 어디라도 가고 싶었다. 게다가 날씨가 너무 좋았다. 심지어 미세먼지 수치까지 '최고 좋음' 이었다.


"여보. 날씨 진짜 좋다. 집에 안 가고 싶다. 그치?"

"그러게. 놀러 가고 싶네"


아내와 서윤이는 아직 외출이 불가능하니 어쩔 수 없이 집으로 돌아왔다. 소윤이도 너무 짧은 외출이 아쉬웠는지 나름대로 여러가지 안을 제시했다.


"아빠. 그러면 우리 엄마랑 서윤이만 내려주고 우리는 바로 차 타고 다시 나갈까여?"

"안 돼. 바로 차 타고 나가는 건"


"아빠. 그러면 우리 엄마랑 서윤이만 내려주고 우리는 집에 들어가지 말고 바로 나갈까여?"

"안 돼. 엄마 배 고프시대. 들어가서 엄마 밥 차려드리고"


소윤이는 어제 못 산 색종이를 사러 가자고 했다. 음, 그냥 한두 번 말한 게 아니고 아침부터 계속. 쭈욱.


"엄마 밥 차려 드리고 가자"


라고 대답했는데 나의 실책이었다. 어제 미룬 설거지도 해야 했고, 쌀도 씻어야 했고, 음식물/재활용 쓰레기도 정리해야 했고, 서윤이 똥 싼 것도 닦아줘야 했고. 자잘한 집안일의 연속이었다.


"아빠. 도대체 언제 가여"

"소윤아. 아빠가 안 간다고 한 것도 아니고 계속 일이 있잖아. 조금만 기다려"


단언컨대 조금도 놀거나 쉬지 않았다(집안일을 엄청 꼼꼼하게 하는 편도 아니고 오히려 대충 하는 편인데도). 12시가 다 되어서야 다시 나왔다. 소윤이와 시윤이는 킥보드를 타고, 난 한살림 장바구니를 들고. 어젯밤에 갔던 광장(공터에 가까움)에 갔다.


"아빠. 우리 같이 놀자여"

"지금 같이 노는 거잖아"

"아니. 같이 뭐 하고 놀자구여"

"뭐?"

"술래잡기?"

"아빠 지금은 좀 힘든데. 같이 뛰기가"

"그럼 숨바꼭질?"

"그냥 소윤이랑 시윤이랑 놀면 안 돼?"

"아빠랑 같이 놀고 싶은데. 그럼 뭐 다른 거 할까여?"

"그래"

"뭐여?"

"소윤이가 생각해 봐"

"뭐 하지"


역시. 어제는 밤 감성, 금요일 감성의 영향이었나 보다. 날씨가 좋다 못해 약간 덥기까지 했고 쌓인 피로가 있었는지 도무지 가볍게 움직이기 힘들었다. 하루를 마치는 시점에서 일기를 쓰며 생각하면 '아, 그때 왜 더 즐겁게 못 놀았을까? 미안하네'라고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난 알고 있다. 다시 그 순간으로 가도 아마 비슷하게 행동했을 거라는걸. 하룻밤 사이에 낭만은 떠나갔구나.


그래도 둘이라 다행이었다. 소윤이와 시윤이는 서로를 열심히 불러대고, 각자 하고 싶은 걸 얘기하면서 아빠가 없는(?) 아쉬움을 달랬다. 어느 정도 놀다가 한살림과 롯데슈퍼에 가서 아내가 사라고 한 것들을 샀다. 소윤이와 시윤이를 위해 핫도그도 사서 먹였다. 몸으로 즐거움을 주는 게 귀찮으니 먹을 걸로 때우려는 나쁜 아빠의 심산.


"아빠. 이제 바로 집으로 가여?"

"아니. 조금 더 놀다가 가자"


날씨가 좋아도 너무 좋았다. 그 좋은 날씨, 공기에도 마스크를 벗지 못하는 게 아쉬웠다. 다 놀고 들어가기 전에 한적한 곳에 앉아 마스크를 벗고 10분 정도 앉아 있었다. 소윤이와 시윤이의 마스크도 벗겼다.


"소윤아, 시윤아. 공기 좀 마셔. 오늘 공기 엄청 깨끗하대"


집에 장인어른과 장모님이 와 계셨다. 삼계탕을 잔뜩 끓여서 오셨다. 여러 밑반찬도 해 오시고. 조금 늦은 점심을 엄청 배부르게 먹었다. 밥 먹고 나서 소윤이와 시윤이는 장인어른, 장모님과 마트에 갔다. 아내는 갑갑함을 호소했다.


"여보. 너무 나가고 싶다"

"그치? 그래도 안 돼"

"알아. 30일 되면 바로 나가야지"


서윤이는 오늘도 꼭 없는 애처럼 고요하게 잤다. 잠들어서 방에 눕혀 놓고 나오면 오히려 울고, 소란스러운 거실에 눕혀 놓으면 잘 잤다. 마치 '날 혼자 두지 말라'는 것처럼.


장을 꽤 오래 보고 와서 장인어른, 장모님은 바로 가셔야 했다. 소윤이는 할머니랑 놀지 못했다며 조금만 놀자고 했다. 아무리 같이 있어도 원하는 놀이를 함께 해야 '같이 놀았다'는 만족감이 드나 보다. 메모리 게임 딱 두 판만 하기로 했다. 참여자는 장인어른, 장모님, 소윤이, 시윤이. 첫판에는 소윤이가 가장 많이 맞췄다. 맞춘 사람은 계속 맞추는 규칙으로 진행했는데 소윤이는 마지막에 기회를 잡자 연달아 서너 개를 다 맞춰 버렸다. 다른 말로 하면 시윤이가 맞출 기회를 박탈한 셈이었다. 이런 이유 때문에 난 맞추든 안 맞추든 한 번의 기회만 주고 차례를 넘기는 방식을 택한다. 사소하지만 '맞췄으니 계속하는 거고 더 많이 가져가는 건 정당하다'는 위험한 논리를 학습할 것만 같다(요즘은 내가 너무 과도하게 연관 짓나 싶기도 하지만). 단지 메모리 게임에 국한되는 문제는 아니다. 소윤이는 두 번째 판에 바로 나의 염려가 그저 기우가 아니었음을 보여줬다. 첫판과 마찬가지로 소윤이가 마지막 두어 개 남은 짝을 맞출 기회를 얻게 됐다. 난 다급하게 소윤이를 불러 시그널을 줬다.


'소윤아. 시윤이도 맞추게 해 줘'


시윤이는 시윤이 나름대로 자기가 별로 못 맞췄다면서 징징대고 있었다. 따지고 보면 시윤이도 그런 말 할 자격은 없었다. 다른 사람이 할 때 집중 안 하고 자꾸 딴짓했으니까. 그래도 배려해 주기 위해 소윤이에게 협조를 구했고 소윤이는 일부러 다른 짝을 뒤집었다. 장모님도. 드디어 시윤이 차례. 시윤이는 서로 다른 짝을 뒤집으며 기회를 날려 버렸다. 장언 어른도 고의 실패. 다시 소윤이. 아까처럼 소윤이에게 신호를 보냈지만 소윤이는 이번엔 그럴 수 없다는 듯 재빨리 맞는 짝을 뒤집으려 했다. 시윤이는 자기가 노력하지 않아서 결과를 얻지 못해 놓고는 징징대고 있었다. 장모님은 급한 마음에 소윤이가 뒤집으려던 걸 막 섞어버리셨다. 이건 또 소윤이에게는 부당한 일이었다. 결국 소윤이는 그렇게 섞으면 어떻게 하냐며 울었고, 시윤이는 자기가 못 맞췄다면서 울었고. 난장판이 되었다. 장모님과 장인어른도 당황하셨다. 장모님은 그럼 한판 더 하자고 하셨지만 아내가 만류했다.


"엄마. 아니에요. 이제 그만하고 가셔야 할 거 같아요"


난 소윤이와 시윤이에게 얘기했다.


"소윤이, 시윤이도 그만 울어. 앞으로 이렇게 하려면 메모리 게임은 그만해"


소윤이와 시윤이의 울음은 그치지 않았고 장인어른과 장모님은 당황스럽기도 하고 안쓰럽기도 해서 쉬이 자리를 뜨지 못하셨다. 장인어른과 장모님이 가시고 소윤이와 시윤이를 불러 세웠다.


"시윤아. 시윤이가 많이 맞추고 싶으면 노력을 해야 되는 거야. 다른 사람이 할 때도 집중해서 잘 보고 기억해야지. 시윤이는 계속 집중 안 하고 노력도 안 하면서 어떻게 많이 맞출 수 있겠어. 누나는 맞추기 위해서 노력하니까 많이 맞추는 거야. 시윤이도 많이 맞추고 싶으면 집중하면 돼. 징징댄다고 많이 맞춰지는 거 아니야"


"그리고 소윤이. 소윤이는 메모리 게임 많이 맞추려고 하는 거야? 1등 하려고? 할머니, 할아버지가 진짜 소윤이보다 못해서 못 맞추시는 거 같아? 아니야. 소윤이 기분 좋으라고 배려해 주시는 거야. 1등 하려고 게임하려면 하지 마. 다 함께 즐거우려고 하는 거지. 소윤이가 많이 맞춰서 즐거울 때 조금밖에 못 맞춰서 속상한 동생을 생각해야지. 소윤이 그러다가 나중에 소윤이보다 뭐든 잘 하는 사람 만나서 1등 못하면 계속 속상해할 거야? 앞으로는 메모리 게임 금지야. 소윤이가 자꾸 1등만 하려고 하니까 안 되겠어"


이건 교육을 위한 교육이 아니라 진짜 진심이었다. 그러다 보니 6살이 소화하기 힘든 훈육이 되었을지도 모르겠지만. 내 생각에 소윤이는 그럴 위험성이 많다. 또래보다 말도 잘 하는 편이고 글과 숫자도 무리 없이 익힌 편이고. 또 주변(할머니, 할아버지를 위시로 한 친인척과 가까운 지인)에서는 똑똑하다면서 치켜세우고. 성격도 그런 것에 열심을 내는 편이고. 생각해 보면 패배의 경험이 별로 없다. 패배해도 다른 패자들과 즐거울 수 있다는 걸 좀 배웠으면 좋겠는데. 교만과 오만의 싹이 자랄까 봐 걱정이 된다. 그렇다고 또 너무 찍어 누르면 좋게 자랄 싹까지 잘라버릴까 걱정이고.


어렵다. 어디가 경계선인지 역시나 보이지 않는다. 본능의 욕구만 해결해 줘도 성공인 신생아 육아와 좀 더 고차원의 여섯 살 육아 세계가 동시에 열렸다.


둘 다 기분은 금방 풀렸다. 샤워하고, 저녁 먹으면서. 저녁은 점심이 너무 거하고 늦어서 과일로 대체했다. 장모님이 수박까지 사주셨는데 수박을 반으로 잘라 속을 파내고 거기에 수박, 딸기, 참외, 우유를 넣어서 줬다. 수박 그릇으로 아이들의 마음을 흔들기 위한 나름의 전략이었다. 제법 성공적이었지만 부작용도 있었다. 시윤이는 장난치느라 과일 먹는 게 더뎠다. 소윤이도 장난치다가 옷에 다 튀기고. 하아. 수박 그릇 퍼포먼스는 오늘이 마지막인 줄 알아라는 마음이 골백번도 더 들었다. 선한 마음으로 시작해서 고함으로 끝나는 육아 인생을 살고 있는 모든 육아인들에게 위로를. (내가 오늘 고함쳤다는 얘기는 아님)


오늘은 아내가 애들을 재우겠다고 했다. 지쳐 보이는 나를 위한 더 지쳐 보이는 아내의 배려였다. 애들을 재우고 나온 아내에게 '밝음'이라고는 하나도 없었다.


"여보. 기분 안 좋아?"

"아니"

"그런데 왜 이렇게 우울해"

"그냥 힘들어서"


오늘은 나도 '밝음'을 양산해 낼 여력이 없었다. '열심'을 쥐어짜내고 있는 나를 향해 아내도 물었다.


"여보도 많이 힘들지"

"괜찮아"

"그런데 왜 이렇게 어두워"

"뭐 나라고 계속 혼자 즐거울 수 있나"


밝음이야 그렇다 치고, 따뜻함도 없는 말이 나갔다. 아내한테 할 말, 보일 태도가 아니라는 걸 알았지만 막아지지 않았다. 늦은 저녁을 먹기 위해 식탁에 앉은 아내가 옅게 훌쩍거리는 걸 느꼈지만 모른 척했다. 묵묵히(혹은 티 내며) 집안일을 했다.


아내도 나도 스스로 추슬렀다. 나 혼자만의 착각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서로를 향해 찌른 건 아니었다. 난 나 혼자 날을 세운 거고 아내는 날 조차도 서운했던 거고. 찌르면 상처가 나고 아무는 시간이 필요하지만 그냥 날만 세운 건 도로 집어넣으면 된다. 서로 일상의 대화를 이어갔다. 내 기준에서 그저 기분이 무거울 뿐이었지 아내에게 서운한 건 없었다. 오히려 내가 서운하게 했으면 했지. 아내는 거실에 난 작은방에 있을 때 아내가 카톡을 보냈다.


[여보. 사랑해. 곧 좋은 날도 올 거야]

[지금도 좋은 날이야]


애 셋 키우면서 이 정도 부침이야 진작에 각오했다. 좋은 날이지만 고생이 좀 필요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