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19(주일)
온 식구가 날 기다리고 있었다. 어제 저녁을 과일로 대신한 소윤이와 시윤이는 내가 일어나기 전까지 배고픔을 호소했다고 했다. 소윤이가 8시쯤인가 깨워서 거실에 나갔었다. 곧이어 시윤이도 나왔고 얼마 뒤에는 방 안에서 서윤이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어? 아빠 서윤이 깼나 봐여"
"그런가"
"한 번 가볼까여?"
"아니야. 엄마가 데리고 나오시겠지"
"아빠. 엄마가 들어와도 된대여"
"그래?"
그렇게 아이들과 함께 방으로 들어갔고 잠시 자리에 누웠는데 그대로 또 잠든 거다.
아침은 어제 점심에 먹고 남은 삼계탕을 먹었다. 아내 덕에 나머지 식구도 덩달아 몸보신 중이다. 아침 먹고 나서는 노트북으로 온라인 예배를 드렸고. 예배 마지막쯤에 소윤이의 태도 때문에 크게 훈육을 한번 했다. 훈육의 명분과 목적이 틀린 건 아니었는데 나의 태도는 좀 아쉬웠다. 더 부드럽게, 차분하게 말했으면 좋았을 텐데 그러지를 못했다. 그 순간을 기회 삼아 안에 쌓여 있던, 피로에서 변이된 고농축 화를 섞어 내보내는 건가 싶은 생각도 들었다.
화장실에 있는 동안 아내가 소윤이와 시윤이에게 뭐라고 얘기하는 소리가 들렸다. 아마 소윤이와 시윤이가 어떻게 말하고 행동해야 하는지 지침을 줬을 거다. 화장실에서 나오니 아내와 서윤이는 방에 들어갔다. 모유 수유를 하고 그대로 잠들었다. 거실에는 나와 소윤이, 시윤이가 남았다. 시윤이는 분위기를 감지하고 혼자 놀았고 소윤이는 내 주변을 뒹굴뒹굴하며 시기를 재고 있었다.
"아빠. 죄송해여"
아마 아내가 소윤이에게 그렇게 얘기했을 거다. 어쨌든 쉽지 않았을 거다. 애든 어른이든 먼저 고개를 숙이고 들어가는 건 항상 어려우니까. 하물며 아내랑 싸우고 나서도 먼저 미안하다고 얘기하기 '싫을' 때가 얼마나 많은가.
"그래. 강소윤. 니가 잘못한 거야. 알았어?"
라고 반응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소윤이가 나의 진심을 알아주길 바라며 다시 한번 아주 차분하게 대화를 나눴다. 마음의 짐을 덜어낸 소윤이는 바로 원래 기분을 되찾았고 시윤이도 기다렸다는 듯 소곤대던 목소리를 키웠다.
아침이 늦고 거했으니 점심은 어제처럼 과일로 대신했다. 수박, 참외, 키위, 오렌지.
"아빠. 우리 과일 먹고 잠깐 어디 좀 나갈까여?"
"어디?"
"그냥 밖에 바람 쐬러여. 계속 집에만 있으면 답답하니까"
"그런데 이따가 비 올 거 같은데"
"그럼 우산 쓰면 되져"
"우산 쓰고 뭐 하게?"
"그냥 걷기라도 하자여"
일단 비가 오는 건 아니었으니 놀이터에 가기로 했다. 혹시 비가 올지 모르니 킥보드는 두고 나갔다. 신나게 아파트 동 입구를 나서려는데 후드득후드득 빗방울이 떨어졌다.
"어? 비 온다"
"어? 진짜네"
"소윤아. 놀이터 못 가겠네"
"그러게여. 그럼 어떡하져"
"글쎄"
"아빠. 그럼 집에 가서 우산 가지고 와서 걷기라도 하자여"
"비 오는데? 비 다 맞을 텐데?"
"우산 쓰면 안 맞잖아여"
비가 많이 오지는 않았다. 거기서 집으로 들어가자고 하는 건 너무 가혹하기도 했고.
"소윤아. 그럼 집에 가서 우산 가지고 와서 잠깐 스타벅스 갈까?"
"좋아여"
나는 긴 우산, 소윤이는 가벼운 3단 우산, 시윤이는 소윤이가 쓰던 어린이 우산을 쓰고 길을 나섰다. 소윤이와 시윤이 모두 제법 잘 쓰고 걸어갔다. 비는 딱 적당히 내렸다. 우산을 쓰고 산책하는 추억을 만들기에 딱 좋을 만큼. 소윤이도 시윤이도 흔하지 않은 새로운 경험이 즐거워 보였다. 스타벅스에 도착했는데 1층에 사람이 엄청 많았다.
"와. 소윤아. 사람이 너무 많다"
"그러게여. 아빠 2층으로 가 보자여"
"그러자"
주문을 하기 전에 2층으로 올라가 봤는데 맙소사. 앉을 자리가 없을 정도였다.
"소윤아. 안 되겠다. 사람이 너무 많다"
"맞아여. 여기는 안 되겠다여"
도로 1층으로 내려왔다.
"소윤아. 우리 이제 어디 가지?"
"음, 아빠 투썸 갈까여?"
"거기도 사람이 많을 텐데"
"그래여? 거긴 좀 더 넓긴 할 텐데"
"소윤아. 일단 저쪽으로 가자"
그렇게 다시 우산을 쓰고 산책이 시작됐다. 어디를 갈까 고민하다가 우리 아파트 맞은편 단지 상가에 있는 카페를 생각했다. 문을 열었는지 안 열었는지 확인하지 못해서 좀 불안하긴 했지만 만약 문을 닫았으면 편의점에 가서라도 아이들의 아쉬움을 달래줄 생각이었다.
"소윤아. 소윤이 생각에는 문을 열었을 거 같아 안 열었을 거 같아?"
"음, 제 생각에는 열었을 거 같아여"
"왜?"
"그냥 그럴 거 같아여"
"시윤이는? 어떨 거 같아?"
"여러뜰거 가따여엉"
"왜?"
"그양여"
소윤이와 시윤이의 예상 혹은 바람대로 영업 중이었다. 아이스 아메리카노와 튀긴 건빵 한 봉지를 샀다. 소윤이와 시윤이에게 특식(?)으로 제공하기에 딱 좋았다. 어쩌다 보니 산책 시간이 더 길었지만 나름 즐거운 외출이었다. 소윤이와 시윤이의 욕구를 해소하기에도 충분했고.
집에 돌아가니 아내는 일어나서 거실에 나와 있었다. 어느새 저녁 시간. 역시 장모님이 사주고 가신 소고기를 구워 먹기로 했다. 애들이랑 나가기 전에 밑간을 해놓고 나갔다. 아내가 먹을 고기와 나랑 애들이 먹을 고기가 따로 구분되어 있었다. 프라이팬도 두 개를 꺼내 따로 구웠다. 장모님이 쌈도 잔뜩 사주셨는데 고기에 비해 쌈이 엄청 많았다. 고기 한 점에 쌈 대여섯 장씩 싸 먹어도 균형이 맞을까 말까 한 양이었다. 덕분에 쌈을 원 없이 싸 먹었다. 아침에는 삼계탕, 저녁에는 소고기. 소윤이와 시윤이가 이렇게 잘 먹고 잘 사는 게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알아야 할 텐데.
기온이 조금씩 오르고 날이 습해서 그런지 애들이 땀을 주룩주룩 흘렸다. 어제 샤워했으니 오늘은 그냥 넘어가고 싶었는데 소윤이가 얘기했다.
"아빠. 너무 끈적해서 샤워하고 싶어여"
"그래. 그럼 샤워하자"
샤워를 다 시키고 소윤이 머리를 말려줄 때, 오늘의 에너지를 모두 소진했다.
[배터리가 3% 남았습니다]
라고 경고 메시지를 보내는 게 느껴졌다. 누가? 뇌가. 강력한 의지로 소윤이와 시윤이에게 짜증이 나가지 않도록 단속하며 드라이기를 놀렸다. 아, 진짜 소윤이 머리 말리는 거 너무 힘들다. 하악.
애들을 데리고 방에 들어갔다. 어제 아내가 재웠더니 요 녀석들이 자다 말고 기어 나왔다. 둘 다 똑같이 하는 소리가
"엄마가 옆에 없어서 나왔다"
였다. 당분간은 그냥 내가 재우는 게 낫겠다 싶었다.
"소윤아, 시윤아. 오늘은 아빠가 기도할게"
누운 채로 두 녀석의 손을 잡고 기도를 시작했다. 다정하려고, 쓸데없이 차갑지 않으려고 노력했지만 피곤이 허용치를 넘어선 순간부터는 그게 잘 안됐을 거다. 나름대로 애썼지만 미안한 마음도 컸다. 애들 손을 잡고 기도하긴 했지만 거의 나의 기도였다. 소윤이와 시윤이의 마음속에 상한 곳이 있다면 부디 하늘의 위로가 임하길 기도했다. 기도를 마치고 나서는 소윤이와 시윤이에게 진하게 사랑을 표현했다. 그 2-3분간의 사랑 표현으로 오늘 하루 동안 저지른 나의 실책이 모두 깨끗해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둘 다 금방 잠들었다. 서윤이는 오늘도 언니, 오빠와 바통을 터치하고 거실에 나와 누워 있었다. 불을 환하게 켜고, 일상의 소음도 가득한 거실에서 깨지도 않고 잘 잤다. 아내가 궁금해서 찾아봤다. 이맘때 애들이 다 이런지.
"여보. 맘카페에 찾아보니까 서윤이랑 비슷한 시기에도 안 자고 우는 애들 많대. 아무래도 서윤이가 좀 순하긴 한가 봐"
"그러게. 엄청 잘 자네"
아내는 오로지 서윤이의 모유 수유인으로서 존재하는 기간이다 보니 소윤이, 시윤이와 관련된 거의 모든 게 나의 몫이고, 집안일도 마찬가지다. 아내랑 같이 하던걸, 아니 아내가 훨씬 더 많이 담당하던 걸 나 혼자 하려니 힘에 부친다. 오랜만에 주말이 더 힘들다고 느꼈다.
시윤이에게는 미안하지만 시윤이 때는 자주 시윤이에게 화살을 돌리기도 했다.
'내가 다시는 이때로 돌아오나 봐라'
'강시윤. 니가 끝이야. 더 이상 신생아는 없어'
그때도 정말 힘들었다. 오늘 그때가 떠오를 만큼 힘들었다. 산화하고 싶었다. 신기한 건 서윤이에게는 조금도 원망(?)의 마음이 들지 않았다. 먹고 자다가 일어나면 싸는 게 서윤이의 루틴이다. 똥을 꽤 자주 싼다. 오염되지 않은 황금색의 똥이긴 해도 어쨌든 쌀 때마다 화장실에 안고 가서 물로 씻겨야 한다. 내가 있을 때는 모두 내가 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윤이 때문에 힘들다는 생각은 한순간도 들지 않았다. 오히려 잘 자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라고 생각하고 있다.
난 노련한 6년 차, 애 둘 육아인이었으니 막내라고 정신이 홀리는 아마추어 같은 모습은 보이지 않을 거라고 자신했는데. 뭐지. 이 녀석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