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20(수)
이모님 없는 생활은 마치 창살 없는 감옥처럼 그저 안에서 밖을 보기만 해야 하는 삶일 줄 알았는데 그건 아니었다. 역시 사람은 적응의 동물이고 아내는 날마다 강해진다. 아내는 셋을 데리고 오늘도 나갔다. 물론 아직 차를 타고 나가는 건 아니고 기껏해야 단지 안 놀이터나 근처 산책 정도지만 그것도 만만하지 않은 체력 소모가 따른다. 나가기 위해 준비할 때, 나가 있을 때, 나갔다가 돌아올 때 언제든 뇌관이 터질지 모르는 지뢰가 여기저기 숨어 있다. 그럼 집에 있으면 되지 뭐 하러 나가느냐. 글쎄. 애 키우면 다 비슷할 거다. 집에 있으면 답답하고 때로는 화가 뻗쳐서 나가고 싶은데 (혹은 정말 순수하게 내 아이를 향한 사랑의 마음으로 나가거나) 막상 나가면 또 집이 그립고.
"거긴 전쟁터지? 밖은 지옥이야"
라는 퇴사 명언처럼, 이럴 거면 밖에 왜 나왔나 싶을 때도 많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루 온종일 같은 장소(집)에서만 머무는 건 또 상상 이상으로 괴롭고. 이러나저러나 힘들고 고된 건 마찬가지다.
아내는 오전에 [대박사건]이라면서 서윤이가 바운서에 누워서 자는 사진을 보냈다. 바빠서 자세히 카톡을 주고받지는 못했지만 아마 혼자서 바운서에 누워 잠들었을 거라고 짐작은 했다. 소윤이나 시윤이나 바운서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그런 경험밖에 없으니 서윤이의 바운서 취침 소식에도 크게 놀라지는 않았다. 오히려
'어쩌다 한 번이겠지 뭐'
라고 생각했다. 역시나 서윤이는 금방 깼다고 했다. 그래도 잠깐 밥 먹는 동안에라도 바운서에 있어 주면 그것만으로도 감지덕지다.
퇴근 시간 무렵에 회사 동료 한 명이 나에게 카톡을 보냈다. 내가 수요일에 축구를 하는 걸 전에 얘기한 적이 있었는데 자기도 같이 가도 되겠냐는 거였다.
[애가 셋이라 집에 가서 상황을 봐야 돼요]
라고 답장을 했다. 내가 없는데 혼자 가서 끼기는 좀 그러니까 나의 참석 여부에 따라서 올지 말지를 결정해야 했다. 좀 멀리서 오는 거라 너무 늦게 말해주면 그것도 곤란했고. 아내에게 전화를 했다.
"여보. 괜찮아?"
"어. 뭐 그럭저럭"
"아직도 밖이야?"
"아니 집에 들어왔지. 여보는 어디야?"
"아, 난 이제 막 퇴근하려고 차에 탔어"
"그래. 조심해서 와"
"아니 여보. 회사 주임 한 명이 나 축구하러 가는데 같이 가도 되냐고 물어보네. 그래서 내가 집에 가서 상황 보고 말해준다고 했거든"
"아, 그래? 갔다 와. 같이"
"그래도 돼?"
"어. 기쁜 마음으로 보내줄게"
"진짜 안 가도 돼. 알지?"
"여보. 브런치 안 봤어? 안 간다고 해야지"
"아, 안 갈게"
"갔다 와"
소윤이가 나한테 '아빠. 저 아이스크림 진짜 먹고 싶은데 하나 먹어도 될까여? 아빠가 안 된다고 하면 안 먹을게여. 그런데 너무 먹고 싶긴 해요'라고 물어보는 것과 과연 무엇이 다른가. 답은 정해져 있어, 여보는 대답만 해.
집에 가니 서윤이는 바운서에 누워서 자고 있었다. 아주 곤히. 바운서에서 잠든 서윤이를 식탁 곁에 두고 나머지 식구는 저녁을 먹었다. 아이 셋이 되고 나서 아내의 얼굴에 생기가 돌았던 적은 별로 없었던 거 같다. 피곤해 보이는 건 기본이지만 그보다는 뭐랄까 보고 있으면 안쓰러워지는 느낌이랄까. 그런 아내를 두고, 그나마 서윤이만 맡기는 건 덜 미안한데 소윤이와 시윤이를 재우는 일까지 떠넘기고 가려니 미안하기 짝이 없었다. 아마 지난번 일기(브런치 발행글)에 댓글을 남긴 사람이 가까운 지인이었으면 깊이 생각을 했을 거다. '내가 진짜 약간 이상한가'
"지금 니가 정신이 있는 거야 없는 거야. 축구가 말이 돼? 이 쓰레기야"
라고 독설을 퍼붓는 사람은 없겠지만 조심스레라도, 내가 알고 있는 아내의 마음이나 상태가 실제와 다르다거나 나의 행보가 뭔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한다면 부디 제3의 통로를 통해서라도 조언해 주기를. (그렇지 않고서는 난 계속 축구를 할 거 같다. 아내가 직접 가지 말라고 하지 않는 이상)
어떻게든 나의 죄책감을 덜어내려고 애들이라도 씻기고 가려고 했다. 시윤이를 다 씻기고 소윤이를 기다리고 있는데 아내는 얼른 가라고 했다. 기왕 가는 거 늦지 말고 가라고. 혹시 내가 7년 동안 발견하지 못한 날개가 어디 숨어있나 살펴봤지만 그런 건 없었다. 죽기 전에는 진실을 밝히겠지. 사실은 자기가 하늘에서 내려온...
축구를 마치고 집에 돌아왔는데 서윤이가 아까 그대로 바운서에서 자고 있었다.
"서윤이 계속 여기서 자는 거야?"
라고 질문을 하긴 했지만 그럴 리는 없다고 생각했다.
"여보. 얘 대박이야. 아까부터 계속 자는 거야"
맙소사. 그야말로 대박이네. 아내는 덧붙였다.
"이럴 거면 나도 그냥 잘 걸"
아내는 곧 깨겠지 깨겠지 하면서 불안감에 휩싸여 이도 저도 못하고 서윤이 옆에서 보초를 섰다.
"여보. 얘 오늘 밤새우는 거 아니야?"
"그러게. 잘 자려나. 오히려 잠에 취했을 때 얼른 먹여서 또 재워"
"그럴까. 두렵다. 안 자면 어떻게 하지?"
"어떻게 하긴. 내가 안아주면 되지. 밤새워서라도 안을 게. 서윤아. 아빠는 오늘 할 말이 없어. 니가 밤새 안 자도 아빠가 안아줘야 돼. 왜냐하면 축구를 하고 왔거든"
서윤이는 효녀였다. 잠깐 깨서 젖을 먹고는 곧바로 잤다. 침대에서.
영유아 수면의 세계란. 정말 알 턱이 없구나. 이러다가 내일은 또 180도 바뀌어서 무슨 수를 써도 안 잘지도 모른다. 그래도 서윤이 정도면 잠으로 고생스럽게 하는 편은 아니니까. 기특하다 서윤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