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09(목)
아침부터 아내의 거칠고 날카로운 카톡이 도착했다. 아내의 흥분이 전해지는 듯, 오타가 즐비했다. 내용을 요약하자면 이런 거였다. 아내는 서윤이 재우느라 잠깐 방에 있었고 소윤이와 시윤이는 밖에 있었다. 시윤이가 오줌이 마렵다면서 소윤이에게 소변기를 들어 달라고 했다(원래 화장실 벽에 붙여 놓는 건데 떨어졌다). 소윤이는 괜히 들어주기를 거부하며 시간을 끌다가 마지못해 소변기를 들어주려고 했다. 그 순간 시윤이는 발사했고 화장실 앞 매트와 바닥 사이, 냉장고와 벽 사이, 냉장고 밑으로 스며 들었다.
[짜증 나. 인간적으로. 폭발할 거 같아서 카톡하는 거임]
이해가 됐다. 애들 키우다 보면 부모와 자녀, 어른과 아이가 아니라 인간 대 인간으로 만날 때가 종종 있다. 오죽했으면 그 아침부터 일하러 나간 남편에게 카톡을 보냈을까. 시간이 조금 흐르고 아내가 걱정이 돼서 전화를 걸었다.
"어. 여보"
"여보. 괜찮아? 뭐해?"
"아직 치우고 있었어"
"아, 진짜? 엄청 오래 걸렸네"
"그래도 이제 거의 다 했어"
그러고 보니 원래 이번 주에 아내가 한 번 나가겠다고 했었다. 자유 부인이 되어서. 오늘이 그날이었다. 오늘이 그날이어야만 하는 강렬한 느낌이 왔다.
아니나 다를까 퇴근 후 마주한 상황은 만만하지 않았다. 일단 시윤이 표정부터 울상이었다. 아내는 꾸역꾸역 울상을 감추려고 노력했지만, 그게 어디 마음대로 되나. 온몸과 얼굴에 하루의 고초가 다 묻어 있는데.
오후에 505호 사모님네 놀러 갔었는데 소윤이는 말 안 듣고, 시윤이는 그건 기본이고 집에 올 때도 안 오겠다고 울고불고 드러누워서 결국 아내가 집까지 안고 오고.
"여보. 오늘 나가. 알았지? 강소윤, 강시윤. 오늘 엄마는 밤에 나가실 거야"
그러자 소윤이가 울음을 터뜨렸다. 정말 서러운 듯한 울음이었다.
"엄마가 그렇게 좋으면 낮에 같이 있을 때 말 잘 들어. 낮에는 엄마 말 안 듣고 힘들게 하면서 뭘 이제 와서 울고 있어"
말하고 보니 꼭 내 스스로에게 하는 말 같네?
요즘은 아내가 애들 옆에 누워서 재워주는 것도 아니다. 아내는 매트리스에 앉아 서윤이 수유하고 보통 먼저 나간다. 아내가 아예 집 밖으로 나가든 거실에 있든 애들한테는 큰 차이가 없다는 말이다. 다만 심정적 거리와 상실이 느껴져서 그랬겠지. 무슨 마음인지는 안다. 사실 그런 의도도 있었다.
'엄마를 속 썩이면 속상한 일이 생긴다'
그래도 이제 둘 다 많이 커서 감정 수습은 빠르다. 잘 때는 웃으며 누웠다.
[여보. 나 왜 갑자기 나가? 당황했어]
아내는 갑작스러운 강제 외출(?)에 조금 놀랐지만 이내 평정심을 찾고 옷을 갈아입었다. 아내는 자켓 하나를 걸치더니 엄청 만족스러워했다.
"여보. 나 오늘 좀 괜찮은 거 같은데? 쌩얼이라 얼굴은 구리지만"
"뭘 구려. 예쁘기만 하네. 옷도 괜찮네. 누가 보면 일하고 퇴근하는 줄 알겠다"
"어때? 괜찮아? 나는 진짜 퇴근하는 거지"
하긴. 아내에게는 진짜 퇴근이긴 하네.
아내는 평소에 외출할 때 자조 섞인 농담을 자주 한다. 나가기 직전까지 육아와 집안일에 시달리다가 겨우 옷을 걸쳐 입고 나와서 거울이라도 보면, 자기 모습이 영 마음에 안 드나 보다. 아내에게 제대로 '꾸미고 준비할' 시간을 좀 주려면 아주 오래(?) 전부터 내가 애 셋을 다 책임지면 되는데, 그게 만만치 않다. 나름 함께하는 아빠라고 생각하는데도, 애들 팬티는 어디 있는지 옷은 어디 있는지 뭘 입혀야 하는지 마스크는 어디 있는지 준비물은 어디 있는지. 아내의 손과 입이 없으면 막막해질 때가 많다.
그렇게 차려 입고 집에서 차로 5분도 안 걸리는 카페에 갔다. 크러플(크로와상을 와플 기계로 누른 빵이라는데 이게 요즘 핫하단다. 뭘 그렇게 핫한 게 많은지. 지구 온난화의 원인이 여기 있네) 먹으러.
아내는 옛날(?)처럼 내가 퇴근하자마자 6시도 안 되어서 나가고 그러지도 못한다. 서윤이 마지막 수유하고 옷 갈아입고 그러면 어영부영 9시다. 그때 겨우 나가서 한 2-3 시간 바람 쐬고 오는 거다. 어렸을 때는 바람 쐬는 게 어떤 의미인지 잘 몰랐는데 이제 조금씩 알 거 같다. 아마 아내도 나랑 비슷하겠지?
오늘은 아내가 좀 늦었다.
'왜 이렇게 안 오지? 전화라도 해 봐야 하나?'
라는 생각 혹은 약간의 걱정이 들 때쯤 돌아왔다.
"뭐 했어?"
"뭐 한 거 없어. 그냥 카톡하고. 연락하고. 가지고 간 책은 쓸모가 없었지"
하긴. 뭘 안 하려고 가는 건데 뭘 했냐고 묻다니. 언젠가 자유 남편의 시간이 주어지면 아무것도 안 가지고 휴대폰이랑 자동차 열쇠만 가지고 나가야겠다. 커피 한 잔 시켜놓고 아무것도 안 하고 가만히 바깥 풍경이나 보면서 망상이나 하고. 그런 생각을 하다 보니 그 옆에 아내도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했다. 과연 그런 날이 언제나 올까 싶지만. 아내의 자유 부인도 생각보다 빠르게, 서윤이 덕분에 엄청 이르게 맞이했으니까 아내와 나의 데이트도 전혀 예상치 못할 때 찾아올지도 모른다. (는 나의 바람)
요즘 퇴근하면 아내와 나는 이렇게 인사하며 서로를 안아준다.
"여보. 고생했어"
아내는 일터에서 수고한 남편의 노고를 인정하는 거고, 나도 마찬가지로 아내의 치열한 육아를 치하함과 동시에 내가 나타났으니 이제 한숨 돌려도 된다는 뜻도 있는 거고.
잘 때도 이렇게 인사한다. 각각 매트리스와 바닥에 누워서.
"여보. 수고했어. 잘 자"
"여보도. 푹 자"
이제 우리는 설레지 않고 전우애로 살고 있다고 우스갯소리로 말하는 숱한 결혼 선배들의 말이, 그저 농담도 아니었고 무조건 욕할 일도 아니었다. 전우애만큼 끈끈한 애정은 없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