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12(주일)
100일.
옛날(이라고 해 봐야 나의 엄마, 아빠가 어렸을 때)에는 100일 동안 생명을 부지하고 버티는 것만으로도 경사였으니 기념했을 거다. 요즘은 환갑이 이전의 영광을 누리지 못하는 것처럼 100일도 그 정도의 의미를 가지지는 못한다.
그래도 100일은 100일이다. 생명 보전의 기쁨은 예전만 못하더라도 100일 동안 탈 없이 잘 큰 것도 감사하고, 100일 전후를 기점으로 다시 사람다운 삶(좀 더 길게 자고, 좀 더 많이 자고)을 살 수 있게 된 것도 감사하고. 은둔 생활에서 벗어나 조금씩 바깥 바람을 쐬는 것도 감사하고.
서윤이도 어느덧 100일이 되었다. 크게는 물론이고 작게라도 아픈 적 한 번 없었다. 그거면 충분한데 거기에 100일이 되기 훨씬 전부터 나이답지 않게 잠도 많이 자고. 젖도 잘 먹고. 아무리 울고불고 난리여도 서서 안아주면 웬만하면 그치고.
아빠(나)의 이직과 겹쳐서 유독 100일이 정신없이, 순식간에 지나갔지만, 돌아보면 다 감사할 따름이다. 힘든 상황에도 예쁘고 좋은 것에만 더 집중하게 하니 그것 또한 감사하고.
못 먹어서 굶어 죽는 아기들이 허다하던 시절의 100일이나, 눈에 뵈지 않는 바이러스의 공포 속에 사는 지금의 100일이나. 기념하는데는 다 이유가 있다.
100일 아침은 아내의 비명과 함께 시작했다. 아내는 먼저 일어나서 애들 셋을 모두 데리고 거실로 나갔다. 늦잠을 자라는 배려였다. 아내의 헤아림을 고마워하며 더 깊은 잠으로 가려고 애를 쓰는데, 갑자기 거실에서 비명소리가 들렸다.
"으아악. 으하하하하하하악"
처음에는 웃는 건가 싶었다. 깜짝 놀라서 나가 보니 아내는 화장실 문에 붙어서 거의 울기 직전이었다.
"여보. 왜? 왜 그래? 왜?"
"벌레. 흑흑흑"
아내가 가리킨 곳은 싱크대였다. 어제 손질해 둔 옥수수를 씻어서 삶으려다가 통통하게 살이 오른 애벌레 한 마리를 발견한 거다. 내가 가서 보니 옥수수 잎이랑 똑같은 색이었다. 그래서 어제 보지 못했나 보다.
부모님들은 세시에 집에 오시기로 했다. 집이 많이 더럽거나 어질러진 상태는 아니라 할 게 많지는 않았지만, 어쨌든 아내는 분주했다. 케이크를 찾으러 가면서 소윤이와 시윤이, 서윤이를 모두 데리고 나갔다. 서윤이는 아기띠로 안고, 시윤이는 오랜만에 푸쉬카에 태우고, 소윤이는 킥보드 타고. 아기띠를 안고 한 손으로 푸쉬카를 미는 게 생각처럼 쉽지는 않았다. 그러기에는 시윤이가 너무 많이 컸다. 양손으로 밀기는 어려웠다. 서윤이의 고개가 자꾸 지나치게 뒤로 젖혀져서 한 손으로 받쳐야 했다. 꽤 힘을 써서 푸쉬카를 밀며 케이크를 찾았다.
가는 길에 한살림에 들러서 세제 하나 더 산 거 말고는 한 일이 없었기 때문에 걸린 시간이 너무 짧았다. 아내는 머리를 감고, 마무리 청소도 해야 한다고 했다.
"소윤아, 시윤아. 우리 놀이터에서 조금만 놀다 가자"
밖에 나왔는데 바로 집에 들어가면 아쉬워할 소윤이와 시윤이를 위해서, 자유롭게 씻고 준비하고 싶을 아내를 위해서. 시간을 끌었다. 서윤이는 나간 지 얼마 안 됐을 때 진작에 잠들었다. 밖에 나갔다가 집에 돌아오는 내내 아기 띠로 안고 있었다.
집에 가니 (내) 엄마, 아빠는 이미 와 계셨다. 잠시 후 장인어른과 장모님도 오셨고. 서윤이는 계속 잘 자고 있었다. 시간이 넉넉했기 때문에 굳이 깨우지 않고 기다렸다. 그 시간에 소윤이와 시윤이도 할머니, 할아버지랑 좀 놀고. 웬일인지 서윤이는 깰 생각이 없었다. 결국 어느 정도 시간이 되어서 우리가 먼저 깨웠다.
그때부터 중요한 건 속도였다. 최대한 빨리, 서윤이가 아직 울지 않을 때 신속하게 사진을 찍어야 했다. 언제나처럼 꾸밈은 간단하게. 서윤이는 범보 의자에 멍하니 앉아 있고, 나머지 어른들만 바쁘게 움직이며 서윤이 옆에 섰다가 나왔다가를 반복했다. 이 기특한 녀석은 사진을 다 찍을 때까지 울지도 않고 가만히 있었다. 물론 웃지도 않았지만.
소윤이와 시윤이는 조금 조금씩 버릇없음 수용 한계치를 향해 나아갔다. 이런 날은 강소윤이 더 뺀질 댄다. 시윤이야 평소에도 그러니까 큰 차이가 안 나서 그런지 몰라도, 아무튼 소윤이는 아내와 내가 어금니를 자주 꽉 물게 만든다.
"스은으. 그믄흐"
저녁은 초밥과 탕수육이었다. 미리 주문해 놓고 찾으러 가려고 집에서 나가는데 시윤이가 쫓아 나왔다.
"아빠아. 나두 아빠양 갈래여엉"
시윤이랑 지하로 내려가는데 아내에게 전화가 왔다. 소윤이도 따라가겠다고 했다면서. 소윤이도 데리고 나왔다. 덕분에 뜻하지 않게 할머니, 할아버지와 서윤이의 오붓한 시간이 만들어졌다. 소윤이가 하도 자기랑 놀자고 매달리니까 마음 편히 막내 손주를 보기 힘든 할머니들에게 귀한 기회였다(할아버지들은 소윤이가 별로 신경을 안 ㅆ...).
"소윤아. 왜 아빠랑 나왔어? 할머니, 할아버지랑 놀아야 되는 거 아니야?"
"그냥여"
소윤이의 다소 힘없는 대답에서 '나간다'라는 사실에 정신이 팔려 할머니, 할아버지를 잠시 망각한 본인의 불찰을 깨닫고 있는 게 느껴졌다.
집에 돌아오니 서윤이는 또 자고 있었다. 덕분에 모두 평온하게 저녁 식사를 했다. 소윤이와 시윤이가 자잘하지만 쉬지 않고 너무 말을 듣지 않아서, 설교자의 마이크가 연결된 앰프의 음량 표시 막대처럼 수시로 '욱'이 올라왔지만 꾹 참았다.
저녁 식사를 마치니 이미 늦은 시간이었다. 소윤이는 무척 아쉬워했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장인어른과 장모님은 먼저 가시고 (내) 엄마, 아빠는 조금 더 있다가 가셨다(조금이라고 쓰고, 소윤이의 번 강요에 의해 1시간이 되었다고 해석합시다).
저녁 먹고 나서 편한 옷으로 갈아입으려고 작은방에 들어갔는데 허리가 뻐근했다. 오랜만에 아기띠를 하고 돌아다녀서 그런가 싶었다. 꼭 등 운동하고 온 날처럼 피로도가 높았다. 그냥 그런가 보다 했다. 바지를 입으려고 한 쪽 다리를 드는 순간 균형을 잃고 잠시 휘청했고 다시 중심을 잡는 과정에서 허리를 앞으로 숙이게 됐다. 그 순간 '빠직'하는 게 느껴졌다.
"으으윽"
허리의 피로도는 통증으로 변했다. 순식간에 구부정한 할아버지가 되었다. 잠들기 전에는 극도의 통증이 있을 정도였다. 자고 일어나면 나아지기를 바라는 심정으로 파스를 붙였다.
"여보. 늙었나 봐"
"그러게. 운동 부족이지 뭐"
애들이랑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려면 애들이 건강해야 하는 건 물론이고 나도 아프지 않아야 한다. 이제 젊음을 불태워 건강을 지켜낼 나이는 아니다. 즙도 챙겨 먹고, 약도 챙겨 먹고, 운동도 하고 그래야 한다. 이전과 다른 강도로 허리가 아프니 별의별 생각이 다 든다.
"여보. 나 괜찮겠지?"
서윤아. 오랜만에 너 안고 다니니까 좋아서 무리했나 보다.
100일 축하해. 수고했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