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05(토)
늦잠을 자겠다는 나의 계획은 다 수포로 돌아갔다. 소윤이와 시윤이가 일찍 깬 건, 뭐 미리 예상했다. 항상 그랬으니까. 딱 봐도 엄청 이른 시간부터 깨 가지고 눈을 말똥말똥하게 뜨고 있었다.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는 방에 없었다. 장인어른의 목소리가 거실에서 들렸다. 소윤이와 시윤이의 목소리도.
1호와 2호가 나갔으니 얼마든지 더 잘 수 있었지만 다른 소리가 더 들렸다. 3호의 소리. 글로 표현하기는 어려운 ‘우엥우엥응으으으응’ 이런 옹알이 소리를 내며 엎드려 있었다. 침을 질질 흘리면서. 그러다가 나랑 눈을 마주치면 온 몸을 부르르 떨면서 웃고. 하아, 그걸 보고 어떻게 더 자나.
아내 옆에 있던 서윤이를 안고 와서 내 옆에 다시 눕혔다. 아내는 여전히 자고 있었다. 서윤이랑 나란히 누워서 얼마나 즐거운 아침을 보냈는지. 과장을 하나도 안 보태고, 다시 자고 싶은 생각이 조금도 들지 않았다. 서윤이도 어찌나 웃음이 후한지, 별로 하는 게 없어도 막 웃어줬다. 그렇게 한 30-40분 놀고 나니 갑자기 찡찡댔다. 졸려 보이길래 누운채로 토닥였더니 잠들 것처럼 고개를 바닥에 대고 움직임이 없었다. 그러다 갑자기 고개를 파바박 들더니 찡찡댔다. 일어서서 안아줬더니 5분 만에 눈을 감았다. 조심스럽게 눕히고 난 휴대폰을 들었다.
뭔가 기척을 느낀 소윤이와 시윤이가 두어 번 방을 찾았지만 손짓으로 물러 보냈다. 훠이 훠이. 거실에서 장모님 목소리도 들렸다.
“소윤아, 시윤아. 이리 와. 방에 들어가지 마”
“아빠 안 주무셔여. 일어나서 핸드폰 보고 있어여”
“그래도. 그렇게라도 쉬셔야지”
맞아. 눈은 떴지만 정신은 자는 거란다. 아닌가 몸이 자는 건가. 아무튼. 육아인의 늦잠이라는 게 꼭 물리적으로 늦은 시간까지 자야만 하는 건 아니다. 늦은 시간까지 육아에 참여하지 않는 것도 늦잠이다.
서윤이는 길게 자지는 않았다. 한 20-30분 자고 깼다. 그때도 기분이 좋았고. 그때쯤 아내도 깼다. 함께 거실로 나갔다. 서윤이는 잠까지 잤는데도 낯가림을 풀지 않았다. 면밀하게 관찰한 결과 차라리 바닥에 두면 괜찮은데 장모님이나 장언어른이 안으면 울 때가 많았다. 가끔 괜찮을 때도 있기는 했는데 시간이 짧았다.
아침을 거하게 먹었다. 닭볶음탕이었다. 아침 먹고 나서, 장인어른이 거실에 텐트를 치셨다. 당연히 소윤이와 시윤이의 요구에 따라서. 원래 텐트 밖에 앉아 있다가 소윤이가 같이 퍼즐 맞추자고 해서 들어갔다. 다 맞추고 잠깐 누웠는데 잠이 솔솔 쏟아졌다. 아침 커피를 못 마셔서 커피 생각이 간절했다. 아내는 소파에 누워서 나처럼 졸았다.
“여보. 커피 사러 갔다 올까?”
“그럴까?”
서로 말만 그렇게 하고 발가락 하나도 움직이지 않았다.
“여보. 귀찮으면 가지 말고”
“반반이야. 커피도 마시고 싶긴 한데 엄청 졸리네. 여보도 그렇지?”
난 빠르게 몸을 일으켰다. 텐트에서 나와서 작은방으로 들어가 침대에 누웠다. 내 기억에는 서윤이가 태어나기 전까지만 해도, 아무리 졸려도 낮잠을 잘 안 잤던 거 같은데 요즘은 파주나 신림동에 가기만 하면 잔다. 역시나 엄청 달콤했다. 1시간 30분 정도 잔 듯한 개운함이었다. 실제로는 그것보다 더 잤을지도 모른다.
자고 일어났더니 점심이었다. 아침 먹은 게 아직 그대로인 듯한 느낌이었다. 그나마 국수라 다행이었다. 배가 부르다고 한 것치고는 엄청 많이, 배고픈 듯한 모습으로 순식간에 먹어치웠다. 점심 먹고 나서는 아내랑 커피와 복숭아를 사러 나갔다 왔다. 코로나만 아니었으면 아무리 애 셋 맡기는 게 부담스러웠어도 어디든 조금 더 길게 있다 왔을 텐데. 코로나가 아내와 나의 염치를 지켜줬다.
소윤이와 시윤이는 말하는 대로 모든 것이 이뤄지고, 모든 말과 행동이 수용되는 꿈과 희망의 나라에서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거기에 먹을 거리는 쉬지 않고 공급 됐고. 그래도 예전에 비하면 둘 다 훨씬 나아졌다. 할머니, 할아버지 집이라고 예의가 없어지고, 자기 멋대로 말하고 행동하는 빈도와 농도가 확연히 줄어들었다. 내가 느끼기에는 그랬다. 아내나 내가 없으면 또 어떨지 모르지만.
서윤이는 내내 낯을 가렸다. 기분이 괜찮다가도 할머니, 할아버지 품에 안기면 울고 그랬다. 소윤이나 시윤이는 별로 그러지 않아서 ‘아주 어린 아이’의 낯가림 이야기를 들을 때, 과장을 보탠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구나.
소윤이와 시윤이는 저녁도 먹었다. 어른들은 아직 너무 배가 불렀지만, 아마 소윤이와 시윤이도 그렇게 배가 고프지는 않았겠지만 그렇다고 굶겨서 재울 수는 없으니까 먹였다. 먹기 쉬운 볶음밥이라 한 그릇을 다 비웠다. 꿈과 희망의 나라이기도 하지만 밥과 간식의 나라이기도 하다. 소윤이와 시윤이는 아예 목욕까지 했다. 심지어 양치까지도. 집에 도착해서 바로 누워도 될 정도였다.
“엄마. 할머니 집에 너무 잠깐 있었어여”
“잠깐? 그렇게 느껴져?”
“네”
“너무 재밌게 놀아서 그런가”
“그런가 봐여. 너무 잠깐 있었던 느낌이에여”
시윤이는 차에 타자마자 잠들었다. 소윤이는 졸리다고는 했지만 집에 가서 자겠다고 했고. 가는 길에 잠시 형님(아내 오빠)네가 있는 카페에 들러 장모님이 싸 주신 반찬을 전해줬다. 소윤이는 그때 잠깐 내려서 삼촌, 숙모와 얘기도 했는데 시윤이는 아주 깊은 잠을 자서 깨지 못했다.
시윤이는 집에 도착해서도 깨지 못했다. 그래도 요즘에는 집에 도착하면 정신을 차리는데 오늘은 정말 피곤했나 보다. 내가 안고 올라가서 그대로 방에 눕혔는데 깨지 않았다. 소윤이는 손도 씻고 옷도 갈아 입었다. 그러다 소윤이가 실수로 안방 문을 벌컥 열었다. 뭐라고 한 것도 아니고 “소윤아, 뭐 해”라고 얘기했는데, 소윤이는 그게 서러웠나 보다. 갑자기 표정이 뚱 해졌다. 왜 그러냐고 물으니 울면서 “나는 실수로 그런 건데 아빠가 뭐라고 해서 속상했다”라고 얘기했다. 그 전에도 그런 일이 있었다. 순간 나도 짜증 아니 짜증이라기보다는 빈정이 상했다. 뭐 내가 말만 하면 걸고 넘어져서 핑계를 삼는 느낌이었다. 눈물의 하소연을 하는 소윤이에게, 마치 아내랑 싸울 때처럼 얘기했다.
“넌 왜 아빠한테 그래. 아빠가 뭐 말만 하면 아빠 때문이래. 아빠가 뭐라고 하지도 않았는데. 아빠도 너 때문에 기분 상했어”
그렇게 얘기하고 차에 두고 온 짐을 마저 가지러 나가려고 했다. 소윤이는 아내와 함께 방에 들어가야 했고. 소윤이는 그 와중에도 “아빠, 안녕” 이라고 울며 인사했다.
“됐어. 아빠는 소윤이 때문에 기분 안 좋아졌어”
라고 대답하고 나왔다. 소윤이는 6살. 나는 36살. 나의 30년은 어디로 갔을까. 내일 일어나면 서윤이 말고 소윤이부터 찾아야지.
아내는 나갔다. 내일 집에 오는 손님한테 선물을 줘야 했는데 그걸 아직 못 사서, 지금 사러 갔다. 아까 애들 저녁 먹을 때는 분명히 배가 불렀는데 어느새 출출하다고 소리치는 아내와 나의 배를 채울 양식도 사 오기로 했다.
부모님 댁에 가서 편히 지내는 것도 좋기는 한데, 아내랑 오붓하게 보내는 주말 저녁도 너무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