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정에 간 아내

18.11.09(금)

by 어깨아빠

아내는파주에서 친구들을 만나기로 했다며 아침 출근길에 함께 했다. 예전에는 내가 처갓댁에 데려다줬는데 이제 아내가 날 사무실에 데려다준다. 버스와 지하철로 고된 출퇴근을 하다가 자동차로, 그것도 기사까지 대동하니 그렇게 편할 수가 없었다. 이래서 돈 좀 굴린다는 사람들이 그렇게 기사 기사 하는 거구만.


애초의 계획은 (계획이라기보다 자주 그랬듯) 내가 퇴근하는 시간에 맞춰 아내가 사무실에 오는 거였다. 아내가 장인어른과 통화할 때 장인어른이 애들을 보고 싶다고 하셨다. 교회에 가야 하는 나는 먼저 집에 오고 아내와 애들은 장인어른이 퇴근하실 때까지 더 있다가 장인어른이 바래다주는 건 어떠냐고 아내가 제안했다. 그러라고 했다가 다른 제안을 했다.


"아니면 아예 자고 오든가"

"왜?"

"아 그냥 제안하는 거야. 혹시 늦게 이동하는 게 부담스러우면 그러라고"

"그래. 생각해 볼 게"


오후쯤 다시 통화하면서 물었더니 아내는 그냥 장인어른과 함께 집에 돌아오겠다고 했다. 아내는 오후에 친구들을 만나고 있었고 사무실에 있는 나에게 차를 갖다 줄 여건이 안 됐다. 여건이 됐다 하더라도 아내가 내 쪽으로 오면 어차피 다시 아내를 처갓댁에 데려다주러 한번 더 가야 하니 비효율적이기도 하고. 퇴근하고 내가 아내 쪽으로 가기로 했다. 함께 일하는 형의 차를 얻어 타고 아내가 있는 아내 친구네 집으로 갔다.


아내와 친구 두 명 그리고 거기에 딸린 아이가 다섯이었다. 늘 그렇듯 문을 열면 별천지에 들어간 느낌이다. 여기가 현실인가 싶은, 혼란과 무질서를 표현한 작품세계인가 싶은 혼잡한 풍경과 지나치게 흥분해서 얼굴에 조금의 홍조를 띠고 삐질삐질 땀을 흘리고 있는 아이들. 껍데기만 살아 움직이는 듯한 무언가 비어 보이는 것 같은 엄마들.


시윤이랑 같은 나이의 남자아이

소윤이랑 같은 나이의 남자아이

소윤이보다 한 살 많은 남자아이


막내 둘은 내게 큰 관심이 없고 고참 두 명(큰 오빠, 소윤이)이 나에게 가장 적극적으로 반응했다. 일단 자기 아빠니까 소윤이가 가장 먼저 달려와서 안겼다. 요즘 소윤이는 나에게 안기면 가장 먼저 하는 게 내 목까지 타고 올라가서 다리를 걸고 거꾸로 매달린다. 마치 철봉에 다리 걸고 하는 것처럼. 옆에서 지켜보던 도하(큰 오빠)가 얘기했다.


"삼촌. 나도 해주세요"

"그래. 그런데 도하는 몇 키로야?"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공기 중에 떠도는 내 질문을 포착한 어떤 여인이 대답했다.


"도하 21kg 래요"


음. 21kg? 삼촌이 헬스장 가면 두 손으로 낑낑대며 쇠 봉에 끼우는 가장 무거운 바벨이 20kg인데 도하가 21kg? 그런데 삼촌 어깨에 발을 걸고 거꾸로 매달린다고? 콜. 아이들 입장에서는 여성 양육자 하고만 보낸 몇 시간만에 등장한, 외형적으로도 왠지 바위 같은 커다란 남성 양육자의 등장이었다. 도하는 겨드랑이에 팔을 넣을 때부터 이미 느낌이 다르다.


'아. 너는 이제 급이 다르구나'


팔씨름할 때 처음 손 딱 잡으면 이 사람을 이길 수 있는지 없는지 대충 감이 잡히는 거 하고 비슷하다. 도하 하고 승패를 가리지 않지만 까딱하면 내가 무릎을 꿇거나 등을 바닥에 대고 드러눕는 사태가 발발할지도 모르니 주의했다. 소윤이는 나를 마주 보고 손을 잡더니 다리로 내 허벅지를 타고 올라가서 손을 잡은 채 뒤로 한 바퀴 도는 걸 했다. 글로 설명이 잘 될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나도 어렸을 때 엄청 많이 했다. 난 소윤이한테 이런 걸 가르쳐 준 적이 없는데 이렇게 하는 건 본능적으로 흥미를 느끼는 동작인 건가. 아니면 어디서 봤나. 옆에서 보던 도하는 역시 자기도 해달라며 내 손을 잡았다. 두 번째 발을 딛는 지점이 배와 대퇴부의 중간쯤 되는 사타구니 근접 부분 어딘가가 되면 좀 아프기도 했다. 아프다고 할 수는 없다. 내 애도 아니고 아프다고 정색하면 얼마나 무안하겠나. 나중에는 시온이(소윤이 동갑 친구)까지 합류했다. 세 녀석은 마치 놀이공원에서 놀이기구 타듯 내 앞에 차례대로 줄을 섰다. 머물렀던 시간은 얼마 안 되지만 꽤 많은 기력을 소모했다.


아내와 애들을 다시 파주 처갓댁에 데려다주고 교회로 갔다. 집에 들렀다 가기에는 시간이 애매해서 교회 근처 카페에서 커피 한 잔 하며 시간을 보냈다. 예배드리고 있는데 아내에게 카톡이 왔다.


[여보 급 자고 감]


왠지 그럴 것 같긴 했다. 집에 가자고 하면 왠지 소윤이가 안 갈 거라고 버틸 것 같았고, 애초에 자고 오는 건 어떠냐고 얘기를 나누기도 했으니 소윤이가 자고 가겠다고 하면 못 이기는 척 자고 올 것 같다는 생각을 하기는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친정이니까.


역시 소윤이가 집에 안 가겠다고 한 덕분에 상황은 그렇게 전개되었다. 게다가 장인어른도 퇴근길이 너무 막혀서 집에 늦게 오셨고. 소윤이는 10시가 다 되도록 안 자고 버티다가 이제 그만 자자고 하니까 갑자기 아빠를 보고 싶다면서 집에 가겠다고 대성통곡을 했다는데 이건 자기 싫어서 구실 찾은 느낌이 강했다. 그러더니 막상 자러 들어가서는 1분 만에 잠들었단다. 소윤이도 체력이 정말, 대단하다.


시윤이는 그때까지도 안 자고 할아버지 무릎에 앉아 손가락 빨며 TV 보다가 꾸벅꾸벅 졸더니 할아버지의 토닥임에 그대로 바닥에 엎드려 잠들었다. 아내의 표현에 의하면 할아버지 눈에서는 꿀이 떨어지고 있었다. 시윤이는 확실히 할아버지들의 마음을 녹이는 뭔가가 있긴 있다. 애가 끼를 부려, 끼를.


아내랑 늦은 시간까지 카톡으로 수다를 떨었다. 은근하지만 지속적인 아내의 화장실 청소 압박에 내일은 화장실 청소를 좀 제대로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집도 은근 더러웠는데 그것도 내일 아침에 아내와 애들이 떠난 집에 홀로 남으면 왠지 뭐라도 해 놔야 할 것 같은 의무감이 드는 건 왜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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