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 일 아닌 게 아니었을지도 모르는 일

21.02.20(토)

by 어깨아빠

아침에 시윤이가 세 번 정도 배가 고프다며, 누워 있는 나에게 얘기를 했다. 이미 정신은 차린 상태였고 거실까지 나가기 위해 가다듬는 중이었다. 아내만 방에 남겨두고 다 나왔다. 아내가 어제 빵을 사 놨길래 토스트를 만들어 줬다. 소윤이, 시윤이, 서윤이는 아내와 내가 방에 누워 정신을 차리기 전부터 일어나서 셋이 잘 놀았다. 엄청 신나게. 멀쩡하게.


애들이랑 있으면 다른 일을 하면서도 습관적으로 애들을 살핀다. 토스트에 잼을 바르고 치즈를 얹으며 시윤이를 봤는데 표정이 이상했다. 엄청 졸려 보였다.


“시윤아. 괜찮아?”

“네에?”

“어디 아파?”

“아니여어”


혹시나 싶어서 이마도 만져봤지만 열은 전혀 없었다. ‘그냥 좀 피곤한가’라고 생각하며 하던 걸 계속했다. 그러다 다시 시윤이를 봤는데 단순히 졸려 보이는 게 아니라 얼굴에 핏기가 없었다. 입술도 하얗고. 약간 걱정이 됐다.


“시윤아. 괜찮아?”

“기운이 없어여어”

“기운이 없어?”

“졸리지는 않고?”

“졸려여어”


정확한 파악은 힘들었지만 평소랑 다른 건 분명했다. 너무 배가 고파서 그러나 싶기도 했다. 일단 식탁에 앉혀서 토스트를 좀 먹여 보려고 했는데 조금도 먹지를 못했다.


“시윤아. 밥 줄까?”

“네에”


어제 먹다 남은 계란밥을 데워서 줬다. 겨우 한 숟가락 뜨는가 싶더니 씹지를 못했다. 졸려서 그렇다고 하기에는 너무 아침 시간이었고, 시윤이의 모습도 졸린 것치고는 너무 아무것도 못하는 느낌이었다. 무엇보다 얼굴이 너무 창백하고 입술에도 붉은기가 전혀 없었다. 얼마 전 영상으로 봤던 사연이 떠오르며 섬뜩한 생각이 스쳤다.


일단 시윤이를 식탁에서 내려오게 하고 바닥에 앉아 안아줬다. 열은 없었고, 손이나 발도 차갑지 않았다. 얼굴이 하얗고, 기운이 없어도 너무 없는 게 평소랑 달랐다. 일단 아내를 깨웠다. 나보다는 아이들의 상태와 변화에 훨씬 더 민감할 테니.


“여보. 일어나 봐. 시윤이가 좀 이상해”

“어? 왜? 왜왜왜?”


아니나 다를까 아내는 시윤이 얼굴을 보자마자, 얼굴이 창백하다며 뭔가 이상하다는 걸 알아차렸다. 시윤이를 바닥에 눕혀 놓고 여기저기 주무르며 시윤이와 대화를 시도했다. 오만가지 생각이 다 들었다.


‘지난번에 킥보드 타다 넘어졌을 때 머리에 생긴 혹이 아직도 조금 남아 있는데, 병원에 가 봤어야 했나’, ‘어제저녁을 굶은 게 그렇게 힘들었나’, ‘잠들게 놔뒀다가 무슨 일 생기면 어쩌나’


시윤이는 계속 자고 싶다고 했다. 아니, 눈을 제대로 뜨지도 못했다. 어제저녁 한 끼 굶었다고 이렇게까지 기운이 없을까 생각하다 보니, 점심때도 많이 안 먹었다는 걸 깨달았다. 작두콩 차도 좀 마시게 하고, 초콜렛도 한 조각 줬다. 그러고 나서 방에 데리고 가서 눕혔다.


시윤이는 눕자마자 아니 이미 눕기 전부터 잤다. 혹시라도 무슨 일이 생길까 봐 한참을 옆에 누워 있다가 나왔다. 간절히 기도도 하고. 별일 아닐지도 모르지만 아내와 나는 똑같이 느꼈다. 그동안 시윤이에게서 한 번도 본 적 없는 모습이었다. 그래서 겁을 먹었다. 별생각이 다 들었다.


소윤이는 동생이 걱정도 됐겠지만 그건 부차적인 거였고 더 큰 걱정거리가 있었다. 원래 오늘 신림동에 가려고 했는데 시윤이가 이러는 바람에 불투명해졌다. 시윤이가 자고 일어나서 괜찮으면 가겠지만 그렇지 않고 비슷한 상태면 못 간다고 얘기했다. 소윤이는 당연히 받아들였지만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다.


“자고 일어나면 괜찮아지겠져”


나중에는 아예 이렇게 말했다.


“아빠. 그럼 차라리 저 혼자라도 데려다 주세여”


일단 시윤이가 깨면 상황을 보자고 했다. 아내가 서윤이를 재우러 방에 들어갔고, 잠시 후 시윤이가 깨서 같이 나왔다. 시윤이의 얼굴을 보자마자 아까랑 다르다는 걸 느꼈다. ‘혈색’이 달랐다. 누가 봐도 건강한 사람의 안색이었다. 나도, 아내도 똑같이 느꼈다. 시윤이가 내뱉는 말과 행동도 달랐고. 무엇 때문에 그랬는지는 몰라도 아무튼 괜찮아졌다는 걸 느꼈다.


결과적으로 아무 일이 없어서 그렇지, 처음 겪어보는 일이 처음 받아보는 결과로 이어질까 봐 내심 걱정을 많이 했다. 아이를 키우다 보면, 과연 내 힘으로 아이를 안전하게 지키는 게 가능한 일인가 싶을 때가 참 많다. 대부분 아무 일 없는 것처럼 지나갈 뿐, 조금만 어긋나도 아찔한 일이 될 법한 순간이 적지 않다.


시윤이는 밥도 먹고 간식도 먹었다. 그냥 멀쩡한 ‘원래’ 시윤이로 돌아왔다. 아내와 나 못지않게 안도의 한숨을 내쉰 이가 또 있었다. 소윤이. 마음 졸이던 시간을 뒤로하고 할머니, 할아버지 집에 간다는 기대감을 가득 채웠다.


서윤이는 이제 낯가림은 완전히 없어졌나 보다. 신림동에는 꽤 오랜만에 갔는데 할머니, 할아버지를 보고 울지 않았다. 엄마한테만 안겨 있지도 않았다. 한 가지 조건만 충족되면 잘 놀기도 하고 잘 웃기도 했다. 가시거리 안에 엄마가 보이기만 하면. 엄마가 눈에서 사라지면 바로 알아채고, 하던 걸 내팽개치고 엄마를 찾았다. 뭐 어차피 엄마가 사라질 일이 그렇게 많지 않기 때문에, 대부분의 시간을 웃으며 놀았다. 벌써 세 번째 손주인데도 돌도 안 된 ‘아기’가 발산하는 매력에,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정신을 못 차렸다.


소윤이와 시윤이도 많이 컸다. 할머니, 할아버지 집이어도 집에서 익힌 규칙과 약속이 몸에 더 진하게 뱄다는 게 느껴졌다. 당연히 가끔은 선을 넘기도 했지만, 할머니 집에서 그 정도는 허용 가능한 범위였다. 아무튼 나름대로 지킬 건 지켜가며 집보다는 자유롭게 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할머니(내 엄마)는 소윤이와 시윤이에게 허락을 받고, 10분 정도씩 서윤이를 만나러 나왔다.


서윤이는 이동이 자유로워진 것에 비하면 제법 얌전히 놀았다. 이것저것 끄집어 내며 난리통을 만들 줄 알았는데 의외로 수습 가능한 수준으로 놀았다. 서윤이는 그냥 일어섰다 앉기만 해도, 살짝 웃기만 해도, 조금만 몸을 흔들어도, 심지어는 가진 걸 뺏기기 싫다고 소리를 지르며 울어도 박수와 환호, 웃음을 받았다. 너는 여기서도 막내의 삶이구나.


밤에 잠깐 산책도 나갔다 오고, 집에 와서도 밤늦게까지 놀도록 뒀다. 이제 신림동에 오면 나와 아내에게 묻지도 않고 할머니 옆에서 잔다. 오늘도 책을 잔뜩 들고 할머니 옆으로 갔다. 집에서는 한 권 읽는 것도 갖은 조건과 생색(?)을 들어야 하는데, 몇 권이고 가지고 오라는 자비로운 할머니와 함께하는 책 읽는 밤이 오죽 좋을까 싶었다.


아내와 나는 신혼부부처럼 서윤이를 사이에 두고 잤다. 서윤이는 마지막 수유를 마치고 나서 한참이나 뒹굴뒹굴하며 놀았다. 그러고 보니 밤에 이렇게 같이 누워서 잔 건 거의 처음이다 싶을 정도로 생소한 일이었다. 덕분에 배불리 먹고 기분 좋아서 어둠 속을 이리저리 뒹구는 서윤이를 보는 행운을 얻었다.


방 밖에서는 소윤이와 시윤이의 떠드는 소리가 여전히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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