콩국물이 쏟아진 건 우연이 아니었다

21.02.24(수)

by 어깨아빠

아내는 하루의 첫 끼, 그러니까 정신을 챙겨서 밥 차려주는 것만 해도 보통 일이 아닌 아침 식사를, 콩국수를 만들었다고 했다. 미리 불려 놓은 콩을 직접 믹서기로 갈아서 만든, 100% 수제 콩국수였다. 소윤이와 시윤이는 알아야 한다. 얼마나 잘 먹고 잘 살고 있는지를. 아, 콩국물은 서윤이도 먹었으니 서윤이도 알아야지.


오전에는 목장 모임도 해서 아주 바빴을 거다. 목장 모임이 없어도 충분히 바쁘니까. 오후에는 장모님께 간다고 했다. 아내는 자신의 콩국수가 만족스러웠는지, 장인어른께도 콩국물을 드리겠다며 오후에 한차례 더 콩국물을 만들었다고 했다.


“어! 엄마! 서윤이!”


소윤이의 다급한 외침에 고개를 돌려 보니, 서윤이가 식탁에 놓인 꽃을 잡아당기고 있었다. 꽃은 서윤이 앞으로 떨어졌다. 위험한 건 아니었지만 서윤이는 뭐든 입에 넣으니까 아내는 급히 서윤이에게 가려고 방향을 틀었다. 사실 꽃이야 좀 먹어도 큰일이 나지는 않겠지만, 서윤이가 입에 넣는 게 무엇인지 항상 정확히 파악하기 어려우니 일단 막고 보는 습관이 어느새 몸에 뱄다. 너무 다급했던 걸까. 정성스럽게 담아 놓은 콩국물이 식탁 위로 쏟아졌다. 아내는 참혹한 사건 현장을 찍어서 보여줬다.


“거의 다 버렸겠네? 아깝다”

“그래도 식탁을 깨끗하게 닦아놔서 손 깨끗하게 씻고 다시 담았어”

“아, 진짜?”

“응. 그래도 한 삼분의 일은 버렸지”


출발부터 평탄치 않은 친정 여정이었다. 아내는 오늘도 일찍 오겠다고 했다.


“여보. 언제나 계획은 일찍 오는 거야”


여러 가지 변수가 있다. 장인어른이 애들을 너무너무 보고 싶어하신다거나, 매몰차게 떠나기에는 장인어른이 너무 금방 오신다거나, 소윤이와 시윤이의 아쉬움이 평소보다 심하다거나. 일찍 올 거라고 말하는 아내의 목소리에 자신감이 없어 보였다. 왠지 오늘은 늦게 올 것 같았다. 어차피 저녁에는 내 목장 모임도 있어서 함께 저녁 시간을 보내는 것도 어려웠다.


퇴근하면서 전화를 했는데 나의 예상과는 다르게, 아내도 돌아오는 중이라고 했다. 내가 조금 더 먼저 도착했다. 아내와 아이들은 목장 모임이 시작되기 직전에 돌아왔다. 아내의 자태, 목소리, 낯빛, 아내가 제공하는 모든 단서가 ‘매우 힘든 상태’라는 걸 알려줬다. 난 이미 목장 모임이 시작되었기 때문에 아내의 짐을 덜어 줄 수는 없었다. 방에서 노트북을 켜고 목장 모임을 하는 동안, 아내는 거실에서 ‘먹이고, 씻기고’를 축으로 하는 마지막 육아 일과를 수행했다. 지친 엄마의 사정을 봐 주지 않고 신이 나서 까불거리는 아이들의 소리와 이를 진압(?)하기 위한 아내의 소리가 섞여서 들렸다. 뭔가 챙기려고 잠깐 방에 들어온 아내의 얼굴은, 아까보다 더 안 좋았다. 그저 몸이 힘든 걸 넘어서 감정의 소모도 한계에 다다른 것처럼 보였다.


“여보. 배고프면 밥 먼저 먹어요”


아내는 저녁을 안 먹었나 보다. 입맛이 없었겠지. 그 난리통에 앉아서 밥을 먹어 봐야, 그야말로 생존을 위한 식사밖에 안 될 테니.


의리 없게 먼저 먹을 수는 없었다. 목장 모임이 끝나고 아내를 기다렸다. 아내는 생각보다 금방 나왔다. 아내가 나오자마자 부지런히 상을 차렸다. 장모님이 잡채를 싸 주셔서 잡채, 김치, 밥. 이렇게 간단히 차려 먹으려고 했다. 이 세 가지를 놓는 그 짧은 순간을 넘기지 못하고, 방에서 또 울음소리가 들렸다.


“하아. 진짜 너무한다”


아내는 진심이었다.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를 실제로 본 적은 없지만, 아내가 그 소 무리와 함께 있었으면 다른 소들이 아내의 표정을 보고 숙연해지지 않았을까 싶을 정도로 죽상이었다. 아내는 다시 방에 들어갔고, 난 다시 아내를 기다렸다. 다행히 엄청 오래 걸리지는 않았다.


잡채가 너무 맛있었다. 야심한 밤에 살찌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지만, 그래도 너무 맛있었다. 고단한 하루를 잊게 만드는 맛이었다. 이 잡채를 얻기 위해, 아내가 그 힘든 친정 여정을 견딘 건가 싶었다.


아, 이렇게만 써 놓으면 혹시나 억지로 친정에 가는 거라고 오해할지도 모르겠다. 물론 그런 건 절대 아니다. 다만, 가고 오는 과정에 스민 여러 절차가 다소 벅찰 뿐인 거다. 또 오늘 같은 날은 집에 와서도 해야 할 일이 많았고, 남편은 함께하지 못했고. 여러 악조건이 겹쳤다.


그래도 친정은 언제나 친정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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