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범하지만 특별한, 특별하지만 평범한

21.02.23(화)

by 어깨아빠

결혼기념일이다. 특별한 날이지만 일상은 평범했다. 아내는 여느 날과 다름없이 세 아이와 부지런해야만 하는 시간을 보냈고, 난 사무실에서 내 소임을 다하며 시간을 보냈다. 특별한 날이니 잠시 일상을 멈추고 일탈로 나아가기에는, 아내도 나도 능력이 부족했다. 뭐 꼭 특별할 필요는 없다. 평범이 비범인 시대인 만큼 여전히 곁을 지키는 가족들, 특히 아이들과 함께 소박하게 이 가정의 탄생을 기리기로 했다.


아내야말로 다른 보통의 날과 똑같이 보냈다. 남아있던 만두피로 ‘만두 퀘사디아(만두피를 기름에 지지고, 속은 버섯과 치즈, 케첩으로 채운 아내의 자체 개발 음식)’를 만들어 먹고, 어제 못 간 도서관에도 가고.


“짱 힘들다”


아내는 오늘 하루를 구구절절 설명하는 대신, 저 한마디로 갈음했다. 나중에 들어보니 도서관 여정도 만만한 게 아니었다고 했다. 하긴 당연한 일이다. 혼자 셋을 데리고 ‘정숙’이 최고의 덕목인 도서관에 갔으니 다른 어떤 장소보다 신경이 쓰였을 거다. 또 오랜만에 간만큼 책도 많이 빌려왔다.


한편으로는 예전보다는 훨씬 수월하다 아니 뭐랄까, 도서관에서 보내는 시간이 유익해졌달까. 아무튼 소윤이와 시윤이도 좀 더 도서관을 도서관답게 이용했다고 했다. 소윤이가 시윤이한테 책도 골라주고, 읽어주고. 자기 읽을 책도 나름 고심해서 가지고 오고.


평범하게 보내기로 했어도, 기념할 건 해야 하니까 저녁 시간을 이용했다. 일단 음식이 필요했다. 아내는 파스타 같은 게 먹고 싶다고 했다. 어디 가서 먹기에는 좀 부담스러웠고, 그렇다고 포장을 하자니 불어서 맛이 없을 것 같고. 고민하던 차에 ‘배달의 민족’에 평이 좋은 곳을 발견했다. 거기로 낙점하고 아내에게 주문을 부탁했다.


집에 들어가는 길에 꽃집에 들러 미리 주문한 꽃을 찾았다. 낮에 화장실에 들어가서 통화를 했다.


“아, 혹시 오늘 7시에 꽃 살 수 있나요?”

“아, 네. 어떤 분한테 드리시는 거에요?”

“아, 저희 아내구요. 결혼기념일이라서요. 한 3만원 정도 꽃다발이 있나요?”

“아, 미니는 2만 원이고요, 중형은 3만 5천 원이에요”

“아, 그래요? 미니는 많이 작나요?”

“음, 미니….는 많이 작긴 한데”

“아. 그래요? 아, 그럼, 음….”

“아, 그럼 3만 원에 맞춰서 해드릴까요?”

“아, 네네”


마지막 질문을 하는 꽃집 사장님의 음성에 미세한 웃음이 느껴졌다. 마치 내가 정한 3만 원의 한계선을 넘어가는 3만 5천 원짜리 꽃다발을, 5천 원이나 더 내고 할 건지 말 건지 고민하는 것처럼 비친 건가. 사실은 그게 아니라 2만 원과 3만 5천 원을 고민한 거고 마침 3만 5천 원짜리로 해달라고 하려던 참이었는데. 혹시 그것 때문에 비웃으신 건가. 그래도 꽃은 예뻤다. 꽃에는 영점영영영일가견도 없는 내가 보기에도 괜찮았다.


나의 퇴근에 맞춰 배달시킨 음식도 도착했다. 아무리 그래도 플라스틱 용기에 그대로 놓고 먹는 건 그나마 없는 분위기도 깬다고 생각해서, 집에 있는 그릇에 옮겨 담았다. 그럴 싸했다. 역시나 아내는 꽃다발에 아주 크게 반응했다. 소윤이와 시윤이도 (마치) 흐뭇하게 바라봤다. 소윤이는 부디 아내를 위해 꽃을 사는 걸 아까워하지 않는 남편을 만났으면 좋겠고 (일만오천원 정도는 고민해도 된다) 시윤이는 아내를 위해 꽃을 살 줄 아는 남편이 되었으면 좋겠다.


소윤이는 아내와 나에게 각각 편지를 썼다. 결혼기념일을 진짜로 축하한다는 내용과 함께 그림도 그렸다. 안방에 걸려 있는 아내와 나의 웨딩 사진을 보고 따라서 그렸다. 아내의 길고 풍성한 드레스를 나름대로 잘 묘사했다. 글과 그림에 담긴 소윤이의 마음이 참 어여뻤다. 편지를 보관하긴 하지만 종이에 담을 수 없는 소윤이의 그 마음까지 함께 간직하고 싶었다.


음식은 제법 괜찮았다. 다만 좀 기름지고 무거워서 다 먹었을 때는 강력한 탄산음료나 와인이 절실하게 생각났다. 다행히 탄산수가 있어서 그걸 마셨다. 아내가 작은 케이크도 하나 사 놔서 거기에 초를 꽂고 노래도 불렀다. 소윤이와 시윤이가 생일 축하 노래를 개사해서 결혼 기념 축하 노래로 불러줬다. 서윤이도 옆에 앉아 신나는 표정으로 함께했다. 특별한 날이니 소윤이에게는 딸기청 탄산수, 시윤이에게는 딸기청 우유를 타서 줬다.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 평소와 다른 곳에서 밥을 먹고, 평소와 다르게 시간을 보내려고 궁리를 많이 했었다. 아마 올해 코로나가 이렇게 심하지 않았으면 올해도 그랬을지 모르겠다. 세 아이와 함께 앉아 초를 켜고 축하를 받는데, 표현하기 어려운 행복함을 느꼈다. 매년 결혼을 기념할 때마다 건강하게 자라고 있는 아이들과 함께하는 게 얼마나 특별한 일인가 싶기도 했고. 작년에는 없던 서윤이 녀석까지 함께하기도 했고.


축제는 끝났다. 모든 순서를 마쳤으니 씻고 자는 일만 남았다. 아내는 아이들을 데리고 방으로 들어갔다. 낮에 나갔다 오는 길에 차에서 잔 시윤이가, 말을 안 듣고 자꾸 소리를 내고 중얼거린다며 아내가 카톡을 보냈다. 시윤이는 잠들지 않았지만 아내는 무사히 나왔다. 시윤이는 잠시 후 오줌이 마렵다면서 나왔는데 한참 동안 오줌 싸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당연한 일이었다. 그냥 거실에 한 번 나와보고 싶어서 오줌 핑계를 댔으니까. 이때는 너그럽게 모르는 척한다. 이때만 볼 수 있는 시윤이 특유의 어리광 가득한 모습이 좋다.


“여보. 이렇게 평이하게 결혼기념일을 보낸 건 처음인 거 같아”

“그러게”

“뭔가 좀 아쉬운데?”

“그렇긴 하지?”


아내는 마침 아이스크림이 먹고 싶다고 했다. 기꺼이 나가서 아이스크림을 사 오면서 작은 와인도 하나 샀다. 아내가 먹은 아이스크림보다 싼 와인이었다. 상을 펴고 조촐한, 아주 조촐한 아내와 나의 2차 기념을 시작했다. 아이스크림, 과자, 와인. 그리고 아이들의 사진.


특별한 존재들과 함께 보낸 평범한 결혼기념일.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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