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그날이 왔다

21.03.06(토)

by 어깨아빠

어제 하루 종일 콧물을 흘리는 게 심상치 않았던 시윤이가, 아침부터 열이 났다. 미열이긴 했지만 어쨌든 열이 좀 났고, 약간 기운도 없어 보였다. 단순 코감기 같았다. 즐거운 축제의 날에 참 안타까운 일이었다. 누구보다 시윤이에게. 비록 누나의 생일을 기념하는 모임이기는 해도 양쪽 할머니, 할아버지를 한자리에서 만나는 거라 시윤이도 기대가 컸다.


아침에 풍선도 사고, 케이크도 찾으러 나갔다 와야 했다. 아내는 부모님 맞이 집 정리와 청소를 해야 해서 내가 나갔다 오기로 했다. 아내의 수월한 청소를 위해 소윤이와 서윤이를 데리고 가기로 했다. 시윤이도 무척 가고 싶어 했지만 데리고 나갈 수 없었다. 시윤이는 또르르 눈물을 흘리며 서운한 마음을 드러냈다. 막 떼쓰고 소리 지르지 않으니 오히려 더 불쌍했다. 엄마랑 둘이 집에서 데이트하는 거라고 위로했는데, 막 나갈 때쯤 서윤이가 잠이 들어서 결국 서윤이도 놓고 나왔다.


시윤이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어쩌다 보니 소윤이랑 둘이 데이트를 하게 됐다. 뭐 별일이 아니었는데도 어영부영 1시간 정도 걸렸다. 소윤이랑 손을 잡고 여기저기 걸으며 이야기하는 게 꽤 재밌었다. 아니, 재미가 아니라 뭐라고 해야 할까. 소윤이가 과연 몇 살까지 내 손을 이렇게 잡고 돌아다녀 줄까 하는 기대로 설렜다고 해야 하나. 오랜만이라 그런지 또 부쩍 큰 느낌이었다. 세 남매의 맏이, 두 동생의 누나이자 언니가 아닌 그냥 일곱 살 딸인 소윤이는 또 달랐다.


“아, 소윤아. 소윤이가 벌써 일곱 살이라니. 언제 이렇게 컸어. 아빠는 소윤이가 서윤이 만할 때가 아직도 다 기억나는데”

“아빠. 저는 아빠가 그 말 할 줄 알았어여”

“왜?”

“아니, 아빠가 맨날 그 말 하잖아여. 그래서 언제 또 그 말 할까 생각하고 있었져”


서운해하는 시윤이를 위해 작은 선물로 비요뜨를 사 가기로 했다. 소윤이는 앞장서서 비요뜨를 챙겼다. 시윤이가 미리 주문한 도넛 모양 초콜렛이 들어있는 걸로. 시윤이는 나름대로 아쉬움을 잘 극복하고 엄마, 동생과 잘 지냈지만 한 가지, 더 큰 시련이 남아 있었다.


미열이고 조금 기운이 없어 보일 뿐 말하고 행동하는 건 평소랑 거의 비슷했지만, 그래도 식당에 데리고 가면 안 될 것 같았다. 아내와 상의 끝에 나와 시윤이는 집에 남기로 했다.


“시윤아. 시윤이는 아빠랑 집에 있자”


당연히 시윤이는 고개를 저으며 거부했다. 별로 안 힘들어서 갈 수 있다면서 같이 가겠다고 했다. 참 기특하게도 막 소리지르고 떼를 쓰면서 말하지 않고, 오히려 불쌍하게 눈물을 또르르 흘리면서 얘기했다. 잘 설명해 주니 결국 엄마와 아빠의 뜻을 받아들였다.


몸이 안 좋긴 안 좋았는지 꽤 이른 시간에 피곤해 하길래 방에 들어가서 재웠다. 그 사이 아내와 소윤이, 서윤이는 나갈 준비를 했다. 시간이 다 되었는데도 시윤이가 깨지 않길래 깨울지 말지 고민이 됐다. 일어났는데 아무도 없으면 너무 슬퍼할 것 같았다. 굳이 깨워서 가는 장면을 보여주는 것도 뭔가 내키지 않았다. 고민하던 차에 시윤이가 스스로 일어나서 나왔다.


“시윤아. 이제 엄마랑 누나랑 서윤이는 가야 돼”


시윤이는 말없이 엄마에게 가서 안겼다. 닭똥 같은 눈물을 소리 없이 흘렸다. 같이 울 뻔했다. 아내와 소윤이, 서윤이가 나가고 나서도 시윤이는 시무룩했다.


“시윤아. 방에 들어가서 조금 누워 있을까?”


시윤이의 마음을 달래주는 척 물었지만, 사실 내가 너무 졸렸다. 시윤이랑 방에 눕자마자 내가 먼저 간헐적 수면에 빠졌다. 눈을 뜰 때마다 앞에 누운 시윤이가 날 어이없는 표정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몇 번 그렇게 시윤이랑 눈이 마주치니 너무 미안했다.


“시윤아. 나갈까?”

“(끄덕끄떡)”


시윤이가 먹을 점심을 만들었다. 남아 있던 밥에 물을 넣고 끓여서 주려다가 너무 맛도 없을 것 같고, 영양가도 빈약해 보여서 브로콜리와 옥수수도 넣었다. 시윤이는 내가 밥 준비하는 동안 혼자 앉아 있다가 기분이 좋아졌다.


“아빠아. 누나랑 엄마는 제가 밥 다 먹어도 안 오겠져어?”

“그러지 않을까”


시윤이랑 둘이 집에 있는 것도 괜찮았다. 시윤이의 상황이 불쌍해서 그랬는지는 몰라도, 시윤이도 누나의 동생, 동생의 오빠가 아닌 다섯 살 아들일 때의 느낌은 또 달랐다.


“시윤아. 아빠랑 둘이 있는 것도 좋지?”

“네”

“아까는 엄마랑 있는 게 좋다며?”

“엄마도 좋은데 아빠도 좋아여어”


잠시 후 아내와 소윤이, 서윤이, 양쪽 할머니, 할아버지가 왔다. 소윤이는 생일을 만끽하느라 행복했고, 시윤이는 드디어 혼자가 아니라서 행복했고. 서윤이는 오는 길에 잠이 들었는지 아내에게 안겨 자고 있었다. 그대로 방에 눕혔다.


시윤이는 계속 미열이 있었지만 말과 행동은 멀쩡했다. 오히려 평소보다 더 들떴다. 서윤이가 깨면 생일 케이크에 초를 꽂고 축하 의식을 치르려고 했는데, 오늘따라 서윤이가 엄청 오래 잤다. 소윤이는 도대체 서윤이가 언제 깨는 거냐며 생일맞이 축하 행사를 목이 빠져라 기다렸다. 드디어 서윤이가 깼고, 케이크를 꺼내 초를 꽂았다. 소윤이는 모두의 성대한 축하를 받으며 기쁨을 만끽했다.


기대가 크면 실망만 큰 게 아니라 아쉬움도 크다. 실망이 클 일은 없었지만 속절없이 흐르는 시간에 소윤이의 아쉬움이 커졌다. 장모님과 장인어른이 먼저 가셨다. 그때까지는 아직 또 다른 할머니, 할아버지가 남아 있으니 괜찮았다. 시간은 또 흘렀고, 남은 할머니와 할아버지마저 가실 시간이 되자 소윤이는 역시나 무척 서운해했다. 얼마나 기다리고 기다렸던 오늘인데, 이렇게 쏜살같이 지나가다니. 소윤이의 마음이 백 번 천 번 이해가 됐다.


소윤이의 아쉬움도 달래고 시윤이의 아쉬움도 달랠 겸 할머니와 할아버지와 함께 잠깐 나가서 저녁으로 먹을 걸 사기로 했다.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그거 사 주고 바로 떠나기로 했고 그래 봐야 30분도 안 되는 짧은 시간이었지만, 소윤이와 시윤이는 1분 1초가 아쉬운 마당에 그거라도 감지덕지라는 듯 서둘러 옷을 입고 준비했다. 나가서 저녁으로 먹을 주먹밥 사고, 한살림에 가서 내일 먹을 간식 사고, 그게 끝이었다. 그래도 아쉬움이 좀 달래졌는지 아니면 밖이라서 그랬는지 할머니, 할아버지와 즐겁게 헤어졌다.


시윤이는 속이 좀 불편했는지 주먹밥 대신 낮에 먹었던 죽도 밥도 아닌 끓인 죽밥 아니 밥죽 아무튼 그걸 먹겠다고 했다. 화려한 축제가 끝나고 밀려오는 허무함 비스무리한 것이 느껴졌다. 정작 소윤이는 어땠는지 모르겠다. 소윤이가 하도 기대를 해서 그런지 내가 다 아쉬웠다. 그래도 내일이 진짜 생일이었다.


“소윤아. 오늘 하루가 금방 갔네”

“그러니까여”

“그래도 내일이 진짜 생일이잖아. 내일은 우리 가족끼리 또 생일 축하도 해야지”

“그래여. 그러자여”


아이들을 재우고 아내랑 뒤늦은 저녁을 먹었다. 떡볶이를 시켜서 먹었는데 서윤이가 제대로 방해를 했다. 깨고 또 깨고 다시 깨고 또다시 깨고 계속 깨고. 하아. 아내가 포기하고 들어가서 재우는데도 마찬가지였다.


아내는 순식간에 녹초가 됐고, 서윤이는 쓰러진 상대에게 무차별적으로 주먹을 날리는 무법의 권투 선수처럼, 사정없이 울어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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