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퇴근

21.03.11(목)

by 어깨아빠

출장을 다녀왔다. 아침 일찍도 아닌, 새벽같이 일어나서 나간 덕분에 퇴근이 좀 빨랐다. 평소보다 한 세 시간 정도 집에 일찍 돌아왔다. 미리 예고하지 않았다. 그야말로 갑자기 퇴근이었다. 모두에게 환영받았다. 2-3년 정도 해외 근무를 마치고 돌아온 파견 근로자처럼.


“아빠. 오늘 아빠도 일찍 왔는데 우리 같이 스트림스 할까여?”

“그래. 그랄까?”

마침 서윤이도 잤다.


“서윤이 자니까 바닥에 앉아서 해도 되겠다”


얼마 전에 보드 게임 두 개(스트림스, 우노)를 샀다. 소윤이, 시윤이와 앉아서 보드게임을 할 수 있다는 게 은근히 놀랍다. 시윤이는 스트림스는 깍두기로 참여하지만, 우노는 정식 플레이어로 참여한다. 아내랑 나도 재밌게 한다. 억지로 놀아주는 게 아니라 하다 보면 많이 웃는다.


아내는 보드게임을 하면서도 수시로 이런 말을 했다.


“우와. 소윤아, 시윤아. 아빠 일찍 오시니까 진짜 너무 좋다. 그치?”


소윤이와 시윤이는 평소에 잠 시간에 쫓겨 놀지 못하는 한이라도 풀듯, 다양한 걸 같이 하자고 했다. 웬만한 건 흔쾌히 들어줬다.


“아빠. 우리 어디라도 나가자여. 아빠도 일찍 왔는데”


소윤이와 시윤이의 요구가 강력했다. 아내에게 괜찮겠냐고 물어보니 상관없다고 했다. 출장 갔다 오면서 빵을 좀 사 왔는데, 소윤이와 시윤이 모두 그걸 먹어서 배가 많이 고프지는 않을 거 같았다. 아내에게 먹고 싶은 게 없냐고 물었더니


“뜨끈한 국물에 칼국수 같은 거?”


라고 말했다.


‘뜨끈한 국물에 칼국수 같은 건 그냥 칼국수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아내가 칼국수 가게 한곳을 제안했고 그러자고 했다. 한 5분 뒤에 마음이 변했다. 차 타고 가야 하는 곳 말고 걸어서 갈 수 있는 곳으로 가고 싶었다. 운전을 너무 많이 해서 그렇기도 했고, 시윤이가 왠지 잠들까 봐 그렇기도 했다. 동네에는 ‘그래, 여기’라고 할 만한 곳이 없다는 게 문제였다. 여기저기 찾아보다가 냉면이 유력한 후보로 떠올랐다.


“아빠. 냉면 먹자여. 냉면 먹고 싶어여”


소윤이가 냉면에 관한 기호가 생길 만큼 자주 먹었었나 싶었다. 아내가 먹고 싶은 음식과 너무 정반대의 음식이라 괜찮냐고 물어봤는데, 역시나 상관없다고 했다. 날이 꽤 덥길래 애들 옷을 가볍게 입혔는데 생각보다 바람이 차가워서 당황했다. 아내의 의견을 따라 겉옷을 챙기지 않았으면 꽤 곤란할 뻔했다.


냉면을 좋아한다는 소윤이의 말은 진실이었다. 시윤이는 탕수육과 케이크, 소윤이는 월남쌈과 면 요리를 가장 잘 먹는다. 소윤이는 배가 별로 안 고팠을 텐데도 냉면을 참 잘 먹었다. 물론 시윤이도 맛있게 먹기는 했는데, 끊어지지 않는 면발을 좀 힘들어했다. 아내와 나도 만족스럽게 먹었다. 아내와 나의 만족감을 결정하는 큰 요인은, 서윤이다. 서윤이가 이유식과 과자를 먹으며 평화롭게 있어 줬기 때문에, 아내와 나의 만족도도 기준치를 채웠다.


오랜만에 여유롭게 밤거리를 산책하니 좋았다. 퇴근 시간이 2시간 정도면 빨라져도 삶이 달라지겠다는, 다소 허망한 생각을 또 했다. 소윤이와 시윤이, 서윤이는 하고 싶은 걸 하면서 살아도 행복한 시대에 살거나, 하고 싶은 걸 하면서 사는 걸 위해 기꺼이 포기할 줄 아는 용기를 가지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그렇게 못 살아도 과연 애들이 배울 수 있을까 하는 의문도 들기는 했다.


시윤이는 오늘 낮에 울었다. 혼나서도 아니고, 떼를 쓰느라 그런 것도 아니고. 그리움 때문에.


시윤이가 아내에게 그리움이 뭐냐고 물어봐서, 엄마가 나중에 하늘나라 가면 만나고 싶어도 못 만나고 안기고 싶어도 못 안기고 만지고 싶어도 못 만나는데 그런 마음이 그리움이라고 설명해 줬다고 했다. 그랬더니 울음을 꾹꾹 참으면서 억지로 웃다가 결국 참지 못하고 아내에게 안겨 흐느꼈다고 했다. 아내가 영상으로 남겨놨는데, 그걸 보니 나도 마음이 뭉클했다. 내가 먼저 가는 것도 싫지만 나머지 중 누구 하나라도 먼저 가는 건 더 싫다.


아내는 머리가 아프다고 했다. 허리, 등, 목으로 기분 나쁜 ‘뻐근함’이 느껴지는, 요즘 들어 나도 많이 느낀 그 통증이었다. 약도 먹었지만 별로 효과가 없다고 했다. 자려고 누울 때까지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오늘 밤에 좀 편히 자면 나아질지도 모르지만, 편히 잘 확률이 현저히 적은 게 문제다.


그나마 서윤이가 오늘도 우리가 자려고 누울 때까지 깨지 않은 게 고무적이었지만, 그 시간에 아내도 자지 않았다. 그러고 보면 차라리 서윤이가 일찍 깨서 아내를 강제로 눕히는 게 차라리 피로회복에 더 도움이 되는 건가? 정신 건강에는 해로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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