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여성 최초 미국 대통령을 꿈꾼 힐러리 클린턴

리더를 성공으로 이끈 참모

by 미운오리새끼 민

힐러리 클린턴은 시카고 출신으로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녀는 보수적인 아버지보다는 자유분방하며 진보적인 어머니의 영향을 더 받고 자랐다. 그녀의 어머니는 힐러리에게 항상 목표를 크게 두라고 하였다. 아마도 이런 영향이 그녀를 미국의 첫 여성 대통령 후보로 만들었는지도 모르다.


그녀는 어렸을 때부터 정치에 관심이 많았었는데, 고등학교 때 공화당의 대통령 후보 배리 골드워터의 선거 사무실에서 일하기도 하였다. 이후 그녀는 명문 여대인 매사추세츠 웰즐리 대학교에 들어가 정치학을 배웠다. 대학을 다닐 때에도 그녀는 정치 활동을 꾸준히 이어가 공화당의 청년회 회장을 맡기도 하였다. 그녀는 공화당 지지에서 민주당으로 지지 당을 바꾸게 되었는데 1960년대 불거진 흑인운동과 베트남 전쟁 등이 영향을 주었던 것으로 보인다.


웰즐리 대학 졸업식 때 당시 학생 최초로 졸업연설을 하게 되었는데, 그녀는 기존 정치를 비판하며 여성들이 능력을 발휘할 시대가 올 것이라는 메시지를 남겼다. 아마도 이때부터 그녀는 여성 대통령을 꿈꿨는지도 모른다.

힐러리는 예일대 법학대학원에 입학하였으며 이곳에서 지금의 남편 빌 클린턴을 만나 결혼을 하였다. 힐러리가 클린턴을 선택했다고 할 정도로 그녀는 이미 대통령이 될 만한 인물을 자신의 남편으로 선택한 것이었다. 그녀가 빌 클린턴과 함께 졸업을 하기 위해 졸업을 늦춘 것만 보더라도 그녀의 승부사적 기질이 발휘되었던 것이다.


이후 둘의 정치적 관계는 상호보완적이면서도 각자 자신의 정치활동을 넓혀가며 성장해 나갔다. 힐러리는 자신의 프라이드와 정체성이 강했던 사람이었지만, 그것이 자신의 목표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면 과감히 바꿀 줄도 알았다. 대표적인 것이 결혼을 한 후에도 남편의 성을 따르지 않고 자신의 성을 계속 유지했던 것이다. 하지만 빌 클린턴이 1980년 주지사 선거에서 패배 후 1982년 다시 도전할 때에는 과감히 이를 포기하고 남편의 성으로 바꾼다고 발표하였다. 당시 보수적인 남부 유권자들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서는 힐러리 자신의 변화가 필요했던 것이었다. 그래서였는지 빌 클린턴은 주지사에 당선되었으며 이후 대통령 선거전까지 아칸소 주지사로 있었다.


빌 클린턴이 주지사로 재직할 당시 힐러리는 아칸소 주 교육표준위원회 위원장으로 임명되어 남편과 함께 본격적인 활동을 하였다. 그리고 지역의 변호사로서, 지역의 유력 인사로 활발한 활동을 하였다. 이 시기 그녀는 빈곤가정과 아동학대 등 아동보호에 많은 관심을 가졌었다.


1992년 빌 클린턴이 대통령에 당선되자 그녀는 더욱 활동 영역을 넓혀 갔다. 우선 백악관에서 그녀는 사무실 자리부터 다른 영부인과 다른 곳에 자리 잡았다. 그전에는 영부인들이 동관을 이용하는 것이 관례였으나 힐러리는 대통령 집무실과 가까운 서관에 자신의 사무실을 차렸던 것이다. 그녀는 단순히 영부인으로서 만족하기 위해 빌 클린턴을 대통령으로 만든 것은 아니었다. 그녀는 빌 클린턴을 통해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추진하려고 했던 것이다. 마치 미국에 두 명의 대통령이 있는 것처럼 그녀의 힘은 대통령만큼 강력했다고 할 수 있다.


그녀는 전미 헬스케어 팀장을 맡아 미국의 보건복지제도 개혁안을 주도하였다. 일명 '힐러리 케어'라고 하는 이 개혁안은 미국의 의료보험 정책을 획기적으로 바꿀 수 있는 정책이었다. 비록 의회의 승인을 받지 못해 통과되지는 못했지만 후에 '오바마케어'의 모태가 되었다. 이후 그녀는 빈곤아동의 의료혜택을 지원하기 위한 '아동건강보험 프로그램 법안'을 제출하여 의회의 승인을 받아 내었다.


힐러리 클린턴과 빌 클린턴의 이런 상호 협력적인 관계는 빌 클린턴의 성추문 스캔들로 한때 위기를 맞기도 하였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힐러리는 남편을 옹호하고 지지하였으며, 스캔들이 사실로 드러났을 때에도 모두의 예상과 다르게 클린턴과의 결혼생활을 유지한다고 하였다.


힐러리에게 빌 클린턴은 자신의 정치 실현을 위해서는 아직까지는 유효한 동반자였다. 또한 그녀로서는 빌 클린턴이 성공적으로 임기를 마쳐야만 자신에게도 기회가 온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탄핵의 위기까지 갔었을 때에도 그녀가 클린턴에게 보여줬던 믿음과 신뢰, 그리고 한 여자로서 가정을 지키려고 노력하는 그녀의 모습은 빌 클린턴 때문에 희생하는 이미지로 비치면서 미국 사회에 잔잔한 감동과 동정 여론을 형성하였다. 당시 그녀의 지지도는 빌 클린턴 대통령보다 더 높았었다.


전화위복이라고 이후 그녀는 여세를 몰라 자신만의 독자적인 정치 인생을 본격적으로 시작하였다. 그 첫 번째 시험대가 뉴욕 주 상원의원의 출마였다. 힐러리는 빌 클린턴의 임기가 끝나갈 무렵 뉴욕 주 상원의원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이는 선거에 출마한 최초의 영부인이라는 점과 뉴욕 주 최초의 여성 상원의원이라는 기록을 세웠으며, 그녀가 뉴욕 주 상원의원으로 재임하는 동안 70%대의 높은 지지율을 보였었다.


2008년 미국 여론은 이미 다음 대선의 가장 유력한 후보로 힐러리를 지목하였다. 이때만 하더라도 그녀를 능가할 인물이 민주당에서는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이런 압도적인 지지를 바탕으로 미국 최초의 여성 대통령에 도전을 하였지만, 오바마에게 경선에서 패배를 하며 고배를 마셨다. 당시 너무 확고부동한 부동의 1위를 달리고 있었던 상황에서 이름도 잘 알려지지 않았던 신출내기 오바마 상원의원을 우습게 보았던 것이 패착의 요인이었다. 어쩌면 위협적인 경쟁상대가 없었고 자만 때문에 스스로 무너졌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힐러리는 오바마의 요청으로 국무장관에 임명되면서 재기에 성공하였다. 오바마의 임기와 그녀의 나이를 고려할 때 국무장관은 그녀를 위한 오바마의 배려로 보였다. 그녀 또한 초기에는 국무장관이 공직자로서 마지막 자리라고 하였다. 하지만 오바마의 재선 과정에서 빌 클린턴이 오바마를 적극적으로 지원해서 당선될 수 있었다. 이후 힐러리가 다음 대선에 나올 수 있다는 관측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사실 민주당 입장에서는 뚜렷한 주자가 없는 상황에서 인지도와 지지도가 높은 힐러리 카드를 버리기는 아까웠을 것이다.

힐러리는 마침내 2016년 대선에 참여하였으며 버니 샌더스와 경쟁에서 밀려날 수 있었지만 오바마에 의한 학습효과 때문이었는지 끝까지 승기를 놓치지 않고 여성 최초 대통령 후보에 올랐다. 비록 대선에서 트럼프에게 패배하여 최초의 여성 대통령 도전은 다음으로 미루어졌다.


선거기간 빌 클린턴은 힐러리가 대통령이 될 수 있도록 유세현장에서 그녀를 도왔었다. 두 사람의 동지적 관계는 아직도 유효하게 작동을 하였던 것이다. 힐러리와 빌 클린턴 모두 누가 더 뛰어나다고 할 수는 없지만 그들은 서로에 대해 잘 알고 있었으며 서로가 필요한 존재라는 것도 잘 알고 있었기에 마지막까지 서로를 위해 헌신하고 노력할 수 있었던 것이다.


PS : 자신의 꿈을 위해 자신의 꿈을 잠시 포기하고 다른 사람을 밀어준 경험이 있나요? 아니면 이럴 경우 여러분은 어떻게 하겠습니까?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한신에게 천하삼분론을 주장한 괴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