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거리

5. 사랑에는 시작과 끝이 없다. 5-3.

by 미운오리새끼 민

차 안에서 보는 바다와 이렇게 나와서 보는 바다는 역시 다른 거 같아요. 바다 냄새도 맡을 수 있고, 파도 소리와 바람도 느낄 수 있으니까요. 그나마 햇볕이 있어서 조금은 찬바람을 막아주는 거 같아요. 엄마는 계속 불안한가 봅니다. 아니면 추워서 떨고 있는지도 모르겠구요. 겨울 칼바람이 매섭긴 해요. 옷 속까지 파고들고 있으니까요. 아까 규석이와 비슷한 남자를 본 거 같아요. 그래서 두렵기도 했고, 살짝 긴장 했어요. 규석이었으면 좋았을 거 같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냥 얼굴이라도 봤으면 하는 마음은 왜 드는 건지 ……. 근데 정말 규석이고 저를 알아본다면 그건 또 싫어요. 지금 저의 이런 모습을 보여주기 싫으니까요. 남자 둘이 바다를 보러 왔나 봐요. 벌서 그들은 저 멀리 가고 있네요. 제 걸음의 세배는 빠른 거 같아요. 친구가 있었으면 좋았을 거 같은 생각이 드네요. 엄마가 있어도 제 마음을 다 채워주지 못하는 뭔가가 있는가 봐요. 아까 편의점에서 봤던 여자도 부럽고 왜 그럴까요? 둘이면 둘이라서 부럽고 혼자면 혼자라서 부럽고. 엄마가 이제 가자고 재촉을 하네요. 전 쬐금만 더 있고 싶은데 말이죠. 이제 정말 다시는 못 볼 거 같아 조금이라도 더 있고 싶거든요. 하지만 엄마의 협박에 결국 포기하고 가야 할 거 같아요. 정말 치사하죠? 이제 아무대도 못 간다는 말이 제일 무서워요. 다시 올 수 없겠죠? 마음속에 더 많은 것을 담기 위해 눈을 크게 뜨고 바다를 한 번 더 바라봅니다.


“준비는 다 끝났어?”

“응 한다고 했는데 그래도 계속 뭐가 나오는 거 같아.”

“원래 그래. 살면서 하나씩 하면 돼.”

지원이는 먼저 해본 경험자의 입장에서 말해주고 있었다.

“기분은 어때?”

“지금은 담담해. 괜찮아.”

“그래 걱정했는데 잘 됐네. 준비 잘하고 결혼식장에서 보자.”

서영이는 지원이하고 통화를 끊고 침대에 누웠다. 멀게 만 느껴졌던 결혼식이 이제 한 주 앞으로 다가왔다. 정신없이 뭔가를 한 거 같긴 한데 지나고 나면 또 뭔가가 생각나곤 했다. 지원이 말대로 다 준비해서 시작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설렘과 두려움이 교차하는 거 같았다.

‘행복하게 잘 살 수 있을까?’

형준씨의 선한 눈빛이 떠올랐다. 언제나 다정다감하고 항상 자신을 먼저 배려해 주는 형준씨를 볼 때면 편안한 마음이 들었다.

‘문제는 나야.’

서영이는 옆으로 누워 핸드폰을 만지작거렸다. 방금 집 앞까지 바래다주고 간 형준씨가 생각났다. 그냥 보낸 게 미안했다. 서영이는 형준이에게 전화를 걸었다.



버킷리스트에 하고자 했던 일들이 하나씩 지워져서 이제 얼마 남지 않았네요. 기분이 좋아요. 하나만 빼 놓고는요. 규석이를 다시 만나는 것은 못 할 거 같으니까요. 겨울 바닷가 이후 더 간절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거리를 멀리하려 하면 할수록 간절해지는 이유는 왜 그럴까요? 사랑하는 사람 사이에서 아름다운 거리란 있는 걸까요? 지금까지 독하게 맘먹고 여기까지 왔는데 마지막에 흔들리는 것은 어쩔 수 없나 봅니다. 버킷리스트를 볼 때마다 버킷리스트에서 뺄까 말까를 고민하는 일도 수십 번을 하는 거 같아요. 결국에는 빼지 못하고 지금껏 갖고 왔네요. 요즘은 더 마음이 약해지는 거 같아요. 엄마의 화장대 앞에 앉으면 자연스럽게 화장을 합니다. 그러다 혼자 웃곤 해요. 규석이가 지금 내 모습을 보면 많이 실망하겠죠? 한동안 보지 않던 메일을 열어봤어요. 스팸메일 속에 규석이의 메일을 찾는 것이 이제는 쉽지 않네요. 최근 들어서는 없는 거 같아요. 규석이도 포기를 한 걸까요? 허긴 이제 그럴 만도 하죠. 아니면 다른 사람이 생겼을까요? 사실 만나자고 하면 거절당할까봐 못하겠어요. 저를 잊었다고 하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리고 지금 사랑하는 누군가가 있다고 하면 ……. 그럼 쿨하게 축하한다고 말해줘야 할까요? 자신이 없어요. 상상만으로도 눈물이 날 거 같아요. 그 자리에 있는 것이 창피할 거 같아요. 나만 아직도 좋아하고 있다는 것이 자존심도 상할 거 같고. 저도 만나는 사람이 있다고 거짓말을 해야 할까요? 엄마는 한번 연락해 보라고 하는데 용기가 안나요. 보고 싶은 마음과 용기의 싸움 같아요. 요즘은 하루에도 몇 번씩 전화기를 들었다 놨다 해요.

계절의 변화는 정말 신기해요. 봄이 오고 있는 신호를 알려 주니까요. 아직 꽃샘추위가 봄을 시샘 하지만 꽃들은 아랑곳 하지 않고 꽃망울을 피울 준비를 하고 있어요. 점점 기운이 없어요. 저도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느끼고 있어요. 마치 시한폭탄의 시계처럼 예정된 시간을 향해 달려가는 거 같아요. 누가 와서 기폭장치를 제거하고 절 살려주었으면 하는 바람도 있었지만 이제는 그런 희망은 영화 속에서나 나오는 장면 같아요. 두려움의 시간 같아요. 아무리 받아들이려고 해도 죽음 앞에 초연해 지는 것은 아직은 힘든 거 같아요. 용기를 내서 다시 한 번 핸드폰을 들어 번호를 눌러 봅니다. 이제 발신 버튼만 누르면 되는데 …….



가영이는 매대에 서서 어스름한 바다를 바라보고 있었다. 동해바다의 아쉬움은 해질녘 붉게 물드는 바다를 볼 수 없다는 것이었다. 창밖의 어둠이 점점 바다를 검푸르게 만들고 있었다.

“언니 저 왔어요. 퇴근 준비하세요.”

혜진이가 편의점 문을 열면서 웃으며 가영이에게 인사를 했다. 가영이는 시계를 봤다. 아직 10분이 남았다. 가영이는 조끼를 벗고 정산을 시작했다.

꽃샘추위는 여전히 바닷바람을 칼바람으로 만들었다. 가영이는 커피를 두 손에 꼭 들고 벤치에 앉아 한 모금 마셨다. 온 몸으로 따뜻한 기운이 감돌았다. 가영이는 일을 마치고 바닷가에 나와 멍하니 바다를 보는 것이 좋았다. 해변에는 몇몇 사람이 바다를 바라보며 앉아 있거나 서성거리고 있었다. 가영이는 핸드폰을 만지작거렸다.

“행복하니?”

문득 지난번 범수가 와서 물어본 말이 생각났다. 그날도 이 자리에서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가영이는 마음이 편했다. 그리고 자신의 자리는 복잡하고 바쁜 서울이 아니라 여기처럼 한 적한 곳이 좋았다. 하지만 뭔가 허전함은 별개의 일이었다. 그게 무엇인지 아직 잘 알지 못했다. 가영이는 헛웃음이 나왔다. 다시 바다를 바라봤다. 밤하늘의 별이 보이기 시작했다. 바다 사진을 한 컷 찍어 전송했다.


엄마의 화장대 앞에 앉아서 화장을 하고 있습니다. 정말 오랜만에 하는 화장입니다. 옅은 로즈 빛깔의 립스틱도 발라 봅니다. 가슴이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뛰고 있습니다. 얼마 만에 느껴 보는 설렘인지 모르겠어요. 한편으로는 불안하기도 해요. 오늘은 버킷리스트의 마지막, 규석이를 만나러 가는 날입니다. 제 모습을 보면 뭐라고 할까요? 절 못 알아보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저의 이런 모습을 보고 도망가는 건 아니겠죠? 몇 번을 망설이다 규석이에게 전화를 했네요. 규석이의 목소리가 지금도 생생하게 귓가에 들려요.


“여보세요?”

정현이는 규석이의 목소리에 심장이 터질 거 같아 말을 하지 못했다.

“여보세요?”

이쪽에서 반응이 없자 규석이의 목소리가 한 번 더 들렸다. 정현이는 말을 하려고 했지만 소리가 입가에서만 맴돌고 있었다.

“여보세요? 전화 끊습니다.”

“나~야.”

정현이는 모기 소리보다 작은 목소리로 겨우 말을 했다.

“정현이?”

규석이의 목소리가 조심스럽게 들렸다.

“…….”

“정현이니?”

규석이의 목소리가 떨렸다.

“잘 지냈어? 번호 바꿨는 줄 알았는데 그대로네.”

정현이의 목소리도 떨렸다. 하지만 아까보다는 목소리가 켰다.

“너 때문에 안 바꾸고 있었지.”

규석이의 목소리는 여전히 떨렸다.

“고마워.”

“뭐가 고마워? 정현아, 어디니? 내가 갈게.”

규석이의 목소리가 다급하게 들렸다.

“아냐. 그러지 마.”

“난 지금 니가 어떤 모습이건 상관없어. 일단 보자.”

규석이는 안달이 난 사람 같았다.

“나도 니가 보고 싶지만 지금은 너무 그래.”

정현이의 목소리는 떨리면서도 여전히 작고 소심했다.

“뭐가? 많이 아프니?”

규석이의 목소리가 좀 잦아들었다.

“응. 많이 아파.”

“병원이니? 그래서 못 보는 거야?”

“아니야.”

정현이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럼 잠깐이라도 볼 수 없니?”

이제는 애원하듯 말했다.

“규석아 나 오래 통화 못해. 내가 다시 연락할게. 미안해.”

정현이는 더 이상 쏟아지는 눈물을 참을 수 없었다.

“잠깐만, 정현아. 내가 전화해도 돼?”

규석이는 전화를 끊으려는 정현이를 사정하듯 말했다.

“아니, 그러지 마. 내가 다시 할게.”


고마웠어요. 절 잊지 않고 기다려 줘서. 핸드폰 번호가 바뀌어 있었으면 많이 실망했을 거여요. 그건 절 잊었다는 의미이기도 하니까요. 아니 어쩌면 맘이 후련했을 수도 있구요. 그럼 이제 규석이를 생각할 이유도 없어지니까요. 뭐가 됐건 지금은 마음이 후련해요. 그리고 지금 그를 만나기 위해 화장을 하고 있어요. 근데 자꾸 눈물이 나서 화장이 번져요. 눈 화장은 하지 말아야 할 거 같아요. 시계를 봅니다. 이제 출발해야 할 시간이 다가오고 있어요. 엄마는 거실에서 절 기다리고 있어요. 혼자가고 싶은데 엄마는 반대를 합니다. 규석이가 뭐라 할지 걱정입니다. 엄마는 절 부축해서 휠체어에 앉힙니다. 전 엄마에게 미소만 짓습니다. 엄마는 여전히 못마땅한 모습입니다. 이제는 엄마 없이는 정말 아무것도 할 수가 없네요. 하루가 다르게 몸이 축 쳐지는 거 같아요. 규석이를 꼭 만나야 하냐고 엄마가 계속 묻습니다. 그건 저도 마찬가지여요. 왜 지금 이 상황에서 그를 꼭 만나야 할까요? 저도 모르겠어요. 다만 지금 안보면 영원히 못 볼 거 같아요. 그게 두려워요. 그거 아세요? 보고 싶은 마음보다 두려움이 더 크다는 거. 엄마 차에 겨우 앉았어요. 이제 출발만 하면 됩니다. 엄마의 심기가 오늘따라 무척 불편해 보여서 저도 맘이 졸이네요.

“엄마, 미안해.”

엄마는 아무 말이 없습니다. 제 얼굴도 안보네요. 차가 출발합니다.


규석이는 아침부터 분주히 움직였다. 머리도 말끔히 하고 옷을 무엇을 입어야 할지 옷장을 뒤지고 있었다. 입에서는 콧노래가 흥얼거렸으나 마음은 설렘으로 콩닥거리고 있었다.

“양복을 입고 갈까? 정현아, 나 이제 어엿한 회사원이야.”

규석이는 양복을 몸에 대고 거울을 보면서 얘기 했다. 규석이는 정현이에게 어엿한 직장인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

“아니다. 이건. 정현이는 아직 졸업도 못했는데 괜히 자랑하는 거 같네.”

규석이는 다시 옷장을 뒤지지 시작했다. 그러다 옷장 속에 정현이가 사준 커플 티가 보였다.

“규석아 우리 이제 진짜 연예하는 거다. 친구 아니고.”

“갑자기 그러려고 하니 아직은 좀 쑥스러워.”

“그래서 내가 우리 커플 티 준비했어. 어때?”

대학 1학년 때 정현이의 모습이 떠올랐다. 한동안 꾸준히 입었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입지 않았던 거 같았다. 규석이는 옷을 입고 거울을 봤다. 몸이 약간 불어서 그렇지 아직은 입을 수 있었다. 규석이는 집을 나와 약속 장소로 향했다.

‘아직도 그곳은 그대로 있겠지?’

규석의 몸은 날아갈 듯 가벼웠다. 토요일 오후라 거리는 사람들로 붐볐다.


계속

이전 15화아름다운 거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