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더를 성공으로 이끈 참모
삼국통일을 이룩했던 신라의 왕 하면 태종무열왕 김춘추보다 김유신으로 잘못 알고 있는 이들이 더러 있다. 물론 삼국통일이 이루어진 것은 문무왕 때 일이니 두 사람 다 정답은 아니다. 신라시대에 어느 왕보다도 더 유명했던 인물이 김유신이기에 사람들의 인식이 그렇게 각인되었는지도 모른다.
김유신이 없었다면 삼국통일은 이루지 못했을 정도로 삼국통일에 있어서 중추적인 역할을 했던 인물이 바로 김유신이다. 그가 가진 영향력도 컸기에 왕과 다름없는 존재가치를 드러냈던 것이 아닌가 싶다.
하지만 그는 결코 왕위를 노리거나 탐하려 하지 않았다. 오로지 2인자의 자리에서 자신의 역할을 충실히 했었기에 마지막 여생까지 안정되게 살 수 있었고, 죽어서도 흥무대왕으로 추대될 정도로 왕과 다름없는 영화를 누렸던 것이다. 실제 그의 무덤을 가보면 그 당시 왕과 다를 바 없는 무덤의 규모와 양식 등은 김유신의 위치가 어떠했는지를 가늠해 볼 수 있다.
김유신은 금관가야 출신의 왕족의 후예였으며, 어머니 또한 신라 왕족의 후예였다. 15세에는 화랑이 되어 무인으로 성장을 하였다. 이후 크고 작은 전투에서 승리를 하면서 그의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했으며, 왕과 백성들의 신임과 존경을 받기 시작했다.
김유신은 신라의 정치세력들과 교유관계를 맺기 시작하며 신라의 중앙정치 무대로 진출하는데, 후에 태종무열왕에 오르는 김춘추와의 만남은 김유신의 운명을 바꾸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사실 김춘추는 진골 출신으로 이제껏 성골이 왕위를 이어 오던 관례를 깨고 왕위에 오른 신라 최초의 인물이다. 그런 그가 왕위에 오를 수 있었던 배경에는 김유신의 역할이 상당했었다.
둘은 첫 만남에서부터 서로를 파악하고 서로가 필요한 인물임을 직감했다. 즉, 김유신의 입장에서는 김춘추를 등에 업고 신라 정치의 중앙무대로 올라설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할 수 있다고 판단했을 것이며, 김춘추 또한 당시 혁혁한 공을 세우고 있는 무장 김유신의 지지를 바탕으로 권력을 잡을 생각을 했던 것이다.
김유신의 동생이 김춘추와 혼인관계를 맺으면서 둘 사이는 더욱더 긴밀해졌다. 이후 김춘추가 원병을 요청하려 고구려에 갔다가 볼모로 잡히는 신세가 되었을 때에도 김유신은 그를 구원하기 위해 출병을 준비하기까지 했다. 이러한 노력으로 김춘추는 신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진덕여왕 사후 왕위를 잇는 문제가 발생하였을 때 두 사람의 결속력은 더욱 빛을 발휘한다. 처음에 신하들은 알천(閼川)이 왕위를 계승해야 한다고 하며, 그를 추대하였지만 알천이 김춘추를 추천하였다. 이 과정에서 김유신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게 작용했다. 알천이 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이를 김춘추에게 양보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당시 막후 실력자인 김유신의 권위에 눌린 것이다. 김유신이 이전의 선덕여왕 때에도 비담의 반란군을 제압한 사실 등을 미뤄 봐도 군권을 쥐고 있던 김유신의 지지 없이 왕위를 물려받는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했던 것이다.
김춘추가 왕위에 오르고 나자 김유신의 지위는 더욱더 오르게 되었으며, 김춘추의 셋째 딸과 결혼까지 하여 두 사람의 관계는 더욱더 긴밀해졌다. 김유신은 이후 나당연합 전선을 이끌고 백제를 무너뜨렸으며, 종국에는 고구려까지 멸망함으로써 삼국통일을 이루는데 큰 공헌을 하였다.
김춘추 사후 왕위에 오른 문무왕은 통일 후 김유신을 태대각간(太大角干)으로 임명하였는데, 이는 김유신만을 위해 만든 관직이었다. 신하로서는 더 오를 것이 없는 그에게 왕과 같은 지위를 부여한 것이나 다름없는 결정이었다. 이후 김유신은 정치 일선에서 물러났지만 나라의 중요한 대소사는 문무왕도 그의 자문을 구할 정도로 막후 실력자로 그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죽어서도 왕과 같은 지위를 누렸으며, 살아있을 때에도 왕조차도 그를 함부로 대하지 못하였지만, 김유신은 끝까지 왕위를 찬탈하려고 하는 욕심이나 왕의 권위에 도전하지는 않았다. 아마도 마음만 먹었다면 언제든지 가능했었을 수 있었을 것이다. 모든 군권을 갖고 있었으며, 백성들로부터 신망을 받고 있었고 자신을 지지하는 세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이미 왕과 매제와 장인으로 얽혀 있는 사이이고, 아무리 자신이 군권을 갖고 있다 할지라도 신라의 귀족 세력과 대립한다는 것은 위험부담이 됐을 수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왕이라는 직책을 갖고 있지 않을 뿐이지 왕과 같은 지위를 누리고 있는 상황에서 굳이 왕위에 도전한다는 것은 자칫 모든 것을 잃고 가족까지 멸망의 길로 갈 수 있는 위험한 모험이었던 것이다.
금관가야 왕족 출신의 후예로서 왕위에 대한 욕심이 있었을지는 몰라도, 어려부터 신라 귀족세력에 편입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던 그의 행동을 봤을 때 그의 목표는 왕이 아닌 신라에서 인정받는 귀족세력이 되는 것이었을 것이다. 그렇기에 그는 항상 나라를 먼저 생각하고 왕에게 충성스러운 신하였던 것이다.
이는 개인보다는 국가를 먼저 생각하는 그의 강직한 성품에서도 나타난다. 전장에서 돌아오자마자 바로 또 전쟁터로 나갈 때 집 앞을 지나면서도 들르지 않고 지나쳤던 일화나, 아들 원술이 전장에서 도망친 후 왕에게 죽임을 요청하고 자신의 집에서 내쫓은 일 등은 그가 사사로운 감정보다는 국가를 먼저 생각했다는 점을 보여준다.
물론 이런 처사가 옳고 그르냐 하는 부분은 논란의 여지가 있다. 가족도 따스하게 챙기지 못하고 저버리는 사람이 국가를 운운하는 게 맞느냐 하는 부분에서는 사람마다 차이점이 있을 수 있지만, 당시는 전시상황이고, 전장에 나와 있는 부하들도 가족을 그리워하기는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자신이 그런 행동을 하지 않았을 경우에 부하들의 기강을 잡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시대나 상황에 따라 참모의 행동도 달리해야겠지만 당시 참모로서 김유신의 행동은 국가가 무너질 경우 가족의 안위도 장담할 수 없다는 판단하에 그러한 행동을 하였다고 보인다.
김유신에 대한 평가는 삼국을 통일한 영웅에서부터 외세를 끌어들여 고구려의 영토를 영원히 되찾지 못하게 한 매국노라는 극과 극을 달리하는 여러 평가가 있지만, 삼국의 혼란스러운 시기에 2인자로서 자신의 역할을 충실히 하며 김춘추를 왕으로 옹립하고, 문무왕이 삼국통일을 할 수 있도록 지원하여 두 왕 모두를 성공으로 이끌며, 자신이 누릴 수 있는 최고의 자리까지 오른 2인자였다.
PS : 절대권력을 가진 참모에 대해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