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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운오리새끼 민 Dec 11. 2018

신하지만 한(漢)나라를 무너뜨리고 나라를 세운 왕망

리더에게 나쁜 참모

왕망은 전한의 신하였지만, 한나라를 무너뜨리고 자신의 나라인 신(新) 나라를 세운 인물이다. 중국 역사상 최초로 왕망은 피를 흘리지 않는 무혈혁명으로 선양을 받아 나라를 세웠다. 하지만 말이 선양이지 실상은 어린 황제에게서 황위를 빼앗아 나라를 세운 거나 다름이 없었다. 

왕망은 어린 시절은 불우했다. 어릴 적 아버지를 여의고 가난하게 자랐지만, 자신의 이복 고모가 왕비였고, 큰아버지 왕봉의 도움으로 한나라의 관료가 될 수 있었다. 왕봉의 신임을 얻은 왕망은 이후 승승장구하였으며, 왕봉이 죽은 후에는 대사마의 지위까지 올랐다. 

이때부터 그의 기세는 하늘을 찌를듯하여 감히 조정에서 그를 위협하는 자가 없었다. 그는 권력의 달콤한 맛을 느끼며 자신의 권력을 최대한 유지하려고 노력하였으나, 성제가 죽고 애제가 황제로 등극하자 애제가 성제의 외척세력들을 배제하면서 왕망은 조정에서 밀려났었다. 이것으로 왕망의 시대는 끝나는 듯했다. 

하지만 애제가 죽자 황후는 다시 왕망을 불러들여서 섭정을 시켰다. 왕망은 자신에게 다시 온 기회를 절대 놓치지 않았다. 그는 본격적으로 자신의 의도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왕망은 우선 자신의 권력기반을 다지기 위해 인재를 모으기 시작했다. 주변의 빈객과 자신에게 찾아오는 선비들을 예로써 대하고, 그들에게 자신이 받은 하사품을 나눠주며 그들의 환심을 샀다. 

그리고 본인은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검소한 삶을 살았다. 이러한 그의 노력은 주변 사람들에게 그가 청렴하고 검소한 사람으로 인식하게끔 만들었다. 이처럼 왕망은 앞에서는 이를 다 거부하는 듯하였지만, 뒤에서는 주변 사람들을 시켜 자신의 청렴과 공덕을 칭송하게 하였다. 

이후 왕망은 조정의 반대파들을 차례로 제거하였으며, 자신의 딸을 황후로 만들어 정치적 기반을 다졌다. 이때부터 왕망의 정치적 야심은 본격적으로 진행되었다. 그는 평제가 죽자 두 살밖에 되지 않은 영을 황제로 앉히고 자신은 가(假)황제의 지위에 올랐다. 

과거 한신이 제나라를 점령한 후 자신을 제나라의 가(假)왕으로 앉혀 달라고 유비에게 했던 것처럼 왕망은 황제 영이 어리다는 이유로 조정의 안정을 위해 자신을 가황제로 만든 것이다. 자신이 황제가 되기 위한 수순을 차츰차츰 밟아 나가는 것이었다. 

왕망은 자신을 따르는 신하들과 지지세력들을 동원하여 한나라의 명운이 다했으며 한나라를 대신할 인물이 자신임을 홍보하였다. 이후 그는 어린 황제 영에게 양위하는 방식으로 황제에 등극하여 신(新)나라를 세웠다. 말이 양위이지 실제는 어린 황제와 그 주변 신하들을 위협하여 황위를 빼앗은 것이었다. 

가황제에서 진짜 황제로 등극한 왕망은 유학자로 살아왔던 만큼 법을 중시하였으며, 공사를 구분하여 일을 처리하였다. 그러하기에 자신의 아들과 손자까지도 법을 어겼다는 이유로 처형을 하였다. 하지만 이는 자신이 권력을 잡기 위해 자신의 자식까지도 이용했다는 주장도 있다. 

마치 제나라 때 역아가 환공이 사람고기 빼고는 다 먹었다고 하자 자신의 세 살 난 아들을 죽여 삶아서 요리해 바친 것과 다름이 없는 것이다. 아들까지 죽여서 왕의 환심을 사려고 하는 사람이나 자신의 아들을 죽여서 법을 지키려고 했던 이유는 모두 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이처럼 왕망은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라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그러기에 천륜까지도 버릴 수 있었던 것이다. 사실 황제가 되기 위해 무수히 많은 사람을 죽이고 협박했던 그에게 천륜 따위는 거추장스러운 존재였는지 모른다. 어찌 보면 권력이란 피도 눈물도 없는 참으로 무서운 것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왕망이 집권하고 나서 자신의 사리사욕만 채우려 하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그는 왕전제를 실시하여 토지의 사사로운 거래를 금지시키고, 자영농민들에게 토지를 나눠주어 토지의 불평등을 해소시키려고 노력하였으며, 노비에 대한 매매를 금지하였다. 또한 그가 유학자였던 만큼 유학을 장려하여 후한 시기에 유학도들이 많아졌다. 

왕망은 부의 불평등을 해소하려고 노력했던 사회개혁적 사상가였으며, 유학사상을 바탕으로 하는 정치를 실현하려고 한 이상주의자였다. 비록 자연재해로 인해 민심이 흉흉해 지면서 곳곳에서 반란이 일어나 그의 정치는 오래가지는 못하였지만, 그런 것만 아니었다면 왕망의 세운 신나라는 오래 계속되었을 수도 있었다. 

여기서 우리는 왕망이 집권 후 실행했던 수많은 정책들을 왜 신하였을 때는 실행할 수 없었을까? 그렇게 했다면 왕망은 위대한 신하이자 참모로 기록되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있다. 아마도 당시 혼란기에 신하들 내에서도 다양한 목소리들이 나오고 있었을 것이며, 그들 나름대로 권력의 암투에 사로잡혀 있지 않았을까 싶다. 

그 속에서 자신의 이상 정치를 실현한다는 것은, 이미 한번 권력에서 밀려나 본 경험을 한 이상 자신이 권력을 잡고 있지 않으면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 아닌가 싶다. 리더를 위해 일한다는 것은 리더의 보호를 받아 가며 일을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 울타리가 사라지면 참모 입장에서도 자신을 보호할 수 있는 벽이 없는 것이다. 

결국 새로운 보호막을 칠 수밖에 없는 것인데, 그게 다른 리더의 울타리 안에 들어가거나 참모 자신이 보호막을 치기 위해 리더가 되는 것이다. 왕망은 후자를 택했던 것이고, 처음 그의 선택은 좋았던 거 같으나 그 끝이 좋지 않았으니 참모로써 그의 이상 정치도 결실을 보지 못했다. 

PS : 왕망과 주나라 주공은 나이 어린 왕을 모셨다. 둘의 차이점과 공통점은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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