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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모로써의 풍도 1. 풍도에게 있어서 주군이란?

리더를 성공으로 이끈 참모

by 미운오리새끼 민

불사이군(不事二君)이란 말이 있다. 이 말의 뜻은 한 사람이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 것이다. 과거 시대에는 충(忠)을 강조했기 때문에 신하는 오로지 한 임금만을 주군으로 삼고 평생을 사는 것을 올바른 도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두 명도 아니고 10명 이상의 군주를 섬긴 사람이 있다면 믿을 수 있을까? 그것도 현재가 아닌 과거 천년 전의 중국의 상황이었다면 말이다.

풍도는 중국의 5대10국 시대에 다섯 왕조에서 12명의 군주 밑에서 참모로 일을 했던 관료였다. 한 사람이 한 군주를 모시기도 힘든 시기에 그는 후량(後梁)을 제외한 후당(後唐), 후진(後晉), 요, 후한(後漢), 후주(後周) 등 다섯 왕조에서 유수광, 이존욱, 이사원, 이종후, 이종가, 석경당, 석중귀, 야율덕광, 유지원, 유승우, 곽위, 시영 등 열두명의 군주를 모셨다.

사실 5대10국 시대는 한나라가 멸망하고 난 후 다섯 왕조와 지방정권 10국이 할거하고 있었던 혼란의 시기였으며, 수많은 사람들이 전쟁의 상황 속에서 이유 없이 죽어나가고 있었다. 그런 혼란의 시기에 자신의 수명을 다하며 삶을 무사히 마친 사람이 많지 않았는데 풍도는 재상으로서 12명의 군주를 모시면서 삶을 무사히 마쳤던 것이다.

이처럼 여러 왕조에서 여러 군주를 모셨다는 것 자체가 화제임에 분명하다. 세계 어느 나라의 사례를 보더라도 풍도와 같은 사례가 있을까 싶다. 아무튼 풍도의 경우처럼 여러 주군을 모신다는 것 자체가 보기 힘든 사례가 아닌가 싶다. 그리고 앞서도 말했듯이 과거에는 한 주군을 모시는 것을 미덕으로 여겼던 터라 풍도의 사례는 지금도 그 평가가 다양하다. 시류에 편승한 변절의 귀재라는 평가와 난세의 시대에 백성을 위해 일했던 훌륭한 재상이라는 평가 등 그 평가에 있어서도 극과 극을 달리하고 있다. 이는 시대에 따라 역사적 평가가 다르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역사에 가정이란 존재하지 않듯이 정답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기에 한 시대 한 인물에 대한 평가가 같은 시대에도 사람에 따라 다양하게 나타나는 것도 바로 이런 이유에서다. 오직 지금 현시대를 살고 있는 사람들이 그 시대에 맞게 재해석하고 평가하여 지금의 시대에 반영하는 것이 가장 합리적인 해석이 아닌가 싶다.

이러한 사례는 우리 역사에서도 많이 나타나고 있다. 조선 세조 때 사육신이 역적에서 숙종 때부터 시작하여 정조 때 완전히 복권에 이르러 충신으로 바뀐 사례나 병자호란 때 주화파인 최명길에 대한 평가가 오늘날 새롭게 재조명되는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다.

사실 숙종 때 사육신과 단종이 복원된 이유를 살펴보면 당시 숙종에게는 지지기반이 미약한 경종을 위해 자신의 사후에 경종을 지켜줄 든든한 신하가 필요하였다. 그리기 위해서는 변절하지 않고 어린 단종을 지켜준 사육신 같은 충신의 사례가 가장 적절하였다. 숙종은 조선 왕조 중 장자상속의 정통성을 완벽히 갖춘 보기 드문 사례였다. 그의 아버지 현종부터 이어진 장자 상속으로 숙종은 신하나 왕족들에게 휘둘리지 않고 강력한 왕권을 행사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의 아들 경종은 달랐다. 경종은 정실에서 얻은 아들이 아닌 장희빈의 아들이었고, 어머니가 아버지로부터 사약을 받고 죽은 점 등이 향후 왕위 계승에 있어 정통성 문제로 비칠 수 있었다. 이런 아들을 보호하기 위해 숙종은 사육신 카드를 썼다고 볼 수 있다. 즉, 어제의 역적이 충신으로 돌변하는 상황이 발생한 것이다.

우리가 역사를 공부하는 이유가 과거 역사를 통해 지금 살고 있는 시대를 바르게 살기 위한 것인 만큼 지금 시대에 맞게 역사를 해석하면 된다. 풍도 또한 지금 시대에 맞게 그를 재 해석하면 되는 것이며, 그가 잘 한 부분에 대해서 우리 시대에 어떻게 적용할 것인가 하는 문제로 접근하면 되는 것이다.

당시 풍도는 임금이 백성을 편안하게 하지 못하면 신하라도 백성을 편안하게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아마도 풍도가 끝까지 염두에 둔 것은 임금보다는 백성이었던 것이다. 이를 다시 생각하면 그가 모시는 주군의 대상은 임금이 아닌 백성이었던 것이다. 그런 관점에서 본다면 그는 한 번도 주군을 바꾸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당시 풍도에게 있어서 중요했던 것은 임금이 아니라 백성이었다. 풍도는 맹자의 "백성이 가장 귀하고, 사직은 그다음이며, 임금은 가장 가볍다"는 말의 의미를 가장 잘 이해하고 실천했던 인물이다. 즉, 나라의 근간인 백성이 중요하지 임금이 백성보다 더 중요할 수 없다는 것이다. 정치의 기본은 임금이 아닌 백성들이 먹고사는데 지장이 없고, 편안하게 살 수 있게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풍도의 정치철학은 아버지 풍량건의 영향이 크게 작용했다. 아마도 풍량건이 없었다면 풍도는 어느 누구처럼 한 시대의 충신 또는 간신으로 이름이 오르내리고 있었을 수 있다. 아버지 풍량건은 풍도에게 관료가 되고 정치를 함에 있어서 애국과 충군의 차이점을 위징의 예를 들면서 신하로 살아가기 위한 양신(良臣)은 무엇인가에 대해 설명해 주었다.

"네가 충성으로 모시는 왕이 신하들의 말에 귀 기울이고 백성을 이롭게 하는 왕이라면 다행이지만 왕이 자기 맘대로 행동하고 백성을 자신의 수하처럼 대한다면 과연 그에게 충성을 하여서 무슨 이로움이 있겠느냐? 불의를 참지 못하고 왕에게 나가 충언을 한들 왕이 하루아침에 성군이 될 수 있겠느냐? 오히려 기다리는 것은 죽음밖에는 없을 것이다. 아무리 훌륭한 성품을 가진 신하도 성군을 만나는 것은 쉬워도 폭군을 성군으로 만드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내가 너에게 일깨워 주고 싶은 것은 누구 밑에서 일을 하건 상황에 따라 나아가고 물러날 때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러자 풍도는 아버지에게 말했다.
"우매하거나 폭군을 성군으로 만들 수 없다는 말씀입니까? 전 그들을 진심으로 대하고 하늘의 이치와 사람의 도리를 일깨운다면 능히 그들도 사람인데 변하지 않을 리 없다고 봅니다. 만약 그러지 아니한다면 목숨을 바쳐서라도 그들의 잘못을 바로잡도록 하겠습니다."

풍량건은 아들의 말을 듣고 다시 말했다.
"내가 너에게 역사를 가르치는 이유는 역사를 통해 반면교사를 하라는 의미이다. 당나라 초기 이세민의 신하였던 위징이 태종 앞에서 한 말을 기억하느냐? 그는 태종에게 양신이 되고자 한다고 했다. 위징은 군주에게 충성을 하는 방법에 있어서 군주도 살고 신하도 사는 영리한 충성을 말했던 것이다. 군주도 사람인지라 자신의 잘못을 지적하면 좋아할 사람은 없다. 그런데 충신이라고 군주의 잘 못을 깨우치기 위해 대 놓고 말을 하게 되면 군주가 과연 좋아하겠느냐? 따라서 신하로서 군주에게 자신의 의견을 말할 때에는 상황을 보면서 말의 강약이나, 어휘 표현 등을 잘 사용해야 하느니라."

풍도는 이런 아버지의 가르침을 통해 양신에 대해 깨닫게 되었으며, 이후 본인이 관직에 나가서 행동하는데 중요한 밑거름이 되었다. 즉, 아무리 군주에게 도움이 되는 바른말이라 할지라도 군주의 자질, 현재 상황, 분위기 등을 봐가면서 적절하게 말을 해야지 의협심만 앞세워 행동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었다. 또한 군주는 개혁의 대상이 아니라는 것도 풍도는 알게 되었다. 이러한 풍도의 자세는 그가 죽을 때까지 계속 이어졌다.

PS : 여러분에게 있어 리더는 누구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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