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오리 Dec 10. 2023

너는 과거를 기억하고 있는가?

무기억성을 가졌다고 착각하던 나 자신에게


나는 재수를 했다. 그것도 실패 확률이 높다는 ‘독학 재수’를 했다. 독학재수의 리스크가 크다 보니, 재수를 망했을 때의 플랜 B를 상상하기도 했는데 플랜 B의 선택지에는 지금 생각하면 기상천외한 ‘개그맨 공채시험 도전’이 들어 있었다. 


유머를 좋아했다. 어릴 때 만화가가 되고 싶었던 때에도 개그 만화가가 되고 싶었고, 만화에 재능이 없다는 걸 깨닫고 난 뒤에는 공개 코미디를 만드는 PD가 되고 싶었다. 어쩌면 PD에도 재능이 없을 수 있겠다고 어렴풋이 느꼈던 고등학생 시절에는 코미디를 전문적으로 다루는 대중문화 평론가가 되고 싶었다. 좀 더 전문적인 지식이 필요할 수도 있지 않을까 하여 ‘부조리극’과 같은 연극을 찾아보기도 했고, 이해가 안 가는 철학책을 읽어보기도 했다. 


독학 재수를 무사히 잘 끝마치고 ‘통계학’이라는 전공을 선택하게 된 것도 평론가라는 직업이 불안정하니 취업이 잘 된다는 통계학을 전공해서 안정적인 수입원을 갖기 위함이었다. 


이런 과거를 잊고 지냈다. 정신없이 대학교를 다니고, 취업을 준비하고, 사회생활을 하게 되면서 데이터 분석가로서 커리어를 잘 쌓고 싶고, 내 존재를 인정받고 싶었다. 용사가 용사의 숙명을 타고 태어난 것처럼, 나 역시도 데이터 분석 아니면 안 된다는 숙명을 타고 태어난 것 같았고, 그래서 이거 아니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을 계속하고 지냈다.


아마도 공부를 하고, 직장을 구하고, 사회생활을 해나가는 과정이 마냥 순탄하지 않았기 때문인 듯하다. 최선을 다하려고 노력했고, 풍파를 많이 겪으면서 그 과정 하나하나에 애착이 생겼다. 그러면서 코미디에 대한 나의 애정은 점차 흐려졌다.


내가 그다지 글을 잘 쓰는 사람이 아니라는 걸 깨달은 것도, 그리고 의사결정 과정이 너무나도 비합리적이라 묻고 싶은 흑역사가 되어 버린 것도 과거가 흐릿해진 요인 중 하나인 것 같다.





이렇듯 과거의 나를 잊고 지내는 때가 있다. 특히 흑역사가 있는 경우에는 의식적으로 묻어두기도 한다. 과거를 ‘기억하고 싶지 않은 것’처럼, 과거를 신경 쓰지 않고 살아가게 되는 경우가 있다. 통계학에도 비슷한 개념이 있다. 바로 ‘무기억성(memoryless property)’라는 개념이다. 무기억성은 미래에 어떤 사건이 일어날 확률은 과거의 사건에 영향을 받지 않는다는 개념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확률분포가 ‘무기억성’을 갖는 것은 아니다. 포아송, 지수분포 등 일부 분포에만 제한적으로 사용되는 개념이다. 통계에서도 일반적이지 않은 성질이지만 나 자신은 ‘무기억성’을 갖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었다. 현재의 내가 과거의 발자취로 이뤄졌다는 생각은 못하고, 미숙했던 건 잊고 싶었고 잘했던 건 원래의 내가 갖고 있던 타고난 재능이길 바랐다.

 

타고난 재능이 미숙하다고 느낄 때 스트레스를 받는다. 하지만 이 재능조차도 과거의 내가 노력으로 얻어낸 것이란 걸 알게 된다면 나를 아껴줄 수 있다. 내가 좋아하는 게 무엇인지 몰라 혼란스러울 때가 있다. 하지만 과거의 내가 좋아했던 것, 나의 취향을 돌이켜본다면 나의 취향에 대한 힌트를 얻을 수도 있다.  ‘무기억성’을 갖는다고 착각할 수 있을지언정 결국 내 인생은 과거의 발자취에서 괴리될 수 없다.




나는 유머와 웃음을 사랑한다. 


글을 잘 못 써도 글쓰기에 대한 애정이 있다.

그래서 다시 부족하지만 글을 쓰고 있다. 

작가의 이전글 중심을 잘 잡고 삽시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