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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운민 Feb 14. 2021

경기 유랑 양주 편 2-4(회암사 4)

태조 이성계의 또 다른 왕궁

끊어진 회암사의 명맥을 잇고 있는 새로운 회암사는 절터에서 상당한 먼 거리에 위치해있다. 언덕을 넘고 넘어 천보산 중턱에 이르러야 닿을 수 있는데, 비록 예전의 위세는 찾을 길 없지만 천보산의 기암괴석 아래 양지바른 곳에 자리 잡은 아늑한 사찰이다. 단지 새로 지은 절만 있다면 굳이 발걸음을 산 중턱까지 오게 할 일은 없겠지만 회암사가 지금 같은 명성을 가지게 해 준 고려말 조선초의 유명한 스님들의 사리탑이 자리하기 때문이다.


고려말 조선초의 삼대화상이라 할 수 있는 지공, 나옹, 무학 스님의 묘탑들이 언덕 위에서 회암사를 굽어 보고 있기에, 그분들의 정신이 깃들어진 회암사의 의미는 쇠퇴하지 않았을 거라 생각한다. 불교로 명성을 날렸던 인도의 날린다 대학의 마지막 학승이었던 지공 선사와 그 학통을 이어받았던 나옹선사 그리고 조선 건국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던 조선의 유일한 왕승이었던 무학대사가 회암사의 뒤편 언덕을 따라 마지막 안식처로 삼았었다.


산으로 올라가는 계단 초입부터 화려하진 않지만 정갈한 느낌의 승탑과 앞의 석등이 위치한 것을 볼 수 있는데, 인도 출신의 고승이자 3화 상의 정신적인 스승이라 할 수 있는 지공 대사의 탑이다. 고려에 머물렀던 기간은 단지 2년에 불과했지만 금강산과 통도사를 비롯한 전국의 명찰을 돌면서 법회를 열었고, 국왕을 비롯하여 백성에 이르기까지 지공을 추앙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전국 순회법회를 마치던 그해 지공 선사는 회암사를 방문하였다. 지공 선사의 눈에 회암사의 주변 지형들은 마치 인도의 날린다 대학과 유사했고, 북경에 돌아가서도 고려에 늘 날란다 대학 같은 시설을 세우길 염원했었다.


뒤이어 나올 나옹 대사에 의해 지공 선사의 사리는 고려로 욺 겨져 생전 불법의 도량으로 점찍어두던 회암사의 뒤편에 자리 잡게 되었다. 뒤편으로 계단길이 이어지는데 한참 올라가다 보면 비슷한 양식의 승탑이 눈에 아른거린다. 지공 선사의 학맥을 이은 나옹선사의 승탑이다. 영덕에서 태어난 나옹선사는 25세 때 회암사에서 4년 동안 수행에 정진했다고 한다. 그러던 와중 눈이 쌓인 뜰을 거닐다가 일찍 핀 매화를 보고 깨달음을 얻었다고 한다.

후에 나옹스님은 지공 대사의 유골을 모시고 고려로 귀국하고, 회암사를 새롭게 중창하는 등 많은 역할을 했었다고 한다. 이제 마지막 목적지를 향해 조금 더 힘을 내어 보기로 한다. 계단의 끝엔 앞서 보았었던 다른 승탑들과 달리 화려한 용이 음각되어 있고, 규모도 2배 이상인 무학대사의 탑이 웅장한 자태로 다가왔다. 


무학대사의 명성은 굳이 내가 말을 하지 않아도 많은 사람이 알고 있는 것처럼 태조 이성계와 아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인물이고, 숭유억불을 기조로 삼은 조선왕실에서도 왕사로서 존중을 받은 인물로 알려져 있다. 무학대사의 탑은 조선 전기 승탑 중 가장 뛰어난 걸작으로 평가받고 있다고 한다. 삼화 상의 승탑 순례를 마지막으로 길고 길었던 회암사지 유적군 탐방을 마치려고 한다. 아마 경기도 북부를 통틀어서 가장 화려하고 역사적 의미가 깊은 장소는 회암사지가 제일이 아닌가 싶다. 좀 더 많은 사람들이 회암사지를 방문하셔서 절터가 품고 있는 수많은 이야깃거리를 체험해보셨으면 하고, 미디어 아트와 상설적인 공연을 시도해 보는 것도 좋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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