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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운민 Feb 25. 2021

경기 유랑 양주 편 4-5(권율 장군)

추억이 묻어 있는 장흥 유원지

장욱진 미술관에서 담장을 따라 조금만 걸으면 갑자기 멀리서 한옥풍의 건물과 10기 정도의 고분들이 눈앞에 아른거린다. 한눈에 봐도 뭔가 심상치 않은 장소임을 알 수 있는데, 표지판엔 바로 권율 장군묘라는 안내판이 이 장소가 어떤 곳인지 알려주고 있다. 권율 장군은 우리에게 임진왜란의 영웅, 특히 행주대첩을 이끌었던 장군으로 유명하다. 우리나라는 전 국토가 박물관이다 하는 유홍준 교수의 말처럼 한가한 계곡일 줄 알았던 장흥지역에도 역사의 흔적이 짙게 남아있었다.


1537년 지금의 강화도에서 태어난 권율은 6대 조가 조선의 개국공신인 권근이고, 아버지는 영의정을 지냈던 권철로 뼈대 있는 가문에서 태어났다. 하지만 40세가 다 되도록 벼슬길에는 뜻이 없고, 관직을 얻으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친구들이 그런 권율에 대해 의아해 하자 권율은 “옛날 태공망은 나이 80에 현달해도 오히려 천하를 경영하여 백성을 구제했는데 아직 내 나이가 태공망의 반밖에 안 되는 데다 능력까지 미치지 못하는데 어찌 출세가 늦을 걸 걱정하겠는가”라고 담담하게 얘기하면서 글공부는커녕 지인들과 어울려 전국을 돌아다는 등 한량 같은 삶을 살았다고 한다.


40세면 시대 보정에 따라 지금 나이 40대 중반이라 봐도 되는데, 늦은 나이에 출세한 사람들은 우리에게 희망을 준다. 이런 권율도 벼슬길에 뒤늦게 오르게 된 때는 아버지인 권철의 죽음이 계기가 되었는데, 죽기 전에 권철은 권율에게 “내가 널 낳았구나” 한탄하면서 죽었다고 한다. 이 말에 깨달은 바가 있어 아버지의 상을 치르고 금강산에 들어가 과거 급제 공부를 시작했다고 한다. 이렇게 벼슬길에 늦게 올라 1582년에 식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 원정자가 되니 이때 나이가 46세였다.


권율은 문과 출신이지만 류성룡의 추천으로 의주 목사, 광주 목사를 거치며 병과에 대한 경험을 쌓는 중 임진왜란이 일어난다. 권율은 방어사 곽영의 중위장 자격으로 함께 북상하면서 그의 커리어가 시작된다. 비록 용인 전투에선 패했지만 권율은 통솔력을 발휘해 자기 부대를 온전히 수습하며 장군의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뒤이어 충청도에서 전라도로 들어오는 중요한 요충지인 이치 전투에서 승리하여 일본군이 최대의 곡창지대인 호남지방을 점령하지 못하는 큰 변곡점을 마련했다.


이후 권율은 독산성 전투, 행주대첩까지 연이어 승리하면서 도원수 지위까지 올랐고, 특히 이순신과 갈등도 있었지만 든든한 배후가 돼주어 임진왜란이 승전으로 끝나는 큰 발판을 마련했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이 끝난 1599년 기력이 다한 권율은 곧 숨을 거두었고, 이곳 장흥에 묫자리를 마련하게 되었다. 권율 장군 묘역은 권율뿐만 아니라 권율의 묘를 가운데에 두고 양쪽에 전부인 창녕 조 씨와 후 부인 죽산 박 씨가 함께 안장되어 있고 권율 내외의 묘 뒤편으로는 형 권순과 아버지 권철 내외의 묘가 있다. 


권율 장군의 묘를 마지막으로 양주 여행의 마무리를 지어본다. 한때는 경기도를 대표하는 도시였지만 지금은 다른 도시들에게 그 몸을 떼어주면서 그 영역이 많이 쪼그라들었지만 경기도 최대의 유적이라 할 수 있는 회암사지와 경기도를 대표할 수 있는 별산대 놀이 그리고 우리의 추억이 살아있는 장흥유원지에 이르기까지 양주 자체의 아이덴티는 잘 보존되어 있다. 양주의 남아있는 전통들이 잘 보존되고 발전을 위해 수많은 고민이 필요함을 숙제로 남기면서 이번 글을 마무리 지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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