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을 따라 흐르는 남양주의 역사 여행
남양주를 대표하는 인물은 누구일까? 서울과 가깝다는 지리적 이점 덕분에 수많은 역사적 인물들이 남양주를 거쳐갔지만 단 하나의 인물을 뽑는다면 단연코 다산 정약용 선생이라 할 수 있다.
그를 단순히 <목민심서>를 저술한 실학자라고 정의하기 어렵다. 다양한 저술활동은 물론 거중기를 고안해 '수원화성'이라는 계획도시를 설계할 정도였다. 가히 조선이 낳은 레오나르도 다빈치라고 할 수 있는 르네상스형 인간이었다. 단지 시대를 잘못 만나면서 천주교 박해사건과 연관돼 18년간 귀양살이를 하는 등 많은 고초를 겪은 바 있다.
당대에는 크게 인정받지 못했지만 현대에 들어서며 그의 삶과 사상이 재평가되고, 지금은 대한민국 국민이면 다산 정약용을 모르는 사람은 없으리라 본다. 현재 남양주 조안면 능내리(당시 광주군)에는 다산 정약용의 생가와 기념관 그리고 무덤이 있어 남양주시에서는 다산 정약용과의 인연을 유난히 강조하고 있다.
특히 뚜렷한 중심지 역할을 하는 상업지구 없이 각각의 신도시로 분산되어 있는 남양주가 다산 정약용의 이름을 딴 다산신도시를 만들고 난 뒤 신도시 내부에 각종 상업시설과 도서관, 심지어 시 2 청사까지 이미 들어섰다. 수도권 동북부 거점도시로 도약하려는 남양주시에 다산 정약용 선생은 단순히 인물 이상의 상징적인 존재일지 모른다.
하지만 그의 이름을 본떠 만들어진 다산신도시는 여느 신도시와 큰 차이가 없어 보인다. 천편일률적인 아파트 숲과 개성 없는 상가 건물들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수많은 부동산 건물들... 비록 남양주시에서 다른 신도시와 차별을 두기 위해 현대 프리미엄 아웃렛 같은 상업시설을 유치했으며, 전국 공공도서관 5위권의 규모를 자랑하는 거대한 정약용 도서관이 다산신도시에 들어섰다.
도서관은 시설 자체로는 무척 훌륭하다. 일단 지하주차장이 잘 갖춰져 있고, 세련된 인테리어를 자랑한다. 도서관 내부엔 카페도 입점해서 책을 빌려 커피를 마시면서 독서를 즐길 수 있는 등 문화시설을 즐기기엔 최적의 조건이다. 하지만 이 도서관이 정약용 도서관이 아니라 어느 다른 도서관과 차별성이 있을지는 미지수다. 개인적으론 정약용의 사상이 녹아들어 있는 소통하는 도서관의 느낌보단 부자가 단순히 집을 자랑하기 위해 돈을 들여 여기저기 치장한 느낌이 물씬 풍긴다.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주거공간을 얻기 위해 많은 돈을 벌고, 혹은 대출을 받아 직장과의 거리, 자녀 교육, 기타 환경 요건 등을 면밀히 고려한다. 그 장고 끝에 고른 집, 혹은 신도시가 될 터인데 아직까진 신도시엔 문화적인 요건을 충족시키지 못하는 것 같다. 요즘 땅 투기니 집값 상승으로 인해 신도시 문제가 세간에 오르내리고 있다. 다산신도시는 정약용 선생의 호를 붙여서 만들어진 도시인만큼 앞으로 그의 정신과 삶에 부끄럽지 않도록 다시금 거듭나길 바란다.
각설하고 물의 정원에서 북한강을 따라 팔당호 쪽으로 내려가면 반도처럼 불룩 튀어나온 부분이 있는데 그 장소에 정약용 유적지가 자리 잡고 있다. 정약용 선생은 이곳 마재마을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으며, 귀양살이에 돌아와서 57세부터 75세로 돌아가실 때까지 유유자적하며 지내던 곳이다. 정약용 선생의 고향인 이곳은 두물머리 서쪽에 위치하며 풍광이 무척 좋기로 유명하다. 수많은 화가와 사진작가들도 이곳은 자주 찾기도 하고, 밤에는 별을 볼 수 있으며 새벽녘에는 물안개가 산을 휘감는다. 정약용 선생은 이곳에서 배를 타고 서울을 드나들었으며 주변의 수종사와 운길산 등지로 유람을 떠나기도 했다고 한다.
마재마을로 들어서기 위해서는 언덕을 넘어가야 하는데 직전에 마재성지라 불리는 장소가 있어 가볍게 한번 둘러보았다. 정약용 선생뿐만 아니라 형제들도 그 명성이 대단한데 특히 셋째 형 정약종은 천주교 신자로 활약하다 신유박해 때 순교를 하여 그를 기르기 위해 마재성지를 조성하였다.
마재마을로 들어서자 맞은편에는 정약용 유적지와 실학박물관이 있는 다산 문화의 거리가 눈길을 끌었다. 그 주변에는 어느 풍광 좋은 명소와 다름없이 카페와 식당들이 대부분 들어섰다. 현실적으로 어렵지만 이런 장소에 비슷비슷한 베이커리 카페 대신 북카페나 독립서점 혹은 수많은 문화공간이 들어서면 더 좋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들었다.
하지만 문화의 거리는 나름 조성을 괜찮게 해 놓아서 바닥에 새겨놓은 다산 정약용의 저서들을 살펴보고, 거중기의 실물 모형이 있어 정약용 유적지에 왔다는 실감을 할 수 있었다. 그 길의 끝에는 실학박물관이 있지만 시간이 안 맞아 다음 기회로 미뤄야만 했다. 여행은 아쉬운 게 있어야 또 오게 된다. 본격적으로 정약용 유적지의 문을 들어서면 넓은 잔디밭과 함께 뒤편에는 정약용의 묘가 있는 언덕이 솟아 있었다. 전체적으로 포근하고 아늑함을 주는 집터였다. 우선 정면에 보이는 정약용의 생가인 여유당으로 이동한다. 여유당은 대홍수로 유실되어 새로 복원한 건물이지만 고즈넉한 느낌이 주는 아름다운 한옥이었다.
당호인 여유는 선생이 모든 관직을 버리고 가족과 함께 고향으로 들어가 지은 것으로 그의 저서인 여유당기에서 여는 겨울의 냇물을 건너는 듯하고 유는 사방을 두려워하는 듯하라는 노자의 말에서 따왔다고 한다. 현대인의 사회 처신술에 대한 가르침을 조금 받으면서 ㅁ자 형태의 집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이제 그의 묘소로 천천히 올라가 본다. 그의 묘는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아늑한 언덕 양지바른 곳에 자리 잡았다. 생전에 그의 뜻을 펴지 못한 채 귀양살이에서 돌아온 정약용 선생은 한강을 바라보며 무슨 생각에 잠겼을까? 오히려 세상 사람들이 알아주지 못했기 때문에 수많은 저서를 남긴 것은 아닐는지...
당대에는 인정받지 못했지만 그가 남긴 저서로 인해 우리는 그를 기억하고 지금도 그의 사상을 연구하고 있다. 우리나라뿐 아니라 유네스코에서도 정약용 선생을 매우 중요한 한국의 철학자로 인정받고 있다. 현대인들에게 삶의 이정표를 만들어 주시는 훌륭하신 분이지만 아직 그를 알기에 우리는 아직 미성숙하다. 남양주시도 그의 이름을 걸고 여러 사업을 하는 만큼 단순히 이름값만 빌리는 행태는 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를 통해 도시의 정체성을 확고히 하며 문화의 향기가 물씬 풍기는 남양주로 다시 거듭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