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릉의 마지막 안식처
맘에 들었던 여행지를 떠나는 것은 막 사랑에 빠진 애인과 기약 없는 이별을 하는 것만 같다. 늘 다음이란 여지를 남기고 가지만 어느새 나의 마음은 새로운 사랑에 대한 기대감으로 부풀어 오르고 있다. 이제 광릉 구역을 나와 다시 왕숙천을 따라 밑으로 쭉 내려간다. 숲으로 가득했던 광릉숲의 울창한 풍경은 신기루처럼 사라지고 무분별하게 치솟은 아파트들과 땅을 아무렇게나 파헤친듯한 택지지구의 풍경이 눈에 들어온다.
끊임없이 집은 생산되고 있지만 정작 그중에 내가 살 집은 있을까 싶다. 아무리 버둥버둥 살아도 눈만 감다 다시 떠도 집값은 천정부지로 치솟아 있다. 이런저런 상념에 빠져있다가 표지판을 바라보니 사릉역에 도착한 것을 알게 되었다. 광릉이 위치한 진접읍에서 왕숙천을 따라 남하하다 보면 하천 건너편에는 퇴계원이 위치해 있고, 그 건너편엔 진건읍이 있다. 진건읍에는 조선왕릉 중에서도 사연이 많은 왕과 왕비의 무덤이 더러 있는데, 우선 단종의 비인 정순왕후의 무덤 사릉이 있다. 그 사릉에서 고개를 넘으면 왕위에서 쫓겨나 제주도에서 쓸쓸한 죽음을 맞은 광해군의 묘가 산 능선 한 구석에 고개만 빼꼼 내밀고 있었다.
우선 사릉의 주인공인 정순왕후는 어린 나이에 단종의 왕비가 되었지만 어린 남편과 평생 보지 못할 생이별을 하고 말았다. 삼촌인 세조에 의해 왕의 자리에서 쫓겨나 산골 벽지인 영월로 귀양을 가게 되었기 때문이다. 단종은 곧이어 죽음을 맞게 되고, 정순왕후는 군부인으로 강등되어 현재의 동대문 밖 정월원에서 생활을 하며 품앗이로 생계를 유지했다고 한다. 가끔 집 뒤편의 동산에 올라 영월을 바라보며 단종을 그리워했다고 하니 얼마나 고달픈 삶이었는지 상상이 가질 않는다.
현재 금곡동으로 향하는 수많은 차량의 행렬이 무심코 사릉 고개를 넘어 사릉을 지나치지만 한 번이라도 가엾은 여인의 사연을 되새겨 주었음 하는 바람이다. 사릉 고개에서 사릉 말고 조그마한 이정표가 강하게 눈에 들어온다. 사연 많은 광해군묘를 가리키는 현판이다. 현재 광해군묘는 영락교회 공원묘지로 가는 길 한쪽에 철조망 옆에 마치 숨어있듯 모셔져 있었다. 시대가 변하면서 그에 대한 평가는 계속 변하고 있다.
조선왕조 당대부터 몇 십 년 전에 이르기까지 반정으로 쫓겨난 왕이라는 이유 때문에 광해군의 평가는 줄곧 부정적이었다. 하지만 세월이 지나면서 그의 행적에 대한 평가가 재조명되었고, 특히 최근에 미, 중 사이에 끼어서 외교전을 펼치는 우리나라의 상황과 광해군의 중립외교 정책이 묘하게 겹쳐 보이는 효과 덕분에 긍정적인 평가를 받은 적도 있었다.
하지만 최근에 들어와서 광해군의 무리한 궁궐 중건 영창대군, 임해군을 비롯한 형제들을 죽인 죄 이이첨 등 간신들의 중용 등을 통하여 부정적인 측면이 증가하는 추세다. 역사는 과거의 이야기지만 과거 사람들의 어떤 측면을 부각하는지에 따라 전혀 다른 이야기가 전개된다. 그게 역사의 매력이 아닐까 싶다.
조선왕가의 마지막 보금자리 금곡동
사연 많은 이야기를 뒤로 하고 고개를 넘어 한때 남양주의 유일한 도회지였던 금곡동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한때 남양주 군과 분리되면서 미금시로 잠깐 동안 존재했었던 금곡동은 현재 남양주에 우후죽순 들어오는 신도시들 때문에 기세가 많이 주춤한 상태다. 그렇지만 아직까지 남양주시청이 금곡동에 있고, 조선왕가의 마지막 보금자리가 이 동네에 남아있다. 조선 아니 대한제국의 처음이자 마지막 황제로 존재했던 고종과 순종은 물론 고종의 왕비인 명성황후와 왕실의 마지막 역사를 장식했던 영친왕과 덕혜옹주의 묘역이 함께 있는 홍유릉이 바로 그 장소다.
▲ 홍유릉으로 들어가는 삼문의 입구 홍유릉은 다른 조선왕릉에서 볼 수 없는 황제릉에 준하는 양식을 채택하였기에 차이점이 조금 보인다. 다른 왕릉과 달리 입구에 삼문이 달린 것 부터 그렇다.
경기도의 다른 조선왕릉들은 시 외곽 지역에 주로 위치해 있는데 반해 홍유릉은 크지 않은 금곡동의 시가지 면적을 절반 이상 차지하고 있다. 문화재가 그것도 세계문화유산이 동네 한복판에 자리하고 있다는 것은 축복이 될 수 있지만 주민들의 입장에서는 동네의 발전을 가로막는 골칫덩어리가 될 수 있다. 실제로 홍유릉이 있는 금곡동은 문화재가 있는 500미터 내에서 여러 가지 규제가 있기 때문에 발전과 보호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기 위해 여러 가지로 고심 중이라 한다.
일단 능역으로 들어오면 홍릉과 유릉의 갈림길이 나오는데 일단 유릉으로 먼저 가보기로 한다. 홍유릉과 다른 조선왕릉들의 큰 차이점은 고종과 순종이 황제에 올랐기에 기존의 조선왕릉 형태를 계승하면서 황제의 예우로 하여 릉을 조성했다는 것이다. 우선 정자각 대신 침전을 세웠고, 능침에 있던 석물(문, 무인석, 석양, 석호)은 종류와 개수를 늘리고 크기도 크게 조성하여 침전 앞으로 배치했다. 사실 대부분의 조선왕릉은 능침에 접근할 수 없어서 역사 탐방보다는 자연을 산책하는 느낌이 강한데 홍유릉은 입구에 석물이 일렬로 늘어서 있어 꽤 흥미로운 관람이 되었다.
▲ 유릉 권역에 있는 재실의 풍경 조선왕릉에는 릉을 지키는 능참봉이 유숙하고 제를 지내는 준비가 이뤄지는 재실이 존재한다. 홍유릉의 재실은 다른 왕릉의 재실보다 배이상 큰 규모를 자랑한다.
유릉은 조선 또는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제인 순종과 그의 두 왕비인 순명왕후, 순정 왕후가 모셔진 합장릉이다. 입구에 있는 재실부터 웬만한 양반집 못지않게 꽤나 큰 규모를 자랑했다.
▲ 순종과 2명의 황후의 합장릉인 유릉의 풍경 조선왕조의 마지막 황제인 순종을 모시는 유릉은 황제의 예로 안장되었다. 입구에는 능침에서나 볼 수 있는 석물이 일렬로 늘어서 있다. 우리나라에서 보기 힘든 코끼리나 낙타의 석상이 인상적이다.
특히 왕릉의 영역을 나타내는 홍살문에서부터 수많은 석물이 일렬로 도열해 있어서 그동안 받지 못했던 위압감을 처음으로 느꼈다. 그 크기도 다른 왕릉의 석물의 두배 이상이고, 종류도 훨씬 다양했다. 우리나라에서 볼 수 없는 동물인 코끼리와 낙타의 석상의 이국적으로 보인다. 유릉 능침은 재실에서 바로 정중앙 언덕에 있는 게 아니라 약간 옆으로 비껴 나듯 안장돼 있었다. 망국의 황제였다는 사실이 부끄러워서 그런 걸까? 사실 그가 이미 즉위했을 때 사실상 일본에게 국권이 사실상 넘어간 상태였다.
그는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고, 무언가 할 수 없는 상태의 황제였다. 1926년에 그가 사망하면서 일제는 조선 백성들을 달래기 위해 베트남의 카이딘 황제릉처럼 화려하게 조성되었지만, 조선 민중들에게 무능력했던 조선왕가의 기억은 낡은 휴지통에 던져버리고 새로운 대한의 시민의식이 싹트고 있었다.
고종과 명성황후의 능침인 홍릉
이제 고종과 명성황후의 능침인 홍릉으로 이동해 본다. 입구에는 둥그런 모향의 연못에 둥그런 섬이 있는 연지가 조성되어 답사로 지쳤던 몸을 잠시 쉬어갈 만하다. 홍릉도 유릉과 마찬가지로 입구에 석물이 조성되어 있는데 유릉과 다소 차이가 있는 모습이 든다. 겉으로 보기에는 유릉의 우람한 석물보다는 다소 작아 보이고 투박한 모습이 보이는 게 사실이다.
사실 유릉은 석물은 일본인들이 제작한 것이고 홍릉은 조선 장인들이 직접 조각한 것이라고 한다. 하지만 어딘가 딱딱하고 어색한 인상을 떨쳐 버릴 수 없는 유릉의 석물과 달리 홍릉의 석물은 해학적인 미소가 엿보이고 보면 볼수록 계속 쳐다보고 싶은 마음이 든다. 사실적이라고 해서 결코 좋은 작품이라 볼 수 없다.
▲ 고종과 명성황후의 합장릉인 홍릉의 전경 고종과 유명한 명성황후가 잠들어 있는 홍릉의 풍경이다. 홍릉 역시 유릉처럼 석물이 침전앞에 조성되어 있지만 크기나 형식에 차이가 꽤 있다. 조선석공의 마지막 작품이 유릉의 석물인 것이다.
고종과 명성왕후도 우리나라 근대사에 있어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인물이다. 앞서 설명했던 광해군만큼이나 아니 그 이상으로 논란도 많고 과연 한국의 근대화를 위해 무슨 역할을 했을까? 일제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나름 자주독립을 위해 노력을 했을까? 아니면 자기 보신과 영달만 추구했던 암군일까? 여러 가지 논란이 지금도 끊이지 않고 있다. 하지만 명성왕후에 대해서는 한때 드라마나 사극, 뮤지컬 등과 특히 일본에 의해 죽임을 당한 비극 때문에 긍정적인 시선으로 바라봤지만 민씨 가문으로 인한 부정부패의 원흉이라는 점이 부각되어 점점 안 좋은 평가가 우세하고 있다.
이제 홍릉의 구석에 자리 잡은 문을 열고 나가 조선왕실의 마지막 인물들이 영면하고 계신 영원으로 향해본다. 예전에는 홍유릉과 독립된 공간으로 상당기간 동안 비공개 상태로 있다가 최근에 새롭게 단장하고 대중들에게 공개되었다. 고종황제의 아들로 마지막 황태자였던 영친왕과 이방자 여사가 묻힌 영원 그리고 조금 더 나아가 비극적인 인생을 살았던 덕혜옹주의, 그리고 독립운동을 했었던 의친왕의 묘가 근방에 있었다.
근대의 인물들은 아무래도 현대의 삶을 살고 있는 우리네 인생과 밀접한 관련이 있기에 더욱 논란도 많고 피부로 와 닿는 게 있다. 서울과 근방에 있는 남양주로 와서 아름다운 자연은 물론 역사적 인물의 발자취도 둘러보며 되새겨 보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 되지 않을까는 생각을 가지며 답사기를 마무리 짓는다.